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태워 역사를 피운 이야기 그리고 그날의 영웅을 만나다
광복 80년 서포터즈 “YOUNG:光” 발대식 참석 3일 뒤인 7월 26일 토요일 아침, 저는 일찍부터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그 전주에 관람한 남산골 한옥마을 <우리들의 태극기> 전시에 이어 또 다른 광복 80주년 전시·행사 중 하나인 서울 중랑구 소재 중랑망우공간 상반기 기획전시 <광복 80주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보기 위해서였죠.
전시기간 : 2025. 04. 03. ~ 2025. 08. 17.
전시장소 : 중랑망우공간 2층 교육전시실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로91길 2)
관람시간 : 평일 10:00~17:00 주말 9:00~17:00 (점심시간 휴무 12:00~13:00)
전시소개 : 광복 80주년을 기념하여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영면한 애국지사(유관순, 안창호, 한용운, 오세창, 문일평, 방정환, 서동일, 유상규)의 희생과 전시를 기리는 전시입니다. 망우역사문화공원과 현대인의 연결고리를 통해 독립운동의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한 다양한 체험적 요소를 결합하여 전시를 구현하였습니다.
광복 80주년 기념 전시·행사가 서울에서만 해도 여러 곳에서 하고 있으며 집에서 더 접근성이 좋은 곳이 있음에도, 이를 제쳐두고 상대적으로 교통이 다소 불편함에도 중랑망우공간을 찾은 이유는 비교적 근래인 2022년 개관했으며 전시가 열리는 장소가 독립운동가와 문화 예술가 등이 잠들어 있는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는 특히 한용운 등 등록문화재로 등재된 독립지사의 9인의 묘를 포함 총 57인의 와 유관순 등 독립운동가 총 11인의 추모비가 있는 곳으로 광복을 기념하는 전시를 하기에 유의미한 장소여서 꼭 방문하고자 했던 겁니다. 망우산 자락에 위치한 거대한 숲 속 공간 곳곳에 이러한 기념물이 있어 산책을 겸해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요.
등록문화재 등재 9인의 독립지사의 묘 : 문일평, 방정환, 서광조, 서동일, 오기만, 오세창, 오재영, 유상규, 한용운
독립운동가 11인의 추모비 : 문명훤, 문일평, 방정환, 서광조, 서병호, 서동일, 오세창, 오재영, 유상규, 한용운, 유관순
이처럼 장소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기에 이번 전시를 찾게 됐 둘레길도 일부 둘러볼 생각으로 무더운 오후를 피해 기획 전시가 열리는 9시(평일은 10시)에 맞춰 중랑망우공간을 찾았습니다. 아래쪽이긴 해도 산에 위치했기에 도로가의 버스정류장에서 몇 분 정도 도보로 올라갔는데요.
오르막길이지만 두툼한 나무 데크 길로 걸을 수 있어 편했고요. 그 길의 가로등 곳곳에 방정환, 한용운 그리고 제가 잘 모르고 있었던 오기만, 유상규, 설의식, 계용묵과 같은 인물의 사진과 간략한 소개 글이 담긴 플래카드가 있어 이를 찬찬히 읽으며 가니 흥미롭기도 했고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몇 분 올라갔더니 좌측에 전시가 열리는 중랑망우공간 건물이 등장하더군요.
근래에 축조된 건물답게 창의적인 모습이면서도 아름다운 공간이어서 2층 전시실로 올라가기 전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습니다. 건물 야외 광장에는 상설 전시 공간이기도 한데요. 좌측의 예쁜 모습의 중랑망우카페가 있는데 내부에 이인성 <가을 어느 날>을 비롯 이중섭 화가의 작품들 등 여러 미술품이 전시돼 있어 방문객들에겐 전시 관람과 쉼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라 꼭 방문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또한 야외 광장 우측 편에는 망우역사공원을 나타내는 여러 기념 및 조형물, 그리고 망우역사문화공원 영면 인사 57인의 명패와 안중근 의사의 흉상도 보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획전시실 가는 길 주변부에는 물 위의 무궁화 꽃 조형물과 계단에는 한반도를 가득 메운 무궁화 그림이 부착돼 있는 등 이미 전시 관람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어요. 마침내 2층 전시가 열리는 교육전시관에 도착, 공간이 크지는 않아 오히려 관람하기 편했습니다. 그리고 진중한 마음으로 소중한 기록물과 독립운동가 소개 전시물을 하나씩 천천히 살폈습니다.
