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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년 특별전 《무너미에 깃든 독립운동가의 숨결》

서울 수유 국가관리 묘역에 안장된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자

by 곽한솔
이준, 손병희, 여운형, 이시영, 신익희, 이명룡, 유림, 김창숙, 김병로, 김도연, 신숙, 신하균, 양일동


광복 80주년 서포터즈 “YOUNG:光”로서 저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콘텐츠를 작성해 왔습니다. 하나는 안중근과 안창호 등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의 행적 중 우리가 잘 몰랐던 부분을 조명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까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독립운동가를 널리 알리는 방향입니다.


이번에는 후자에 해당하는 콘텐츠를 기획하던 중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는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 <무너미에 깃든 독립운동가의 숨결>을 알게 돼 다녀왔는데요. 사실 저는 수유리 국가관리 묘역과 이곳에 애국지사들이 안장되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이에 서울 수유 국가관리 묘역에 안장된 독립운동가를 널리 알리고자 이 전시를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무너미에 깃든 독립운동가의 숨결>
전시 포스터

https://youtu.be/Oxf38vBJ4vw

* 전시기간 : 2025년 8월 1일 ~ 12월 31일

* 전시시간 : 화~일요일 09:00 ~ 18:00 (관람 종료 30분 전까지 입장)

* 전시장소 : 근현대사기념관 기획전시실(서울특별시 강북구 4.19로 114)



근현대사기념관은 수유 국가관리 묘역 소재 산자락 인근에 위치해 주변 공기나 광경이 좋았습니다. 산책이나 소풍 느낌으로 이곳 일대를 거닐어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건물에 다다르기 직전 도보 길 우측에는 오늘 전시의 주인공 인물들의 흉상이 나열돼 있었습니다. 흉상을 받치는 돌에는 인물들의 활동 약령도 나와있어 이 자체가 전시의 연장 선상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아래에서는 전시실 내부 각 인물 소개 시 위 흉상을 함께 첨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근현대사기념관은 수유 국가관리 묘역에 안장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삶과 정신을 재조명하는 특별전시 <무너미에 깃든 독립운동가의 숨결>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번 전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다양한 유물과 기록을 통해 되돌아보고, 그분들이 우리에게 남긴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자리입니다. 무너미 언덕에 고요히 잠든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을 느끼며, 광복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뜻깊은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전시를 열며 -
전시실 입구
전시실 내부 전경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

<무너미에 깃든 독립운동가의 숨결>


(1) 돌아오지 못한 헤이그 특사 <일성 이준>

1859. 1. 21.~1907. 7. 14.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땅이 작은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며, 위대한 인물은 반드시 조국을 위하여 조국의 생명의 피가 되어야 한다.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된다'는 선생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나라는 위대한 나라가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문화계, 체육계, 산업계 등 다방면에서 말이죠. 아이돌 BTS, 손흥민 선수, 봉준호 감독, 한강 작가 정도만 떠올려도 충분히 우리는 위대한 나라라는 확신이 듭니다. 이준 선생이 이러한 후손을 보고 하늘에서 보고 계신다면 얼마나 뿌듯하실까요? 이준 하면 "헤이그 특사"라는 너무나 강력한 역사 때문에 여기에만 매몰되어 있는 느낌도 없지 않아 듭니다.


한성재판소 검사시보, 즉 검사였다는 점은 사실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검사는 누구나 될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권력을 가까이할 수 있는 위치였을 텐데 그는 자신의 역량을 조국을 위해 썼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올해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처음 알았는데 이준 선생도 국채보상운동에 소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적극 임하셨고, 이외에도 특사 파견 이전 장 기간 다양한 조직을 만들고 몸담으며 그야말로 온몸으로 독립운동을 하셨더라고요. 그의 다양한 행적을 전시를 통해 확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한성재판소 검사시보 임관안 / 만국평화회의보


