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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oniist Oct 24. 2021

시나리오 쓰고 있네, 이 좌뇌가.

2021. 10. 23.


。집중샤워

살면서 꾸준히 한 것이 거의 없는 편이지만 그래도 샤워는 매일 질리지 않고 하고 있다(당연한 것 아닌가?). 사람마다 샤워하는 방법이 다를테지만 온수가 나오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 집에서 살고 있기에 세면대에 물을 틀고 양치를 먼저 한다. 오른손으로 양치를 하면서 왼손으로 살짝살짝 물을 만져보며 온도를 체크하고 어느 정도 데워졌다 싶으면 서둘러 양치를 마무리한다. 


물이 나오는 곳을 샤워기로 바꾸고 미온수로 머리를 적시면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샤워를 시작한다. 머리는 소량의 샴푸로 초벌을 하고 다음에 조금 더 많은 양의 샴푸로 재벌을 한다. 머리 구석구석을 손가락으로 잘 세척해준다. 시간이 많으면 두피를 마사지해주기도 한다(하루 종일 두피 마사지만 받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하는데 가끔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겨줄 때 정말 두피 마사지를 잘해주시는 분을 만나면 머리 모양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 없고 이걸로 모든 게 다 잘됐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더 남으면 헤어 컨디셔너를 바르기도 한다. 헤어 컨디셔너를 헹구면서 머리카락의 컨디션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한다. 

샤워를 하면서 노래를 듣거나(혹은 부르거나) 잡다한 생각들을 정리할 때도 있지만 요즘은 샤워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샤워를 할 때는 무엇보다 샤워가 중요하니까. 샤워를 잘 해내기 위해 세신을 위한 모든 동작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요즘 내 마음가짐이다. 이 샤워를 하기 전이나 한 뒤의 일 같은 건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말아야 한다.


욕실을 나와 그날 샤워에 대한 나의 집중력을 평가해본다. 면도크림, 바디크림, 핸드크림. 귀찮더라도 이 크림들을 모두 사용했느냐 사용하지 않았느냐에 따라 그날 샤워의 등급이 나뉜다. 샤워에 집중한다면 이 크림들을 모두 사용할 수 있다(샤워에 집중한다는 건 크리미해진다는 것이다). 샤워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일들을 떠올린다면 이 크림들 중 어느 하나를 아니면 모두를 건너뛰게 된다. 하지 않아도 크게 상관없는 사소한 일들이니까. 


。이야기의 힘

요즘 이야기의 힘이 정말 세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매력적인 이야기를 지닌 콘텐츠가 전 세계를 휩쓴다. 여기에 그 콘텐츠를 둘러싼 사람, 환경들의 이야기가 추가로 생성된다. 사람들은 계속 이야기를 짓고 새로운 이야기를 찾고 공유하고 열광한다. 기업은 무엇을 만들든지 거기에 이야기를 입히려고 한다. 상품의 기능보다 솔깃한 이야기로 고객을 설득한다(혹은 낚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끌리는 이야기를 사고 입고 먹는다. 단순히 이야기를 즐기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소유하고 싶어하고 그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


이렇게 보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정말 대단한 일인 것 같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사실 누구나 하고 있는 일이다(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하고 있는 일이다). 사건의 전말을 밝히지 않은 감질나는 연예인 가십기사를 보며 어떻게든 알고 있는 모든 데이터를 동원하여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한 적이 다들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적이 있는데 대학생 시절, 토요일 오후에 쇼핑하러 들렀던 백화점에서 우연히 대학교 남녀 동기 두명이 손을 잡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문제는 둘다 사귀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을 발견함과 동시에 내 좌뇌가 그로부터 1년 전 개강파티 때 두 동기가 나란히 앉아 있던 모습을 소환해내며 오늘 함께 이렇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기까지 겪었을 많은 일들을 순전히 내 마음대로 지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야기의 공백을 참지 못하고 어떻게든 그 공백을 채워놓으려는 이야기에 진심인 존재다. 글자 사이사이의 작은 공백도 견디지 못해 그 사이에 이야기를 욱여넣는 존재다(그걸 삼행시라고하며 즐기기까지 한다).


。나의 퍼스널 브랜딩

'다다다' 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브랜딩과 관련된 많은 콘텐츠들을 접하고 또 나름의 공부를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내 콘텐츠를 성공적으로 브랜딩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그렇지 않으면 매 에피소드마다 섬세한 금액인 2만원의 광고 홍보비를 지불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퍼스널브랜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말 그대로 개인을 브랜딩하여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자신의 이력, 경험 등을 꾸준히 정리하여(잘 포장하고) 공유하면서 특정 분야 또는 일반 대중들이 끌릴만한 자기만의 소구점을 도출해낸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이야기가 중요하다. 많은 경험을 하나의 매력적인 이야기로 엮어내는 솜씨가 필요하다. 퍼스널 브랜딩을 한 분들을 찾아보면 정말 대단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이렇다할 퍼스널 브랜딩을 하지 않지만 나 역시도 내 이야기를 삶 속에서 무수히 써내려가고 있다. 어제도 회사에 지각할 뻔한 자신을 자책하며 내가 이렇게 게으른 이유는 어려서부터 나태했기 때문이며 어려서 나태했던 이유는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진지하게 도전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관계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한 편 썼다. 문제는 반대방향으로도 뻗어나간다는 것인데 이렇게 게으르고 나태한 나는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며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한 편 썼기 때문이다(지각한 것도 아니고 지각할 뻔한 것일 뿐인데). 


