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roniist Apr 20. 2022

60번의 실패에 대한 글을 쓰려다가


2022. 4. 10. 일.


종로구는 산책을 할만하다. 이건 내가 지금 종로구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잠을 자본(산책꾼인 나에게 이 부분은 꽤 중요한데 1박도 하지 않은 곳에서의 걷는 행위를 산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미지를 더듬어가는 정찰에 가깝다. 산책은 중간중간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혹은 20년 전 살던 아파트 단지 내 늙은 소나무의 안부를 떠올리며 걸어도 아무 탈이 없어야 한다) 국내외 도시, 마을들과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광화문, 교보문고, 덕수궁 혹은 종각 등의 명소만을 구경 하다가 돌아가는 관광객 입장에서는 종로구 어디에 거주지가 있을지 떠올리기 쉽지 않다. 실제로 2022년 2월 서울시 주민등록인구 통계자료(출처 : 서울열린데이터광장)에 따르면 종로구의 인구는 153,805명으로 중구에 이어 뒤에서 두 번째다. 가장 많은 송파구가 667,134명으로 종로구의 4배이다. 반면 면적은 송파구가 종로구의 1.4배에 불과하다(종로구의 면적은 총 25개의 서울시 내 자치구 중 11위쯤 되는 듯 하다). 종로는 중심업무지구, 관광지로서의 기능이 강한 곳이어서 그런지 면적에 비해 거주하는 사람이 적은 지역이다.


그렇지만 종로구는 오래된 역사만큼 거주지로서의 역사도 켜켜이 쌓여 있다. 한옥, 양옥, 독립운동가 집터, 적산가옥, 쪽방, 대저택, 지은지 50년이 넘은 아파트, 최첨단 신축 아파트가 공존하고 있다(2022년 4월 현 시점까지는 대통령 거주지도 있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살았고 또 살고 싶어했던 곳이다. 그리고 그들이 필요에 따라 만들어 놓은 길들이 몸의 혈관처럼 구석구석 뻗어 있다.

내 주요 산책길은 필운동, 누하동, 누상동, 옥인동, 효자동, 창성동, 통의동으로 이어지는데 오래된 골목들이 많아서인지 간혹 아무 생각없이 들어갔다가 막다른 길을 마주하게 될 때도 있다. 이 동네들의 산책이 흥미로운 건 군데군데 다양한 음식점, 상점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쇼윈도를 설치하여 안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놓았기 때문에 영업 시간을 피해 산책을 하면 안에 진열된 것들을 한참 동안 들여다볼 수 있다. 가게 앞에 서서 '저건 뭐에 쓰는 거지?' '여기 에스프레소 머신은 저렇게 생겼군' '아, 저 의자는 오래 앉아 있기 힘들겠는 걸' 이런 생각들을 한다.


이미 제법 알려진 동네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임에도 이곳의 상점들은 2년 이상 버텨내기 쉽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이 동네에 거주한 6년의 시간 동안 많은 곳들이 사라졌다. 원래도 경쟁이 치열한 곳인데 코로나19로 타격이 더 컸던 것 같다. 꽤 선방하던 몇몇 곳들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곳에는 새로운 가게들이 자리를 잡았다. 사라진 것들을 아쉬워해야 할지 새로운 것들을 반겨야 할지 난감하고 착잡하다.


이 산책길에서 개인적인 즐거움은 역시 많은 카페들을 구경하고 마셔보는 것인데 들어갔을 때 향이 괜찮은 곳에서는 원두를 구입한다. 예전에는 스타벅스와 같은 프랜차이즈 매장의 커피만 마셨는데 요즘은 오히려 이렇게 원두를 함께 파는 동네 카페들에 더 신뢰가 간다. 파는 사람의 자부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는 사람인 나의 응원이 전해졌으면 한다.

이 동네도 결국 개발의 논리를 이겨내지 못하고 많은 것들이 바뀌겠지만 나와 내 앞선 사람들이 걸었던 작은 길들만은 끈질기게 남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터벅터벅 하숙집 골목을 올라오다 잠시 숨을 돌리며 인왕산을 바라봤을 윤동주를 상상하는 일은 내 뒤에 올 사람들도 경험해볼만한 일이다. 한편으로는 사라지는 것이 어쩔수 없다면 사라지기 전에 즐기는 것이 당대 사람의 특권이니 나부터 이 산책길을 더 많이 걸어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누군가와 이 곳을 함께 산책할 때 개인적으로 꼭 삼가는 것이 한 가지가 있다. 혹시 정치 얘기가 나오려고 하면 입을 막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면 왠지 그곳에 닿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겨서인지 아니면 원래 터가 그런 것인지 여기만 오면 사람들이 시사평론가에 빙의 되는데 억지로라도 입을 막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산책마저 정책으로 느껴진다.


차라리 20년 전 살던 아파트 단지 내 소나무의 안부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60회 넘게 제작하였지만 당초 예상했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콘텐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낫다. 그렇다면 이것은 60번의 실패가 아닐까 이야기를 하며, 그렇지만 그 이전에 60번의 질문과 60번의 도전이 있었음을 이야기하며, 질문과 도전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 신기하다고 이야기하며.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산책한다.


- 요즘 듣고 있는 음악 : Lo-fi 플레이리스트

- 요즘 마시고 있는 것 : 내자동 커피, 양카페, 광화문커피 아메리카노

- 요즘 읽고 있는 것 : 산책자들(로베르트 발저), 균형이라는 삶의 기술(이진우)









작가의 이전글 오타쿠에게 귀를 기울이면_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