(2) 3.1 운동을 이끈 영원한 민족 대표 <의암 손병희>

1861. 4. 8.~1922. 5. 19.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동학 3대 교조이자 3.1 운동 민족 대표로 잘 나와있는데 딱 그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시를 보고 나니, 이렇게 지나치기에는 1919년 3.1 만세 운동 33인 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인 의암 손병희에 대해 너무나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종교 지도자나 3.1 운동뿐만 아니라 인재 양성과 개화혁신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다는 그의 말은 제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만세 운동은 광복 80년이 된 지금까지 우리 대한민국의 힘과 정신을 상징하며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의 DNA로 남아 있습니다. 이를 주도한 손병희 선생에 존경을 표합니다.

손병희 인장


(3) 시대를 앞서간 민족 지도자 <몽양 여운형>

1886. 5. 25.~1947. 7. 19. 건국훈장 대한민국장(2008)

우리가 건설하는 나라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인민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이 민주공화국은 조선 민족의 절대적 요구일뿐 아니라 세계 세대가 요구하는 것이다

"여운형 선생이 오래 살아계셨더라면 대한민국이 더 발전했을 텐데.." 전시를 관람하던 중년의 남성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이 말속에 정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대에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지도자였던 것치고는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선생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지 않았던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래도 근래 들어 다양한 매스컴에 그의 행적과 위대함이 언급되는 등 그에 대한 평가가 다시 이뤄지며 널리 알려져 있는 듯합니다. 이제는 당대를 넘어 현대에도 많은 후손들에게 사랑받고 있고요.


관람객의 말씀처럼 광복 전에는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에는 정치 지도자로서 좌우 합작에 앞장섰던 그가 정말 오래 살아계셨다면 대한민국은 좀 더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요? 하나 되는 대한민국을 위해 여운형 선생의 뜻을 잇는 후손들이 앞으로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여운형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낸 독립청원서


(4) 삼한갑족 6형제의 독립운동 <성재 이시영>

1869. 12. 3.~1953. 4. 17.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49)

문관이 돈을 탐하지 않고, 무관이 죽기를 싫어하지 않으면, 가히 천하를 회복할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 위원부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까지, 성재 이시영은 대한민국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지도자로서 헌신했습니다. 약력을 쭉 살펴보는데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잘 아는 내용이 많았는데, 가장 마지막 줄의 사망 연도와 장소가 눈에 들어왔는데요. 1953년 부산. 즉 한국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 시 돌아가셨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조국의 광복과 건국, 그리고 한국 전쟁까지 겪으셨는데 연로한 나이에 피난을 가게 되는 바람에 건강 악화로 돌아가신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이시영 선생 하면 여섯 형제 및 가문이 독립운동가이며, 특히 굉장한 부자였음에도 전 재산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내놓은 대한민국 역사상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로도 유명하지요. 남산 백범광장에는 이시영 선생 동상이 있고, 그의 형 우당 이회영의 이름을 딴 "이회영기념관"은 서울 남산 자락 명동역 인근 남산 예장공원 속에 있습니다. 이곳 장소들도 들르셔서 이시영 선생을 기리고 또한 그의 형제들을 비롯한 가문의 활약상도 확인하고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전시실 내 이시영의 형 이회영의 묵란 / 서울 남산 백범광장 소재 이시영 좌상


(5) 못다 이룬 독립-민주의 꿈 <해공 신익희>

1894. 7. 11.~1956. 5. 5.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국가는 완전히 독립하고, 민족은 철저히 해방되고, 사회는 반드시 평등해야 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장을 역임하고 제2대 대한민국 국회의장에 이르기까지, 이시영 선생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부터 대한민국 건국 초까지 정부의 수뇌부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는 신익희 선생.


사실 제게 익숙한 인물이었던 이유는 대통령 선거 유력 주자였다가 피살되었다는 사실로 인해서였지.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는 잘 몰랐었습니다. 알고 보니 불과 만 18세에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 입학했고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했더라고요. 임시정부 내무차장을 역임한 때가 불과 25세였고, 이듬해에는 26세의 나이에 외무차장 겸 외무총장 대리를 역임할 정도로 젊은 시절부터 임시정부 요인으로서 조국을 위해 일한 애국지사셨습니다.


