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10개 유물 한데 모은 이 전시의 관람 자체가 역사의 산증인
"아아 80주년 광복절은 지나갔지만 나는 아직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오마주 해보았는데요. 말 그대로입니다. 며칠 전 광복절은 지나갔지요, 하지만 아직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 전시회 등 행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에 서포터즈 “YOUNG:光” 활동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난 활동을 통해 저는 서울 소재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 전시를 총 세 차례 소개한 바 있습니다.
한번 쌓아볼까요? 중구 소재 남산골한옥마을 전통공예관 특별전 <우리들의 태극기>, 중랑구 소재 망우역사공원 중랑망우공간 기획 전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종로구 소재 종로구 소재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우리들의 광복절>입니다. 이 가운데 우리들의 광복절은 11월 9일까지 이어지니 꼭 가 보시길 바라고요.
이번에 또 하나 한창 진행 중인 특별전을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바로 서울 중구 소재 덕수궁 돈덕전에서 열리는 특별전 <빛을 담은 항일 유산>입니다. 이 전시는 전국 110여 점의 항일 유산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답니다.
덕수궁과 돈덕전
왜 덕수궁에서 하지? 덕수궁 중명전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으로 일제강점기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며, 고종 황제가 머물던 곳으로 항일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전시 장소로 적합하다 볼 수 있습니다. 돈덕전
뭐지? 덕수궁 석조전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활용된다는 것은 많이들 알고 계시지만, 돈덕전은
거기가 어디지 하는 분들 계실 겁니다. 왜냐하면 복원된 지가 2년밖에 안 됐기 때문입니다.
석조전과 가까운 돈덕전은 순조의 즉위식이 열린 역사적인 건물이지만 일제강점기 때 헐렸다가 바로 2023년에 복원이 된 신상 건물입니다. 문화재청의 새 이름 국가유산청의 서울문화연구소가 바로 돈덕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돈덕전에서 전시가 열린다는 것은 이곳을 관리하는 국가유산청에서 주최하는 것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겠죠? 아무쪼록, 전시 주최와 장소를 알았으니 덕수궁 돈덕전에서 열리는 특별전에 방문한 저의 후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기 간 : 2025. 8. 12.~10. 12. 09:00~17:30(입장마감 17:00, 월요일 휴무)
장 소 : 덕수궁 돈덕전(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광복절 당일 오후 13시 40분에 방문, 1층 전시관을 10분 정도 관람하다 14시가 다가오자 돌연 중단하고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왜냐고요? 전시와 연계한 부대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부대행사로는 8월 14일 ‘항일독립운동과 문화유산’을 주제로 학술 발표회(세미나)가, 15일에는 황선익 국민대 교수님의 ‘빛을 담은 항일 유산 전시를 말하다’, 16일에는 최태성 한국사 강사님의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광복에 미친 영향’이라는 주제로 강연이 열렸습니다.
저는 광복절 당일 오전 10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제80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오후 17시경에는 서울광장에서 서울시 주관 <광복 80년 기념 콘서트>를, 밤 20시에는 광화문 광장에서 개최되는 <국민주권으로 미래를 말하다> 참여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행사 사이 여유 시간에 뭘 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마침 보기로 한
돈덕전 전시의 부대행사 대중강연이 14시에 있어 사전에 신청, 최종 참석자로 선정되었습니다.
대중강연 모바일 초대권으로 덕수궁 정문 대한문 앞에서 스태프의 확인 절차를 거쳐 별도 요금 없이 입장이 가능했답니다.
국민대 황선익 교수(독립운동과 항일운동사 전공) : 전시총괄 큐레이터, 광복회 장학위원, 서울시 국가유산위원회 위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운영 자문 위원, 문화유산위원회 전문위원,
전시를 잠시 보다 14시 강연시간 전 입장해 자리에 착석했고, 이내 강의는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일정이 맞아 신청했던 것으로 강의 내용 및 강사에 대한 정보를 잘 모른 채로 간 건데요. 강사 황 교수님 다양한 위원직 활동으로서 이 분야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전문가시며 특히 바로 이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하셨더라고요.