광복 80주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전시는 크게 3가지 공간, 만해 한용운과 무궁화 이야기를 담은 “꽃을 태워 역사를 피우다”, 8인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소개 게시물과 조형물이 있는 “우리시대 영웅을 만나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선언서와 무궁화 손수건 및 자수 등이 담긴 “독립의 역사가 마침내 피어나다”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전시관의 첫 전시물이 어떻게 보면 전시의 핵심 주제가 담겼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대표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과 무궁화라는 결국 이번 전시의 주제이자 제목이 집약된 전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좌측 상단의 <만해 한용운 진영>이 보였는데, 찾아보니 진영이란 사람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린 형상을 뜻하더라고요.
만해 한용운 진영과 오도송 서각
3·1 운동 이후 출옥한 만해 한용운의 사진이 잡지 삼천리지 창간호(1929년 6월)에 게재되었는데 이를 토대로 석제형 화백께서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전사, 즉 그대로 그린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품을 그린 석 화백과 이 진영에 관련된 정보를 찾고자 인터넷을 검색해 봤는데 이와 관련된 정보가 찾기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이곳 전시 중에서도 참 귀한 전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림 속 한용운 선생의 모습은 참 선해 보이면서도 비장함도 전해지더라고요.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습니다.
진영의 우측에는 만해의 <오도송 서각>이 있었습니다. 오도송 이란 자신의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글로, 독립과 자유에 대한 신념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누가 쓴 지 모르고 보더라도, 글씨가 비장한 각오로 썼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까 합니다. 글씨에 힘이 있고 강력한 각오가 담겨 있음이 제게 전해졌고, 굉장히 입체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님의 침묵, 한용운 공소불소리 판결문
그 옆에는 1926년 회동서관 오리지널 초판 복각본 책 <님의 침묵>과, 3·1 운동 후 만해 한용운에게 내려진 판결문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공소가 불수리된 <한용운 공소불수리 판결문> 복제본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료들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언뜻 생각했을 때 기소됐을 것만 같았는데 뜻밖에도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네요.
그런데 말입니다. ‘만해 한용운과 무궁화가 어떤 관계가 있었던가?’라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궁금증은 하단의 두 전시물을 통해 궁금증은 해소되었습니다.
무궁화 심으고져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예나라에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마음 비춘 달아 계수나무 베어내고 무궁화를 심으리라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님의 거울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품에 안긴 달아 이지러짐 잊을 때의 사랑으로 도우리라
달아 달아 밝은 달아 가이없이 비춘 달아 쇠창살을 넘어와서 나의 넋을 쏘는 달아 구름재를 넘어가서 너의 빛을 따르리라
한용운은 옥중에서 <무궁화 심으고져>라는 시를 썼고 이는 개벽 27호(1922년 9월호)에 실렸다고 합니다. 이 시는 건물 외벽에 지금 말로 풀이된 글자로 “무궁화를 심으리라”라는 제목으로 게시돼 있기도 했는데요. 잠시 있고 있었네요. 한용운은 “님의 침묵”을 쓴 빼어난 시인임을. 그리고 간절한 의미를 담은 무궁화를 심으리라는 열망을 시로 옮기셨네요.
“만해”로 명명한 무궁화
무궁화를 심고 싶었던 만해 한용운의 마음과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심경구 박사는 2006년 성균관대 식물원에서 무궁화 품종인 삼천리와 서봉을 교배하여 육성한 새로운 품종을 ‘만해’라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전시 제목이 처음에 사실 감흥이 없었었는데, 전시를 보고 나니 광복을, 그 기쁨을 나타냈음을 인지하게 되었는데요.
