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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Feb 07. 2023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해보렵니다.

[보글보글 매거진] 글놀이 "[셀프 칭찬] 나를 칭찬합니다!"

보글보글 매거진 방장님께서 멍석을 깔아주셨으니,

제대로 해 준 적이 없던,

저에 대한 칭찬을 미치듯이 해보렵니다.

비록 조금의 거짓도 없을지라도 읽다 보면 심한 자뻑에 심기가 불편해지실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 태어나자 마자 난리가 났습니다. 백옥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사내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들이 꼭 필요한 집에.

엄마 말씀에 의하면 엄마 품에 있을 새가 없었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서로 데려가서 보는 바람에.


- 국민학교에 들어가자 마자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반에서 1등은 놓치지 않았고, 4학년 때부터는 쭈~~욱 반장을 했습니다.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아주 좋았습니다.

예전에는 일요일에 6학년 주번이 돌아가면서 학교 교문을 지켰었습니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제 여동생 둘이 학교에 놀러갔는데, 교문을 지키고 있던 여학생들이 제 여동생이라고 들여보내줄 정도였습니다. 동생들이 말해줘서 알았습니다.


- 연필 따먹기, 핀 따먹기, 땅 따먹기, 고무줄 놀이, 비석 치기 등 어떤 놀이를 해도 지지 않았습니다.

몽당 연필로 딴 큰 연필들은 저의 재산이었죠.

제 책상에는 실핀을 잔뜩 꼽은 옷핀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제가 따먹은 땅을 국가에서 인정해줬다면, 엄청난 땅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 국민학교 졸업할 때, 우등상, 6년 개근상, 전남매일 사장상, 선행상을 받았습니다.

상으로 영어사전, 국어사전 등을 받았죠.


- 소문난 효자였습니다.

작은 쌀 가게를 하는 부모님을 도우려고, 쌀 배달을 위해 짐빠리(아주 큰 자전거)를 각고의 노력 끝에 탈 수 있었습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시작한 쌀 배달은 대학교 때까지 계속 되었죠.

쌀 배달을 해서 받은 수고비(80키로그램 짜리 쌀 한가마를 배달하면 500원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배달 꾼들에게 지급되는 금액이죠)를 모아서 부모님 생신 선물 해드리고, 동생들 학용품을 사줬습니다.


- 중학교 1학년 때, 전라남도 교육감이 주는 선행상을 받았습니다. 교육청에 교감선생님과 함께 가서 받았죠.


- 줄 곧 전교 10등 안에 들었습니다. 최고 전교 3등까지 해봤죠.

과외를 는 잘 사는 집 아이들을 주경야독 하는 제가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저는 오직 혼자 교과서로만 공부했으니까요.


- 고등학교 졸업할 때, 우등상, 개근상, 12년 개근상을 받았습니다.

우등상은 저희 반에서 단 두명만 받았죠.


- 대학 입학금이 없다는 아버지 말씀에, 하향 지원을 하여 당당히 그 대학교 수석입학을 하였습니다.

등록금 전액 면제, 2년간 장학금 지급을 약속 받는 수석이었죠.

주경 야독을 하여 이루어낸 쾌거였습니다.


- 여동생을 대학교에 보내기 위해, 돈이 없다는 아버지와 협상하여 제가 국가에서 지급하는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여동생을 대학교에 보냈습니다.

졸업 후에 받은 만큼 국가에 봉사해야 하기에 저의 인생을 후퇴시키는 결정이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 몰래 바이트(당시에는 대학생 아르바이트 금지였습니다. 지지리 복도 없죠.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면, 용돈도 벌고, 국가 장학금도 신청할 필요가 없었고, 부모님 빚도 조금 더 빨리 갚았을텐데.)를 1년간 했습니다. 당시 돈으로 한 달에 40만원을 받았죠.

이 돈을 모아서 부모님께 드려 전세금이 부족하여 쫒겨날 뻔 했던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 국가에서 주는 한달 생활비 60만원 중 36만원을 저금하였습니다.

부모님 빚이 많아서 어차피 제가 갚아야 하기에 돈을 모아야 했습니다.

4년간 모은 돈을 부모님 빚 갚는데 써야 했죠. 물론 많이 부족했지만.


- 부모님께 손자를 빨리 안겨드리고, 저와 제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양가의 반대와 여자 친구의 우려를 뚝심으로 밀어부쳐 이겨내어 26살, 학생 때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듬해에 첫 아들을 낳았고, 일찍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은 덕분에

현재는, 이른 나이에 자식 양육에서 벗어 나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 아들 손자를 그토록 원하시던 부모님께, 2년 간격으로 아들 손자 둘을 안겨 드렸고,

애교를 부릴 수 있는 손녀도 보시게 해드렸습니다.

부모님 빚을 갚기 위해 비록 결혼 후 8년간 떨어져 살아야 했지만,

허리 띠 졸라 매고 산 덕분에 부모님 빚 다 갚고, 아이들 모두 잘 키워내고,

아무 것도 없이 마이너스로 시작했던 제가 지금은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예금도 있습니다.


- 제가 돈을 벌기 시작할 때 부터 부모님께서 돌아가실때까지 20여년 동안 한푼도 없으신 부모님께서 사시는 집을 비롯한  모든 생활비 및 용돈을 제가 감당했습니다.


ㅡ 제 집을  마련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22년간 월드비전을 통해 매달 30만원 씩 해외 아동 10명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직원 두명에 기본 기구 밖에 없는 작은 의원이라(돈이 없고 빚을 내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서 작게 개원해서 그대로 유지 중이기에) 같은 직종과 비교하여 소득이 아주 적고 부모 부양하며 자식들 키우다보니 후원을 더 하지 못했지만, 이제 이런 책임에서 벗어나고 있으니 후원을 더 늘려갈 예정입니다.


쓰다보니  기분이 조금 이상하네요.

남들 다 하고 사는 것을 칭찬하는 것도 그렇고  해서

여기서 중단해야 할 듯 합니다.

훨씬 많은데.ㅎㅎㅎ.


올리지 말까 하다가

철판 깔기로 한 김에 올립니다.


댓글로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

고개를 들 수 없을 것 같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댓글 창을 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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