"독립운동과 관련된 어벤저스 물품이 다 모였고 심지어 진품으로 있다며 이 전시를 보시는 분들은 복을 찾으러 오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1호 보물과 등록문화유산 등이 거의 다 와 있고 이를 보는 어러분들은 산증인입니다."
황 교수님은 이 전시가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말하며 서두에 전시 개요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독립운동 유산은 1972년 8월 15일 처음으로 윤봉길 의사 유품은 안중근 의사 유묵과 함께 1호로 국가의 보물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이곳 덕수궁은 을사늑약의 현장이자 군제 개혁을 통해 국권수호를 하려던 명암의 공간으로 격변의 역사를 상징하는 현장, 덕수궁 대한문은 3.1 만세 운동 당시 많은 군중이 모여 시위를 벌인 함성의 현장, 정관헌의 보전과 돈덕전의 복원 등 국가유산청의 최근까지 문화유산 자리 찾기를 대변하는 곳이어서 이곳에서 전시가 개최되게 되었다고 설명하셨고요.
문화 탐방해 보신 분들 잘 아시겠지만, 배경지식을 알고 보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당장 강연 직전 잠시지만 전시관을 둘러봤을 때 전시 게시물에 설명이 잘 돼 있었지만 바로 집중 및 몰입이 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 특별전의 참여 전문가로부터 전시 구성과 주요 전시물, 어떤 것을 주의 깊게 보면 좋은지 등 관람 팁에 대해 설명 들으니 만족스러운 전시 관람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서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고요.
바로 전시 보기에도 무리 없이 잘 볼 수 있지만, 더 잘 보고 싶다면 실시간 강연 중계 영상을 다시 볼 수 있으니 먼저 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아래 링크 참조 바랍니다. 특히, 황 교수님 너무 유머러스하셔서 정말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재미와 유익'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강연이었어요. 다음에도 교수님 강연 소식이 있다면 주저 없이 들으려 합니다.
https://www.youtube.com/live/PTO8u4ZD218?feature=shared
(출처 : 국가유산청 공식 유튜브 계정)
전시는 모두 5개 부로 구성돼 있는데요. 강연 전 관람했던 1부 첫 전시 앞으로 가 교수님이 언급하신 최초 공개 등 강조 유물에 더 유의하며 다시 관람했습니다. 강연을 못 보셨더라도 전시실은 곳곳에는 강조 지점이 포인트 되어 있으니 이를 중심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일제의 엄혹한 지배의 어둠 속에서도 '빛'을 좇아 빛나는 미래를 열려고 하였던 역사가 있습니다. '광복'이라는 빛을 향한 한국민의 고난의 대장정을 되새겨주는 '문화유산'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독립운동의 기록과 유물이 국가 지정 문화유산과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되어 보전하고 있으며, 역사의 현장은 역사적 유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습니다. 국가유산청은 자유와 독립의 '빛'을 담은 항일 문화유산을 이곳 덕수궁에 모아 광복 80주년 특별전을 엽니다. 격변의 역사를 소환하는 공간에서, 항일독립 문화유산이 걸어온 길과 빛을 비추고자 합니다.
돈덕전을 들어오면 바로 우측 벽면에 "전시를 열며" 내용이 있고 옆 공간으로 들어가면 화려한 미디어 아트 영상이 송출되고 있었습니다. 전시를 열며 내용을 보지 않더라도 이 공간의 키워드가 "빛"이라는 것을 영상을 통해 단번에 알 수가 있었고요. 가운데 조형물은 마치 독립문을 연상케 했습니다.