광복 전 해인 1944년에는 내무부장까지 역임한 이력이 있는 만큼 신익희 선생이 좀 더 살아계셨더라면 대한민국의 지도자로서 국가 발전에 기여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복 전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 시기까지 조국을 위해 일한 신익희 선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신익희 유묵과 인장

이상의 다섯 인물은 전원이 건국훈장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에 빛나는 대한 국민이라면 다 알 정도의 유명 애국지사였는데요. 앞으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들이니 더 집중해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6) 독립에 바친 신앙의 힘 <춘헌 이명룡>

1873. 8. 2.~1956. 11. 12.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아들아! 지금 서울에는 민족운동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모임이 비밀리에 조직되고 있다. 그러니 너도 지금 당장 평양에 가 숭실전문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3.1 운동에 참여하여라

생소한 인물이었지만 무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춘헌 이명룡 선생은, 만세 운동 전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에 가입했고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다 2심에서 무죄를 받고 이듬해에 석방됐습니다. 그러다 3.1 운동 후 다시 1920년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투옥되셨고요. 이듬해 출옥 후에는 종교, 교육, 산업 분야에 주력했다고 합니다. 1956년 83세 나이에 서울 충무로 자택에서 사망하셨습니다.


건국훈장 중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인 '대통령장'을 일찍이 수여받을 정도로 국가가 인정한 이명룡 애국지사의 존재를 이번에 확실히 알았습니다.

3.1 운동 민족대표 48인 판결문 / 105인 사건 검사 신문조서


(7) 조국 독립을 염원한 아나키즘 혁명가 <단주 유림>

1898. 5. 3.~1961. 4. 1. 건국훈장 독립장(1962)

"나의 이상은 강제 권력을 배격하고 전 민족, 나아가서는 전 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 하에서 다 같이 노동하고 다 같이 자유롭게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다"

역시나 제게는 생소한 인물인지라 생애 및 활동 이력을 정독했습니다. 1898년 출생인데 1910년 경술국치 후 충군애국 혈서를 쓰고 독립운동에 헌신 결의를 했는데 이때 나이는 단 13세입니다. 3.1 운동에 참여, 서로군정서 참여,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 가입 등 독립운동을 해오다 1929년 아나키스트 비밀결사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만주 방면 책임자로 활동하신 이력이 눈에 띄었습니다.


194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1943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위원회 연구위원과 선전위원회 선전위원을 그 이듬해 1944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했고 광복 후 1948년에는 대한국민의회 의장도 맡는 등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단주 유림의 이름을 제대로 남길 정도로 조국에 헌신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8) 시대에 맞서 싸운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

1879. 7. 10.~1962. 5. 10.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성인의 글을 읽고도 세상을 구제한 뜻을 깨닫지 못하면 그는 가짜 선비이다

심산 김창숙은 1905년 을사오적 처단과 을사늑약 폐기를 상소했고, 1910년에는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고 성명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91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1925년 비밀결사 신건동맹단 결성 및 독립운동기지건설 군자금 모집 활동을 했고요. 특히 1926년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폭탄 투척 의거 주도했다고 합니다. 같은 해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요. 광복 후 1946년에는 초대 성균관장을 했으며 이후에도 정치 활동을 하는 등 평생을 조국을 위해 일해온 인물입니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훈받은 1962년도에 사망한 김창숙 애국지사, 잊지 않겠습니다.