특히 그 무궁화 꽃이 피기까지 한용운 선생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영웅의 희생과 바람이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광복이라는 기쁨 전 슬픔이 있었다는 사실이 제 마음속에 깊이 박혔습니다.
첫 번째 전시 공간을 통해 잘 몰랐던 혹은 잊고 있었던 만해 한용운과 무궁화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고, 이는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공간 좌측의 님의 침묵과 오도송과 관련된 송출 영상까지 본 뒤, 유관순 사진이 게시된 “우리시대 영웅을 만나다” 게시물을 지나 8인의 독립운동가를 만나러 향했습니다.
빔 프로젝터에는 각 독립운동가가 남긴 말이나 관련 글귀가 담긴 화면이 송출되었고, 그 앞쪽으로부터 각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간략히 담은 소개 글과 사진을 담은 게시글이 나열돼 있었습니다. 전시물을 앞쪽인 우에서 좌로 한번 자세히 보실까요? 게시물을 이 순서로 배치한 이유가 제 생각에는 뒤의 네 분 방정환, 한용운, 안창호, 유관순에 비해 앞의 네 분 문일평, 오세청, 서동일, 유상규 독립운동가께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기에 많은 대중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에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름 근현대사를 학창 시절에 잘 공부했고 나름 독립운동가 관련 공간 및 행사에 참여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모르는 분이 너무 많아, 갈 길이 한참 멀었음을 느꼈습니다.
호암 문일평(1888~1939, 조선학의 선구자)
"조선 독립은 민족이 요구하는 정의 인도로서 대세 필연의 공리요 철칙이다."
-문일평 선생 연보부 글귀 중에서
민족주의 사학자로서 신간회와 진단학회 창립에 참여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했고, 조선일보사의 편집고문을 지내며 역사 대중화에 힘썼다고 합니다.
위창 오세창(1864~1953, 근대 최고의 서화가)
"글과 그림이 대대로 일어나 끝내 사람에게서 없어지지 않는 것은 사람이 본디 가지고 있는 성품이 비슷하고 사물의 근원이 있었던 까닭이다."
- 오세창 선생 연보비 글귀 중에서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해방 후 대한제국의 옥새를 돌려받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 외 「근역서화징」 등의 저술을 통해 서예와 문화 보존에도 힘썼습니다.
춘파 서동일(1893~1965, 다물단 군자금 사건의 주역)
다물(多勿)이란 옛 땅을 회복한다는 뜻으로 용감(勇敢), 전진(前進), 쾌단(快斷) 등의 뜻과 함께 不言實行을 의미한다.
- 서동일 선생이 조직에 참여한 다물단의 의미
중국 북경에서 항일 비밀결사 다물단과 국민당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전개,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태허 유상규(1897~1936, 도산 안창호의 영원한 비서)
도산의 우정을 그대로 배운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유상규였다. 유상규는 상해에서 도산을 위하여 도산의 아들 모양으로 그는 귀국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 강사로 외과에 있는 동안 사퇴 후의 모든 시간을 남을 돕기에 바쳤다.
- 도산 안창호 흥사단 발행 중에서 유상규 선생 연보비
3·1 운동 참여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도산 안창호의 비서로 일했습니다. 귀국 후 의사가 되어 의료 발전에 힘쓰다 전염병으로 서거했습니다.
사학자로서 역사 대중화에 힘쓴 문일평,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일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의 옥새를 돌려받는 역할까지 한 오세창, 제게는 생소했지만 항일 비밀결사 다물단 활동과 군자금 모금에 힘쓴 서동일 선생 꼭 기억하겠습니다. 위 네 분은 뒤의 방정환, 한용운 선생과 함께 이곳 망우리에 잠들어계시며 묘역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 비석도 세워져 있는데요, 잠들어 계신 곳에서나마 후손들을 만날 수 있음은 참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날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도산의 바로 옆에서 그 정신을 함께한 유상규 선생입니다. 귀국해서는 의사로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다 젊은 나이, 지금의 저와 똑같은 나이에 서거하셨기에 굉장히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런 분이 계셨다는 것을 정말 처음 알았네요. 교과서에서도 못 봤고, 도산의 동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너무 죄송스러운 마음이고요. 앞으로 제 주변분들에게나 대 국민 분들에게나 도산의 영원한 비서 태허 유상규 선생을 널리 알리겠노라 다짐했습니다.