웅장, 아름다움, 비장함 등 다양한 느낌을 주는 영상 속에서 가장 와닿은 장면은 문 형상 사이로 보이는 안중근 의사의 손과 문 우측 기둥의 "국가의 안위를 마음으로 애쓰고 속을 태움"이라는 뜻의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와 기둥 좌측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뜻의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글귀가 함께 등장한 이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본 뜻이 의미하는 것과 이를 빛으로 형상화한 모습 모두가 울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 이 안중근 의사의 글귀가 적힌 유물들을 곧 안에서 볼 수 있겠구나'하는 기대감도 들어서 빠른 발걸음으로 강연 전 잠깐 봤던 1부 전시 공간을 새로운 마음으로 찾았습니다.
근대의 여명기 외세의 침략은 우리의 생존과 발전을 위협하였습니다. 개항과 함께 몰아닥친 서구 국가들의 침탈과 국권을 위협하던 일본의 강력한 무력 앞에서도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국가의 존엄을 지키려던 절규, 불의에 대한 꾸짖음, 마지막 숨을 바치던 처절한 투쟁은 자주구국의 결의를 담은 유산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부 전시의 주요 내용은 1890년대부터로 을사늑약, 경술국치 속에서 우리는 암울한 상황에 맞닥뜨린 상황에서 이를 이겨내려는 활동으로, 이와 관련된 유물 전시입니다. 도입은 자주 국권을 활동 중 외교 관련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통한의 시대 : 격변의 시대, 경운궁은 열강과의 외교무대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조선왕조의 고종은 나라의 주권을 유린하고 왕실을 위협하는 일본의 무력을 피한 후,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공포하고 자주독립국가의 위엄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자주국의 국권을 위한 외교 활동, 외교권을 지키려는 황실의 선언은 통한의 시대를 이겨내려던 역사적 기록입니다.
<미사일록>과 외교관이자 독립운동가 "이범진"
미사일록 : 주차미국특명전권공사 이범진의 활동을 공사관 서기생 이건호가 일기 형식으로 필사한 자료이다. 1896년 6월 20일부터 1897년 1월 31일까지의 주미공사 활동과 다양한 문화적 경험 등이 수록되어 있다. 19세기말 구국 충정을 이어가던 개화 지식인의 서구 인식 외교 활동을 보여주는 유산이다.
미사일록에 앞서 이범진을 미국 파견 특명전권공사로 삼는 임명장 및 독일 파견 특명전권공사로 위임하는 신임장도 볼 수 있었는데요. 1부 초입부터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받는 친러파의 중심인물로서 대한제국 대표적 외교관이자 독립운동가인 이범진에 대해 집중 조명했습니다. 아관파천 시기에 큰 역할을 했고 조선의 외교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애쓴 "이범진"이란 인물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전시 관람의 소득 중 하나입니다. 1910년 경술국치에 항거하며 순국한 위대한 애국지사 이범진. 이런 인물을 그동안 모르고 있었다니, 부끄러웠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러한 항일 유산 기록물 덕에 앞으로 많은 후손들이 알아가고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이범진의 주미공사 활동이 수록되어 있는 미사일록은 굉장히 귀하다고 할 수 있는데, 황 교수님께서는 이번에 최초로 대중에 공개되는 것이라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의 가문의 일원들도 독립운동을 했는데요. 한 관객이 관련 안내 전시물을 보고 "어!" 하고 놀란 듯 큰 소리를 내었습니다. "아들이 이위종이라고?" 그렇습니다. 바로 헤이그 특사 이위종이 그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외교적 네트워크가 자양분이 되었기에 그의 가족들이 후에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과서를 통해 우리는 아들에 대해서만 잘 알고 있었는데, 독립운동가를 만든 아버지도 잘 알고 있어야 할 분이셨습니다. 관련 게시물에서는 우측 하단의 부자가 함께 찍은 사진도 보실 수 있습니다.
정말 위대한 애국지사 이범진이라는 인물을 이렇게 알고 나니, 그의 외교 활동이 담겨있는 '미사일록'이 왜 중요한지, 왜 이렇게 큐레이터가 강조하며 유의 있게 보라고 했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알고 보니 감회가 남다르더라고요.