김창숙 유묵, 만년필과 안경, 인장


(9) 독립운동과 민주주의의 수호자 <가인 김병로>

1987. 12. 15.~1964. 1. 13. 건국훈장 독립장(1963)

정의를 위해 굶어 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 범관은 최후까지 오직 정의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

부정을 범할지언정 정의를 위해 굶어 죽는 것이 났다고 말하는 가인 김병로는 참 법조인입니다. 학교의 조교수 및 강사로 활동하다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명돼 판사 생활을 하다 곧 면직 신청을 한 뒤 변호사 개업을 했습니다. 독립운동 사건을 무료로 변론하는 등 항일 변호사로서 활동했고,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한국민주당 중앙감찰위원장을 거쳐 1946년에는 미군정 하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을 그리고 1948년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역임했습니다.


법조인으로서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줬으며, 초대 대법원장 역임 등 그의 행보는 상징성이 큰 인물 가인 김병로를 이제야 알게 되었네요. 제가 법학을 전공했어서 그런지 이번 전시에서 개인적으로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이었습니다.

대법원장 임명장(김병로)


(10) 신념을 지킨 독립 정신의 표상 <상산 김도연>

1894. 6. 16.~1967. 7. 19. 건국훈장 애국장(1991)

"내가 이역에서 겪은 가지가지의 고난은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지만 어쨌든 내가 걸어온 길을 회상해 볼 때에 뉘우침이 없었고 또한 조국과 미족 앞에 떳떳하였음을 자부하는 것이다"

상산 김도연은 일본 유학파로 게이오기주쿠 입학 후 조선유학생학우회 및 조선학회를 활동했고, 특히 조선청년독립단 일원으로 1919년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주역으로 이를 이끈 인물을 모르고 있었다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금고형을 받고 투옥했고, 이후에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 2년간 투옥되었다 합니다. 광복 후에는 초대 재무부 장관, 3~5대 민의원, 제6~7대 국회의원에 제4대 국회부의장까지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정치가로서도 왕성히 활동한 바 있습니다.


2.8 독립선언과 조선어학회라는 유명한 사건은 아는데 이 모두의 관련자인 상산 김도연 선생은 미처 몰랐었는데 이번 특별전을 통해 이러한 독립운동가를 알게 돼 감사한 마음입니다.

2.8 독립선언서
조선어 표준말 모음 / 조선 말 큰 사전


(11) 무장항일투쟁과 민족통합운동의 선봉 <강재 신숙>

1885. 12. 29.~1967. 11. 22. 건국훈장 독립장(1963)

아! 천운이 순환하여 을유년 8월 15일에 이르러 저 무도한 일제는 마침내 패망의 수레를 탔고 우리의 태극 국기는 다시 이 세계에 광명을 밝히게 되었다.

강재 신숙은 1907년 문창학교를 설립, 1919년 3.1 운동 당시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 및 배포했고 이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 군사통일회의 의장과 상해 국민대표회의 부의장을 역임했고 민족유일당운동 등을 전개했습니다.


특히 1930년 한국독립당을 결성해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 쌍성현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광복 후에는 1947년 과도입법의원 의원과 재외동포귀환위원장, 좌우합작위원회에 참가했고 1948년에는 민족자주연맹 중앙상무위원, 김구-김규식 선생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1960년에는 4. 19 혁명 직후 국민각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 그리고 광복 후에는 민족의 화합을 위해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4.19 혁명 후에는 비상대책위 워원장으로 활동하는 등 어려움에 처한 조국을 위해 늘 헌신해 온 존경받아 마땅한 애국지사입니다.


(12) 대를 이은 애국의 일념 <평산 신하균>

1918. 9. 2.~1975. 11. 10. 건국훈장 애국장(1990)

국가 생활의 모든 분야에 걸친 이 만민 평등의 민주적 신질서만이 우리 민족이 갈구해 오던 근대적 내용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평산 신하균은 앞서 소개한 거물 신익희 선생의 장남입니다. 훌륭한 독립운동가의 아들과 형제 중에는 친일파로 활동한 이들도 사실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가족이니까 당연히 그 길까지 따라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독립운동의 고역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 길을 함께 가는 것은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평산 신하균은 아버지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25세에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복무하며 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광복 후에도 아버지의 길을 따라 정치인으로 제3대와 제5대 민의원, 제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1973년에는 광복회 부회장으로도 활동했습니다. 한국광복군으로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헌신한 평산 신하균입니다.