。시나리오 쓰고 있네, 이 좌뇌가

조건반사적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내 좌뇌(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좌뇌가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는 이렇게 삶을 피곤하게 만든다. 어떤 경험에 대해 반성하고 싶을 때는 아주 잔인한 이야기를 만들어 필요 이상의 자책을 하게 만들고 긍정적이고 싶을 때는 전에 없이 아름다운 과거와 미래를 펼쳐보이며 나를 흥분하게 만든다. 이야기 안으로 나를 매몰시켜 본질을 볼 수 없게 한다. 하지만 이건 내가 쓴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 없이 못사는 인간을 위해 좌뇌가 만들어낸 반응일 뿐이다. 이럴때마다 한 번씩 떠올려야 한다. 좌뇌, 또 시나리오 쓰고 있는겐가? 


샤워에 집중하는 건 이야기에 매몰된 나를 건져내는 것이다. 세안제를 바른 김에 대충 면도하는게 아니라 면도크림을 꼭 바른 뒤 면도를 하고, 바디워시를 손바닥에 묻혀서 대충 몸에 바르는게 아니라 샤워볼에 묻혀서 충분히 거품을 낸 뒤 몸에 바르고, 샤워를 마치고 꼼꼼히 물기를 닦은 뒤 바디크림과 핸드크림을 바르는 일에는 어떤 이야기도 끼어들 틈이 없다. 이런 행위가 하루에 한 번은 꼭 내게 필요하다. 그래서 매일 샤워를 거르지 않고 있다.


삶이라는 나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고 나는 그 속의 주인공인 것 같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순간을 엮은 것이 이야기처럼 보일 뿐이다. 거칠게 말하면 이야기라는 것은 없지 않을까. 주인공 같은 것도 없고. 진짜 있는 건 순간일 뿐이다. 관계없는 순간들을 무리해서 엮고 싶지 않다. 어떤 순간들은 그냥 순간 그대로 두고 싶다(아무래도 나는 브랜딩에는 영 소질이 없을 것 같다).


。삶은 아이러니입니다

지난 2주 동안 소설 2권, 경영서 2권을 읽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브랜딩 관련된 글과 콘텐츠도 상당히 많이 접했다(개인적으로 대단한 페이스인데 그만큼 인풋에 목말라 있다). 브랜딩에 대해 고민하면서 얻은 결론은 '내공 없는 콘텐츠를 빨리 브랜딩하면 그만큼 빨리 망한다'는 것. 그래서 브랜딩보다는 그림력이나 구성력과 같은 내공을 쌓는데 더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다다' 콘텐츠 자체로 주고 싶은 메시지 즉 '삶은 아이러니입니다'(워딩이 직설적이어서 바꾸고 싶다. 그렇다고해서 외국어를 쓰고 싶진 않고. '아이러니를 받아들이세요' 이건 좀 교조적이고 '왜이러니?아이러니!' 이건 못봐주겠다. 역시 브랜딩에는 소질이 없다. 더 고민이 필요하다)를 조금 더 과감하게 드러내기로 했다. 내 간판과도 같은 인스타그램, 브런치, 네이버 블로그의 프로필을 아래와 같이 수정했다(각 플랫폼별로 허용하는 글자 수의 차이 때문에 조금씩 다르긴 하다). 



1. '다신 다짐 같은 건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를 그리고 있습니다.

2. 염세와 싸워야 하는 아이러니이스트(ironiist)입니다.

3. 단점과 약점이 많습니다.

4. 힙하지 못합니다. 딥하려고 노력합니다.

5.


1번은 내가 하는 작업을 2번은 내가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를 3번은 나의 부끄러움(?)을 4번은 내 취향을 나타낸다. 5번은 쓰고 싶은 것이 하나쯤 더 생길 것 같아서 빈 칸으로 남겨뒀다. '아이러니스트(ironist)가 아니라 아니러니이스트(ironiist)'라고 쓴 건 이미 통용되고 있는 아이러니스트라는 개념이 있는데 나는 그 개념과도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서 다르게 표기하기로 했다. 이렇게 적고 보니 좀 더 내가 가야할 방향이 명확해지는 효과가 있다. 봐주시는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아예 대놓고 별로라고 적어놨군.' 하며 실망하지만 않으셨으면 좋겠다.


왜 이러니

。마이클 조던은 대학을 갔다

마이클 조던은 185페이지만에 입학할 대학교를 정했다(재수를 안해서 다행이다 재수를 했으면 100페이지는 더 필요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전 1981년에 참가한 맥도날드 올스타전에서 조던은 엄청난 활약을 펼쳤지만 MVP로 뽑히지 못했다. 당시 조던의 어머니가 아들이 MVP를 빼앗겼다며 고함을 쳤다고 한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서 봤을 때 온화하다는 인상을 받은 델로리스 여사였는데 고함을 치다니. 그만큼 불공정한 결과였음이 짐작된다. 인상 깊은 건 델로리스 여사는 그때의 모욕을 잊었는데 조던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이 사건을 잊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경쟁심을 부추기는 원동력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에는 좌뇌가 그 모욕을 이야기로 만드느라 바쁠텐데 조던은 모욕감만을 고스란히 챙겨서 경쟁심의 재료로 만들었다. 아무래도 조던도 샤워를 집중해서 했을 것이다. 


덧붙임1. 그때 그 동기 둘은 정말 무슨 사이였을까. 끝내 둘이 사귄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덧붙임2. 기록을 위해 덧붙이면 이 글의 앞부분은 '자존감'에 대해 고민하다 발견한 책 <셀피>를 읽으며 스쳐가는 단상들을 붙잡아 두었다가 엮었다.


- 듣고 있는 것 : ADOY

- 마시고 있는 것 : AHMAD TEA

- 읽고 있는 것 : 셀피(윌 스토), 언더그라운드(하루키), 마이클조던(롤랜드 레이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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