을사늑약
1905년 11월 117일 밤, 일본 특파대사 이토히로부미는 덕수궁에서 무력시위를 하며 조약 체결을 강요했습니다. 결국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등의 을사늑약을 체결하였고, 이는 일본의 본격적인 한국 침탈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대한제국 외교 발자취 게시물 그리고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는 이야기를 담은 영상이 송출되고 있었습니다. 세세히 본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아는 그 을사오적이 이토히로부미와의 대화에서 "폐하에 뜻이 그렇다면 따르겠습니다"라는 취지로 말하는 것을 보았는데요. 즉 이 간신 무리들은 고종 황제가 조약 체결을 하라는 뜻을 보이니 이에 따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고종은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고, 수교국에도 을사늑약을 인정하지 않는 내용의 친서를 보내는 등 저항을 지속했습니다. "나는 승인하지 않았다" 제목의 전시물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을사늑약이 의사에 반해 강압적으로 체결됐다는 것이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속이 부글부글 끓더군요.
을사오적의 천인공노할 행동 속에서도, 을사늑약을 반대한 오늘날의 부총리라고 할 수 있는 영상 속 참정대신 한규설의 모습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어째서 반대하냐는 이토히로부미의 말에 답변 첫마디가 "설명할 만한 것도 없이"입니다. 을사늑약을 반대한 한규설을 우리 모두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민영환 유서(명함)
민영환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순절한 직후 그의 옷깃 속에서 발견된 명함이다. 앞면에는 '육군부장정일품대 훈위 민영환', 뒷면에는 민영환의 이름이 한글과 영문으로 인쇄되어 있으며 그 위에 2천만 동포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유서가 있다.
전시 리플릿에 포함된 그의 명함 사진을 보면 이름이 한글과 영문으로 같이 인쇄되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제 항거를 위해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죽기 전 2천만 동포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유서를 옷깃에 담은 그 심정이 어땠을까요? 민영환 하면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자결했다는 정도로만 알았는데, 그렇게만 알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서 외에도, 1901년 2월 25일 원수부 회계국 총장 등에 임명한다는 칙명 서인 <민충정공 교서>, 민영환이 입었던 <서구식 군복> 등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된 그의 유물을 볼 수 있었어요. 죽으면서까지 동포들에 각성을 촉구한 그를 잊지 않겠습니다. 아, 제가 한 가지 못 찍은 사진이 있는데요. 바로 <민충정공 혈죽도>로, 민영환이 죽은 후 피 묻은 옷에서 네 나무 네 줄기가 자랐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대나무를 그린 그림입니다. 꼭 실물로 확인하시기 바라겠습니다.
헤이그 특사 파견
을사늑약 이후, 광무황제는 외교적 고립을 타파하고 대한제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방편으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무효와 일본의 침략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했습니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 3인의 특사는 각국에서 만난 원수, 정계 지도자, 언론인에게 한국의 독립 수호를 위한 국제 협력을 호소했습니다.
이준(1859~1907), 불꽃같은 정의의 순국지사 : 법관양성소 첫 졸업생으로 러시아어 독일어에 능통했습니다. 1907년 특사단의 법률적 대표를 맡아 을사늑약의 무효를 국제법 논리로 입증하려 했습니다. 회의장 입장이 거부된 뒤에도 각국 언론과 요괴관을 찾아다니며 "대한제국의 호소"를 배포했으며, 7월 14일 헤이그 호텔에서 순국하여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상설(1870~1917), 냉철한 지성의 독립운동 전략가 : 대한제국기 신교육 운동가이자 한성법학원 교관으로, 특수단의 공식 대표였습니다. 헤이그로 향하는 15개국 횡단 여정에서 각국 지식인-언론에 한국 침탈 상황을 설명하며 '사전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회의가 무산된 뒤 귀국하지 않고 발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였습니다. 이후 연해주와 만주에서 대한13도의군, 대한광복군정부 등을 조직하며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이위종(1887~?), 외교 무대의 젊은 대변인 : 구미 공사를 지낸 이범진의 아들로, 러시아와 미국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3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특사단 통역과 대외 홍보를 담당했습니다.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자, 국제기자협회 회견에 참석하여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강연을 하며 일제의 침략을 규탄했습니다. 이후 러시아에 남아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한인 사회의 권익 보호와 항일 운동에 기여했습니다.