소파 방정환(1899~1931, 어린이의 영원한 벗)
문간에 검정말이 모는 검은 마차가 나를 데리러 왔으니 가야겠다.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 방정환 선생 유언 중에서
어린이 인권과 교육을 위해 헌신한 아동문학가이자 소년운동가로, 1923년 제1회 어린이날을 개최하고, 잡지 <어린이>를 창건하며 아동문학과 교육을 개척했으며 동화 구연과 강연을 통해 어린이 운동을 펼쳤습니다.
만해 한용운(1879~1944, 대한민국장을 받은 최고의 애국지사)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님의 침묵」 중에서
불교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고,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했습니다. 독립선언서 공약 3장을 작성했으며, 「님의 침묵」을 통해 문학으로 항일 정신을 펼쳤습니다.
도산 안창호(1878~1938, 임시정부의 통합에 힘쓴 겨레의 지도자)
내 직업은 독립운동가다.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해 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일본 경찰의 ‘당신의 직업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안창호의 대답
신민회와 흥사단을 조직하며 민족 계몽과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조직적 기반을 다졌고 1937년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이듬해 서거했습니다.
유관순(1902~1920, 3·1 운동의 상징)
내 손톱이 나빠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은 고통만큼은 견딜 수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 유관순 열사의 옥중 유언 중
이화학당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하고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체포된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0년에 순국했습니다. 유해는 무연고 묘로 이곳 망우리에 합장되었습니다.
방정환, 한용운, 안창호, 유관순 네 분은 그래도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무엇보다도 도산 안창호 선생이 말씀이 딱 꽂혔습니다. 직업은 무엇이냐는 일본 경찰의 말에 ‘독립운동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시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의 말은 대단히 경의롭습니다. 저 말씀을 독립운동가로서 입지가 다져진 후, 어떻게 보면 잃을 게 많아 두려울 수 있는 시기임에도 저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도 존경의 의미에서 소름입니다.
그렇게 주변을 지나갔음에도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도산공원을 찾아, 망우리에 있다가 이전한 선생의 묘역에도 가보고, 도산 안창호 기념관도 들러 행적을 살피고, 그의 비서 유상규 선생의 행적도 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8인의 독립운동가 전시물
의자가 있는 포토존과 그 옆의 태극기와 애니메이션 형태로 표현한 기념 게시물은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8인의 영웅이 함께 모여있는 모습이 예쁘기도 예뻤지만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번 기획 전시가 끝나도 이 두 게시물은 어딘가에서 계속 우리 국민들이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 전시월에서는 먼저 세 가지의 선언서가 눈에 들어옵니다.
세 가지 선언서
1919년 3월 1일, 조선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발표된, 만해의 공약 3장과 33인의 서명이 담긴 <기미독립선언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이듬해인 1920년 3월 1일을 맞이하여 발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만세 선언서>. 1945년 광복 이후 매년 3월 1일에 발표하는, 대한민국의 주권과 독립 국가 정체성을 천명한 <광복 이후 독립선언서>.
결국에는 저 세 선언서는 별개가 아니라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까지도 계속되고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 선언서 하나하나는 보물과 같은, 아니 보물 중에서도 가치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전도 무궁화 자수 애국지사들에게 떠준 금수강산 무궁화 손수건
선언서 옆에는 故 한상수(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님이 만해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며 제작한 자수 작품 <대한민국 전도 무궁화 자수>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전도를 무궁화로 수놓은 의미 있는 작품이네요. 만해 선생께서 이를 보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 이 전시월에는 무궁화가 들어간 또 하나의 작품으로 <애국지사들에게 떠준 금수강산 무궁화 손수건>도 있었습니다. 정말 처음 보는 작품인데 예뻐서 더 놀랐습니다. 요즘 디자인한 것이라고 해도 이질감이 크게 없어 보였어요.