(13) 신항일, 반독재민주화운동의 투사 <현곡 양일동>

1912. 12. 30.~1980. 4. 1. 건국훈장 애족장(1990)

교육은 민족의 영속적 발전의 원동력이고 문화는 그 아름다운 꽃이요 열매이다. 비록 시운의 변동에 따라 정권에 존망이 있을지라도 민족의 생명은 멈추어질 수 없고 교육과 문화가 정체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릴 현곡 양일동은 1929년 중동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주도하다가 퇴학, 1930년 도쿄에서 아나키스트 단체 흑우연맹 가입 및 기관지 '흑색신문' 발간, 1932년 아나키스트 노동단체 조선동흥노동연맹에 가입했습니다.


광복 후에는 역시나 정치인으로서 제3대~5대 민의원 의원을 역임했으며 이후에도 신민당 원내총무와 제8대 및 제10대 국회의원, 민주통일당을 창당하고 총재로 활동했는데요. 무엇보다도 유신헌법철폐운동과 유신반대투쟁 등을 전개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도 온몸을 던졌습니다. 독립투사이자 민주화 투사까지 생애 내내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그의 행보 역시 우리 후손들의 깊은 존경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전시실 가운데에는 13인 인물과 관련 있는 전시물이 비치돼 있다.

이상으로 13인의 전시 소개를 마쳤는데요. 전시실 가운데에는 인물과 관련된 전시물도 있으니 현장에서 하나하나 면밀히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 수유리 한국광복군 합동 묘역 안장 17위

김성률, 김운백, 김유신, 김찬원, 동방석, 문학준, 백정현, 안일용, 이도순, 이해순, 전일묵, 정상섭, 한휘, 김순근, 이한기, 조재균, 현이평

수유리에 안장된 17인 한국광복군의 전시 공간

전시실 출입구 왼쪽 벽면에는 수유리 합동 묘역에 안장된 17인의 한국광복군에 대한 전시 공간이 있습니다. 여기의 인물들은 전원 건국훈장 애족장 혹은 애국장을 수여받으며 공로를 인정받기도 했는데요. 생소한 이름들이며 모두 기억하기란 쉽지 않겠지만 꼭 한 번씩 육성으로 이름을 읽어보십사하는 마음에서 모두 기재해 보았습니다.




13인의 인물 모두 인상 깊었지만 을사오적 처단과 을사늑약 폐기를 상소부터 국채보상운동과 성명학교 설립,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폭탄 투척 의거 주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부의장, 초대 성균관장 등 정말 다채로운 활동으로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심산 김창숙 선생이 특히 기억에 남았습니다. 윤봉길의사의 장례 때 추도사도 하셨더라고요.

원래 잘 알던 애국지사들은 잘 몰랐던 면모를, 김창숙 선생처럼 잘 몰랐지만 꼭 알고 있어야만 하는 여러 독립운동가를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이번 전시 관람을 통한 큰 수확입니다.


서울 수유 국가관리 묘역 위치도


지난 7월에 망우리 역사문화공원에 방문했을 때 이곳에 애국지사들의 묘역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수유동에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알았습니다. 다음에는 시간을 더 내어 수유 국가관리 묘역 내 각 애국지사의 묘역도 찾아가 참배드리려 합니다.


광복한 지 80주년이나 되었는데 우리는 광복에 이바지한 독립운동가를 아직도 많이 모르고 있지는 않나요? 얼마 남지 않은 80주년의 해가 다 가기 전에, 수유동 묘역에 잠든 애국지사를 조명하는 이번 특별전 꼭 보셔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애국지사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시고 그분들의 숭고한 뜻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번 특별전과 같이 애국지사와 관련 있는 장소에서 이를 기념하는 전시나 행사가 자주 열려, 광복의 기쁨과 의미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늘 잊지 않고 가슴속에 새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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