헤이그 특사 관련 내용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고 다들 잘 아시기에, 위 설명 사진과 함께, 1917년 3월 러시아에서 남긴 이상설의 유언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기필코 조국광복을 이루라는 말을 하시고 돌아가신 이상설 특사, 광복 후에는 그 혼으로 돌아오셨겠지요?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 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는 바다에 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항일의병 관련 격문
격문 - 존엄히 세상을 깨우다 :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하고 주권이 짓밟히자 수많은 민초들이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명은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자 일본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의병장들의 서신과 격문, 마지막 전투에서 남긴 유훈조차 빼앗겼습니다. 비로소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 유산을 통해 그들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어봅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유물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체결한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으로 입법, 행정, 사법권을 모두 빼앗기고 군대마저 해산되자 해산된 군인들이 대거 합류한 정미의병 의병장들의 서신과, 격문 등입니다. 유중교, 유인석, 허위, 이강년, 노재훈, 연기우, 황순일, 윤인순 등이 작성한 것인데요. 붓 끝으로 정의를 다짐한 이 유물들은 전시로 최초 공개인 만큼 역시 주목해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격문을 길게 나열한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이에 더해 격문 끝에는 교과서에도 있고 매스컴에도 많이 노출돼 정말 유명한 사진이죠, 격문 글씨를 배경으로 한 "정미의병" 단체사진이 더해져 굉장히 웅장했습니다. 1부를 넘어 전체 전시 중 손꼽히는 하이라이트 지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좋았던 것은 단순히 실물로 멋있게 나열된 원본을 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터치스크린을 통해서 그 내용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격문은 이날 강연에서도 들은 내용으로 의병장 윤인순의 격문이었는데요. 전반부에서 적에게 협조한 이들을 강하게 꾸짖은 다음, 후반부에는 적의 목이나 무기를 바치면 죄를 사하고 상을 주겠다고 고지한 글입니다. 강연자 말을 빌리자면 "채찍과 당근"을 모두 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기개가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 역사에서 의병은 늘 국가 위기 때 등장해 나라를 위해 싸우곤 했습니다. 이 격문 유물이 있었기에 정미의병 의병장들의 위대함을 더 잘 알 수 있었네요. 유물이 앞으로도 많은 국민들에게 널리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유물들
항일의병 격문 공간을 지나니, 드디어 등장했습니다. 국가 보물로 지정된 안중근 의사의 유묵 유물들입니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에서 확인된 보물로 지정된 안중근 의사 유물은 무려 31개나 되더라고요. 이번 특별전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귀한 보물 몇 점을 볼 수가 있습니다.
<견리사의 견위수명>은, 안중근 의사의 대표 유물로 1910년 순국을 앞두고 쓴 유묵입니다.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통청화공>은 1910년 3월 안중근 의사가 일본을 포용하여 소통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유묵으로. 뤼순형무소 간수과장이었던 기요타에게 써준 것입니다. 뮤지컬 영웅에서도 이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사상을 잘 나타냅니다.
안중근 의사의 대표 유물이자 순국을 앞두고 쓴 위 유묵들은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하나의 주목할 안 의사의 유물이 있습니다.
