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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Yu MD Nov 24. 2020

공중보건의사 일기 #3

노인의 복약 순응도에 관하여

최근에 모 디자이너가 각종 장기 모양으로 알약을 디자인해 세계적인 디자인 어워드에서 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봤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약 봉투를 보고 다들 비슷하게 생긴 약 모양 때문에 헷갈리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ASIA DESIGN PRIZE

일개 일반의인 의사가 봐도 잘 만들었다. 어떤 약들이 이 디자인과 어울릴까 머리에 바로 떠오른다. 물론 실용성은 떨어지기 때문에 제약회사에서 이러한 디자인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리고 약 먹어버리는 것을 잊거나 오남용을 예방하는 목적으로도 마땅하진 않아 보인다. 보통은 약국에서 약을 처방받을 때 약포지 하나에 매회 복용량이 담겨 나온다. 따라서 비슷하게 생긴 약을 골라서 이 약인가? 저 약인가? 헷갈리며 먹어야 할 필요는 없다. 실용성이 문제이지 디자인 자체를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다. 아이디어를 낸 디자이너도 실제 적용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하니까. 


나는 이 디자인을 보면서 내게 오는 많은 노인 환자분들을 떠올렸다. 경험을 토대로 노인의 약 복용 문제에 대해 접근을 해본다. 노인들의 복약 순응도가 떨어지는 큰 이유 중 하나는 환자가 약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임의로 약을 조절하는 것이다. 우선 노인 분들은 본인이 먹는 약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 예방접종을 하거나 처음 방문하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기존에 먹는 약이 있는지, 그게 어떤 건지 여쭤보면 백이면 백 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심장약, 당뇨약, 혈압약, 무릎관절약, …”

약의 이름을 정확히 아는 분은 아무도 없다. 심장에 쓰는 약과 당뇨에 쓰는 약, 고혈압에 쓰는 약, 그리고 무릎관절 통증에 쓰는 약이 수십 가지 이상이다. 그중에 특히 흔하게 문제 될 수 있는 약은 아스피린이나 혈액응고 억제제 같은 약이다. 피가 날 수 있는 수술이나 시술 시 보통은 1주일 정도 중단해야 수술 또는 시술이 가능하다. 코르티코스테로이드(corticosteroid) 제제의 약들도 오랜 기간 사용 시 쿠싱증후군과 같은 다양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최 할아버지는 처음 보건지소에 내원하셨다. 고혈압과 당뇨약을 다른 병원에서 처방받아먹고 있었는데, 여기서 가능하냐고 묻는다. 집 근처 병원인데 병원 이름도 자세히 모른다. 무슨 약을 먹고 있는지 아시는지 여쭤봤더니 그냥 고혈압약과 당뇨약을 먹고 있다고만 재차 말씀하신다. 그리고는 여기서 검색이 안되냐고 하신다. (물론 안 되죠…) 이런 상황을 겪었을 땐 일단 난감하다. 보건지소는 접근성도 좋고 진료비도 저렴해 분명 일부 노인분들에게 유익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존에 잘 맞게 복용 중인 약을 무시하고 새로 처방을 하는 건 환자분에게 유해를 끼치는 행동일 수 있다. 용량과 용법을 다시 맞춰가는데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 중에 불필요하게 혈당과 혈압 변동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약을 알아오셔야 한다고 말씀드리면서 돌려보낼 수밖에 없다. 


기존에 처방받은 병원에 연락해서 물어보거나, 먹던 약포지를 꺼내 보여주시는 경우도 있다. 약을 가져오면 하나하나 약의 모양과 약에 쓰여있는 글자로 검색해서 찾아보기라도 할 수 있다. 처방전이나 약국에서 받은 약 이름이 쓰인 봉투(요새는 약을 담는 종이봉투에 약 이름이 쓰여 있는 경우가 많다.)를 가져오는 게 가장 좋다. 어떤 할아버지는 본인이 먹고 있는 약 이름과 용량을 메모지에 적어서 지갑에 넣고 다니셨다. 먹고 있는 약을 여쭤보니 주섬주섬 메모지를 꺼내서 보여주셨다. 이런 경우는 드물다. 본인 아이디어인지 보호자분의 센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할아버지는 적어도 내 기준엔 백 점 만점에 백 점이다.


바라기는 매일 먹는 약 정도는 약의 이름과 용량을, 그리고 혹시 문제가 되는 약은 무엇인지 환자가 기억하면 좋겠다. 치매 등의 이유로 기억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보호자가 위와 같은 센스를 발휘해 주는 것만으로도 병원에서 큰 문제없이 진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인의 병과 약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수록 환자의 복약 순응도도 올라갈 것이라 확신한다. 환자의 복약 순응도는 의사와 약사의 책임도 있지만 환자의 책임도 분명 있다. 나도 최선을 다해 약에 대해 설명한 만큼 환자도 그걸 최대한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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