그런데 더 놀라웠던 것은 이날 전시 작품 대부분의 소장처가 <만해기념관>이라는 것입니다. 만해 한용운의 유택 심우장도 가봤고, 그가 머물렀던 사찰 청량사도 가봤는데요. 만해기념관을 제가 못 가 봤더라고요. 오늘 작품 포함 중요하고 소중한 전시품이 만해기념관에 그득할 것이기에, 제 거주지에서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언젠가는 날을 잡아 꼭 가봐야겠습니다.
"아아, 임은 갔지마는 나는 임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아아, 전시 관람은 끝났지마는 스탬프 투어는 나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님의 침묵의 한 구절을 패러디해 봤는데요. 그렇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스탬프 투어 역사 탐방 미션>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방법은 간단한데요, 총 세 곳의 지점에서 준비된 엽서를 스탬프에 찍는 미션입니다. 사실 이날 워낙 무더운 날씨였기에 살짝 고민이 되긴 했지만, 역사공원 전체 구석구석을 돌아보지는 못하더라도 스탬프 투어 미션 지점 세 곳 정도는 가보겠다는 의지가 타올라 탐방에 나섰습니다.
01 중랑망우공간
비치된 엽서 중 첫 엽서는 전시실 내부에 비치된 스탬프로 찍었고요. 전시실 입구 쪽의 한복을 대여하여 탐방에 나서실 수도 있는데, 무더웠던 관계로 저는 태극기 스토퍼 하나를 챙겨 중랑망우공간 건물을 나와 스탬프를 찍은 엽서와 같은 각도로 사진을 찍은 다음 두 번째 스탬프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02 유관순 묘역
조금 걸었더니 좌측에 길 하나가 나왔는데, 길 오른쪽에 태극기와 추모비가 왼쪽에는 기획전시와 한 독립운동가의 사진이 담긴 플래카드가 꽂힌 깃대가 길을 따라 쭉 서 있었습니다. 인물은 바로 유관순 열사며 이곳은 바로 그의 묘역으로 가는 길입니다. 위 글을 꼼꼼히 읽으신 분들은 눈치채셨을 겁니다. 전시 공간에 소개된 8인 중 안창호 선생과 유관순 열사 외 6인을 포함 총 9인의 독립지사의 묘는 모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이곳 망우역사공원에 있습니다.
그런데 유관순 열사의 경우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이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936년 일제의 택지 개발로 인해 이태원 공동묘지가 없어졌고 그곳의 무연분묘 28,000여 기를 화장,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비극적 이게도 어느 묘가 유관순 열사인지 특정할 수가 없는 상황이죠. 그러다 2018년 9월 7일 망우리 공원 내 이태원 무연분묘 합장비 옆에 유관순 열사 분묘합장 표지비가 건립, 묘역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짧은 거리지만 묘역이 보이기까지 걸어가는 가운데 복잡한 감정이 들더라고요. 유관순 열사 묘역이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 생각조차 못 해봤던 것에 대한 죄송스러운 마음과 실제 유 열사가 잠든 바로 그 묘역이 아닌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묘역을 알 수 없게 만든 일제에 대한 분노, 그럼에도 '이태원 공동묘지 무연분묘 합장'이라는 명칭으로 유관순 열사 묘역을 이제야 만난다는 대에 대한 반가움까지. 1분도 안 되는 순간 오만 감정이 뒤섞였답니다. 이내에 조금 트인 공간이 나오며 유관순 묘역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삼단의 돌단 위 1미터 정도 돼 보이는 비석, “유관순 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가 그리고 그 일대는 단아하지만 잘 정리된 모습이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잠시 묵념을 드렸고요. 주변을 조금 둘러본 뒤 왼편의 스탬프 박스에서 스탬프를 찍고 나왔습니다. 국민 여러분, 유관순 열사의 묘역이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있습니다. 기억해 두셨다가 언젠가 한 번쯤 방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 참고로, 스탬프를 엽서에 맞추는 것은 다들 잘하실 텐데요. 너무 오랫동안 누르면 번진다는 것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제가 스탬프를 예쁘게 찍겠다는 욕심이 과해 몇 초간 꾹 눌러 찍은 탓에 잉크가 살짝 번졌거든요. 국민 여러분들께서는 스탬프 가운데 부분을 1초 간 정도만 눌러 예쁘게 찍으시길 바랍니다.