바로 민간에 최초로 공개되는 <녹죽>은 마찬가지로 2월 사형 집행을 앞두고 굳은 지조와 절개를 표현해 쓴 이 유묵은 굳은 지조와 절개를 표현합니다. 최고 공개인 만큼 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역사적 산증인이니 꼭 방문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1부 공간은 이렇게 끝나는데요. 제가 위와 같이 길고 상세하게 설명한 이유는 물론 위 전시물 중 중요하지 않은 유물이 하나도 없습니다만, 특히 1부에서 이범진의 미사일록, 민영환 유서(명함), 항일의병 관련 격문, 안중근 의사의 유묵 녹죽과 일통청화공 등 유묵들을 비롯 중요 유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단순 양쪽으로도 많았고, 2부 이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바로 1부의 이야기를 잘 알고 가야 하기도 하고요.
특히, 이 글을 통해 전시 내용을 충분히 확인하신 다음 방문하셔서 현장에서는 설명 글을 읽기보다 그 전시물을 온전히 눈에 담는데 시간을 보내 십사 하는 마음에서 길고 상세히 담았습니다. 2부부터는 핵심 유물 위주로 간략히 소개해 드리니 끝까지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외치는 만세의 함성이 세상을 진동시켰습니다. 전 민중이 함께 외친 함성은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여는 웅장한 서곡과도 같았습니다. 남녀노소, 신분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거리로 나와 외쳤던 그날의 열망은 사진과 기록 속에 생생히 남아 우리에게 그날의 뜨거움을 전합니다.
2부에는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등 서사가 담긴 유물이 전시돼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진관사 태극기와 이를 감싸고 있는 신문 등 문서, 최초 공개되는 한일관계사료집 등 귀중한 문서가 여기에 도열, 즉 줄 서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핵심 유물 소개에 들어가겠습니다.
3∙1 독립선언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명의로 우리나라와 민족이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전 세계에서 선포한 문서이다. 이 선언서는 최남선이 작성하였으며,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2만 2천 부를 인쇄하여 전국으로 배포되어 독립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학생을 포함하여 많은 국민이 참여한 독립운동의 기본 선언서라는 점에서 보편적 가치가 있다.
첨언이 크게 필요가 없는 유물이지요. 2만 2천 부를 인쇄해 배부했다는데 그 수치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결과를 만든 3∙1 독립선언서를 보고 있노라니 그 인쇄물을 뿌리고 이후 만세 운동이 전국에 물결처럼 퍼진 당시 상황이 상상돼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선언서 옆에는 제가 '우리들의 태극기'전시 후기로 소개한 바 있는 <태극기 목판>이 있었는데요 실물로 보니 꽤 크고 그 두께도 두꺼워 당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한 임팩트로 다가왔습니다. 그때에는 액자 형태로 비치되어 있어 두께가 확인 안 되어서 그랬던 것 같은데요. 실물로 제대로 보는 것이 이렇게나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우리가 꼭 이 전시에 가야 하는 이유를 하나 더 알려준 유물이었습니다.
진관사 태극기
1919년 3∙1 운동 당시 제작되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로, 2009년 진관사의 칠성각 해체∙복원 과정에서 발견되어 '진관사 태극기'라 이름 붙여졌다.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의 형상을 먹으로 덧칠하여 항일 의식을 극대화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진관사 태극기 발견 당시 '조선독립신문'을 비롯한 각종 독립운동 관련 문서 등이 함께 발견됨으로써 진관사가 독립운동에 비밀 거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진관사에 머물던 백초월과 관련 깊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왼쪽 귀퉁이가 찢긴 이 태극기에서 제가 꼽는 포인트가 몇 가지 있는데요. 먼저 일장기 위에 덧칠했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겠죠? 다음으로는 독립운동 관련 신문과 문서 등으로 감싸 벽면에 숨겼다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거기다 숨긴 것일까요? 이는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지점이었습니다.
분명한 건 조국에 대한 충정과 독립을 열망하는 정말 간절한 마음올 함께 담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진관사 스님의 독립운동입니다. 아마도 당시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이 머물렀기에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요. 백초월 스님과 진관사 스님의 독립운동에 대해 잘도 아니고 아예 몰랐었습니다. 이 태극기로 인해 위 사실들을 알게 돼 다행이며 기쁜 마음입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태극기를 감싸고 있던 문서들 역시 독립운동과 관련된 것으로 중요한 사료로 여겨진다는 것. 이처럼 진관사 태극기의 발견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의를 담고 있습니다. 강연에서 교수님은 진관사 태극기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른다며 주변 분들께 빨리 전시 보러 가라고 말씀하신다고 했는데요. 정말 귀한 기회입니다. '빛을 담은 항일 유산' 특별전의 하이라이트, 전시 기획자 및 참여자 그리고 많은 매스컴에서 이번 전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물로 꼽고 있는 원본 <진관사 태극기>를 실물로 어서 보러 가시기 바랍니다.
이외에도 중요하게 꼽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문과 선언서> 지난해 미국의 한 독지가가 기증해 최초로 공개되는 <한일관계 사료집>도 2부 공간에 있으니 모두 잘 살펴보시면 되겠습니다.
우리의 땅, 그리고 말과 글을 빼앗긴 시련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지키고자 투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과 글을 통해 민족 혼을 지키려 한 지식인, 낙후된 식민지 농촌의 현실을 극복하려 한 농촌 청년은 그들의 고뇌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앞선 강연에서 황 교수님은 사실 이 섹션의 시기에서는 사회운동, 노동운동, 청년운동, 소년운동, 형평운동, 무장투쟁 등에서는 다룰 것이 너무 많고 이 모두를 유물로서 풀어내기에 한계가 있으며 독립기념관 등 다른 유관 기관에서 볼 수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농촌계몽운동'과 '한글운동' 등에 집중하였다고 합니다. 녹민독본과 기사년 일기 등 윤봉길 의사의 유품이 있고, 다양한 편지와 일지 등을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말모이 원고
'조선광문회' 주관으로 한글학자 주시경과 김두봉, 이규영, 권덕규가 집필에 참여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사전 '말모이'의 원고이다. 원고 집필은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이루어졌으며, 본래 여러 책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ㄱ'부터 '걀죽'까지 올림말(표제어)이 수록된 1 책만 전해지고 있다. 240자 원고지에 단정한 붓글씨체로 썼고 '알기', '본문', '찾기', '자획찾기'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1914년 주시경이 세상을 떠난 뒤 1916년 김두봉이 이 '말모이 원고'를 바탕으로 문법책인 <조선말본>을 간행하기도 했으며, 여러 우리말 사전 간행의 디딤돌이 되었다. 현존 근대 국어사 자료 중 유일하게 사전 출판을 위해 남은 최종 원고라는 점, 국어사전으로 체계를 갖추고 있어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사전 편찬을 보여주는 독보적인 자료라는 점 등에서 높게 평가되는 유산이다.
조선말 큰사전 원고
조선어학회에서 1929~1942년경까지 약 13년 동안 작성한 <조선말 큰 사전> 원고의 필사본 교정지 중 총 14 책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거물로 일제 경찰에 압수되었다가 1945년 9월 8일 경성역에 있는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957년 큰 사전이 완성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우리의 한글이 어떻게 집대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유물이자, 언어생활의 변천을 알려주는 생생한 자료이다.
말모이 원고는 보물로 지정돼 있을 정도로 가치가 높은 유물로, 영화 <말모이>를 봤기에 얼마나 힘든 과정을 통해 이 사전이 만들어졌는지 아주 조금은 알고 있는데요. 우리 한글이 현재에 이렇게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고, 결국엔 한류가 이렇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데에는 궁극적으로 한글의 역할이 크다는 생각입니다. 전시에서는 조선말 큰 사전을 "언어로 지킨 민족의 혼"이라 표현하고 있더라고요. 소중한 사전 유물이 매우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3부에서는 이외에도 1927년 윤봉길 의사가 농민들을 계몽하기 위해 저술한 책 <농민독본>, 윤 의사가 기사년 음력 1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 직접 작성한 일기인 일명 <기사년 일기>, 등 윤봉길 의사 유물들을 볼 수 있고요. 이 밖에 박성진 의사 옥중편지, 도산 안창호 일기, 광복회의 비밀 연락 거점지 상덕태상회의 <청구서> 등 의미 깊은 유물들이 많이 있는 3부 공간입니다.