03 중랑전망대
마지막이자 세 번째 망우역사 스탬프 로드 지점은 중랑전망대로, 봄이나 가을 같았으면 숲 속 길을 경쾌한 발걸음으로 주저 없이 올라갔었을 텐데요. 산길 1km는 평지보다 두 배 가까이 걸리는 거 아시죠?! 게다가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이날은 낮 최고 기온이 37~38도까지 올라갔던 날로, 그나마 아침이라 기온이 낮은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30도가 훌쩍 넘는 날이다 보니 갈까 말까 잠시 망설 여지더라고요. 그러다 기왕에 여기까지 왔는데 스탬프 투어 역사 탐방 미션을 완성하고 싶어 전망대를 향해 나섰습니다.
땀이 나긴 했어도 숲 속 길을 걷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좋은 공기 듬뿍 마실 수 있었고요. 우렁차게 우는 매미 소리를 참 오랜만에 들어본 것 같더라고요. 마치 힘내서 올라가라고 저를 응원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실제로 힘이 나기도 했고 말이죠.
역사 문화공원답게 가는 길 곳곳에서 여러 기념물들이 보였답니다. 전시실에서 봤던 서동일, 오재영 등 독립운동가 및 이중섭 등 문인들을 소개하는 안내판이나 연보비를 이따금씩 볼 수 있었습니다.
전시관에서 만난 서동일·오재영 선생의 묘소에 가볼까 했지만, 이날의 목표는 스탬프 투어의 완성이었기에 그 길로 빠지지 않고 계속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기껏 날이 덥다는 이유로 그 길로 가지 못한 점에 대해 나중에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더군요. 꼭 가을에 다시 한번 와서는 망우역사공원 구석구석을 돌며 이곳에 위인 64인의 묘지 및 기념물, 13도 창의군탑·국민강녕탑과 노고산천골취장비, 독립운동가 11인과 정치가 및 문화예술인 5인의 추모비 등을 세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오재영 연보비 지점에서 체감상으로는 한참을 더 올라갔더니 마침내 중랑전망대가 나타났습니다.
다른 전망대들과 차이점은 투명판에 그려진 태극기 조형물이 있다는 점이겠지요!? 유니크해서 그리고 예뻐서 좋았습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뷰는 말해 뭐 하겠습니까.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점은 평소 제가 보던 서울 도심 뷰가 아닌 처음 보는 뷰였다는 것입니다.
무더위에 조금 힘들었지만 올라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고요. 충분한 휴식 후 마지막 스탬프를 찍어 투어 미션을 달성,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산했습니다. 다시 중랑망우공간에 왔고 여기서도 버스정류장까지는 더 내려가야 했는데, 때마침 셔틀버스가 있더라고요. 중앙선 “양원역”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출발 직전 운 좋게 탑승하여 편리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많은 것을 보았고, 알았고, 느꼈고, 생각했고, 깨달았던, 저에게 굉장히 뜻깊고 유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광복 80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전시 관람으로 만해 한용운과 무궁화 이야기, 8인의 독립운동가 중 제가 잘 몰랐던 유상규 등 4인의 애국 활동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스탬프 투어를 통해 유관순 묘역을 처음으로 가보고 녹음 가득한 망우역사문화공원 숲길 걸으며 역사적 인물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어 제 개인적으로 역사적인 하루를 보냈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들도 이곳을 꼭 방문하시어 독립운동가들도 기리고 숲 속 길 걷고 아름다운 경관 보며 치유와 힐링의 시간도 가져보시길 바라고요.
앞으로도 광복 80년 서포터즈 영광(YOUNG:光) 활동을 통해 몰랐던 독립운동가를 더 알아가고, 동시에 많은 국민 여러분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