독립을 향한 길고 험난했던 여정은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염원으로 결집합니다. 만주 벌판에서의 용맹한 포효와 일제 심장부에서의 의열 투쟁, 그리고 독립운동의 마지막 보루인 임시정부의 항일전쟁의 목표는 단 하나 우리 민족의 '독립'이었습니다.
윤봉길 의사 유품(회중시계) & 백범 김구 회중시계
윤봉길 의사 유품(회중시계) :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 공원 의거를 위해 떠나기 직전 백범 김구와 바꾸어 찬 시계이다. 윤봉길 의사가 체포된 후에도 마지막까지 몸에 지닌 유품으로 백범 김구와 윤봉길 의사 두 사람의 결렬한 의지와 애틋함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백범 김구 회중시계 : 1932년 4월 26일 윤봉길 의사가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 직후 구입하였다가, 4월 29일 홍커우 공원 거사일 아침 백범 김구의 시계와 맞바꾼 회중시계이다. 이 금색 회중시계는 Waltham사에서 만든 것으로 시곗줄 끝에 작은 나침반이 달려 있으며, 하트형의 꽃무늬가 은도금되어 있는 덮개를 열면 12방위가 한자로 표시되어 있다. 윤봉길 의사의 유품이면서 백범 김구의 유품이기도 하다.
윤봉길 의사가 거사 전 나는 좋은 시계가 필요 없으니 바꾸자고 하여 바꾼 두 회중시계. 다시 생각해도 정말 드라마틱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좌측의 윤봉길 의사 유품이라고 불리는 회중시계는 보물로 지정돼 있는 데 이번 전시에서 그 진품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서사가 있으며 그 의미가 깊은 회중시계를 실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셔야 하겠습니다.
4부에서는 백범 김구 인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서명문, 서영해 자필 유고집 등 다채로운 소중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길고 어두웠던 터널의 끝, 마침내 광복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 그리고 간절한 염원이 만들어낸 환희의 순간은 역사에 길이 빛날 감격의 장면입니다.
대망의 마지막 5부에서는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도 보신 적이 많을 것이라 생각되는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등 여러 태극기를 볼 수 있는데요. 가장 소개해 드리고 싶은 딱 하나의 유물은 바로 이것입니다.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
이 필묵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이 광복 후 국내로 환국할 당시 남긴 것으로, 환국 하루 전인 1945년 11월 4일 저녁에 중국 충칭에서 자신들의 감회, 포부, 이념 등을 필적으로 남겼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임정 요인들은 바로 들어올 수는 없었고요. 우여곡절 끝에 그해 11월 5일 환국할 수 있었으며 위 유물은 바로 그 하루 전날 저녁에 작성한 것입니다. 다른 유물도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환국 하루 전 쓴 정말 역사적인 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이가 길어 이번 기회 아니면 이렇게 쉽게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또한 들었습니다.
국가 보물을 포함해 역사적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 약 110개의 항일 유물을 한 곳에서 모아 볼 수 있는 기회는 언제 다시 올지 모릅니다.
직접 전시를 관람해 보니 책에서 보는 것, 인터넷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느낄 수도 있고요. 몰랐던 인물이나 사실을 새롭게 안 것도 좋았고, 알고 있었던 내용도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감정 및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도 좋았습니다. 정말 장문의 글로 유물들을 소개해 드렸음에도 아주아주 빙산의 일각밖에 못 알려드렸는데요.
다행히 이 전시는 10월 12일까지 진행돼,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루다 보면 놓칠 수 있습니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빛을 담은 항일 유산> 서둘러 관람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