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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석 May 28. 2022

소설을 쓴다는 것

소설은 아무나 쓰나

짧은 시간 동안 소설이란 걸 써본 적이 있었다. 간단한 스케치 하나만으로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내가 받아든 그림은 ‘귤’이었다. 문득 제주가 떠올랐다. 감귤하면 제주도니까. 서울에 살던 누군가가 갑작스레 제주도의 한 감귤농장에서 일하게 된다, 제주에서 살아본 적이라곤 없는 사람이지만 한 번쯤 살아보고는 싶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예기치 않은 실연을 당한다, 상대방은 갑작스런 이별 통보를 카톡으로 남긴 채 비행기를 타고 떠나버렸다, 장거리 연애였는데 방학을 맞이해서 잠시 한국에 들어온 터였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데이트하고 제주에 내려왔는데, 이렇게 떠나버린다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가랑비가 추적추적 흩뿌리던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폭포처럼 생각이 밀려들었다. 갑작스럽게 글감이 떠오르거나 영감을 발견하는 순간이야 적지 않게 찾아온다만, 보통은 삶과 사람과 세상에 대한 관조, 감상, 깨달음, 그도 아니면 사회비판적인 것이었다. 수필 혹은 논리적 글쓰기에 적합한 소재였다는 뜻이다. 그러니 머릿속을 파고드는 제주도 감귤농장은 꽤나 느닷없는 일이었다. 소설로 쓰기에 적당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처음이었다.


그런데 머릿속에 떠오른 이야깃거리를 텅 비어 있는 하얀 화면에 활자로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도 훨씬 어려웠다. 상황이 구체적이고 치밀해야 했고, 인물의 성격이나 성향을 반영해야 했으며, 어떤 부분을 서술하고 어떤 부분을 대사 처리해야 하는지까지, 모든 디테일을 챙기고 설계해야 했다. 아아, 예술가들이 토로하던 창작의 고통이란 게 이런 것이었던가. 내가 각잡고 소설을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좀 끼적거려보겠다는 것뿐인데, 이게 이렇게 머리가 깨질 일이란 말인가.


몇 주에 걸쳐 서너 개의 시퀀스를 만들어보았다. 한글로 10장이나 되었을까? 아마 채 되지 않았을 테다. 반응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몇 안 되던 주변 독자들은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했다. 그래서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소설도 쓰려면 쓸 수 있었구나!


고백하자면, 소설을 쓴다?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쓰지 않을 것 같은 장르의 글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아무래도 소설이었으니까. 보다 정확하게는 쓰지 '못할' 것 같다고 해야겠지만. 어릴 적에는 소설을 읽지도 않았으니 '소설을 쓴다'는 행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용'해 보인다는, 그런 이유였다. 소설 읽는 건 시간낭비라고 여겼던 거다. 수치와 결과로 모든 것을 퉁치는 성과 중심 사회의 가치를 온몸으로 내재화하며 자란 사람으로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배울 점'이 없는 소설을 읽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기계발서는 싫었는지 인문 혹은 사회과학 서적 위주로 읽었다.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해, 라고 누가 가르치는 건 또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에 더해 나는 깨어있는 사람이랍시고 '척'을 하고 싶었던 건지도.


나는 논리적 글쓰기에 더 익숙한 사람이고, 굳이 문학 중에서 꼽아본다면 수필(에세이)이 가장 잘 맞겠다고 생각했다. 디테일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함축하고 요약하는 일이 적성에 더 맞으니 시나 시조도 못 쓰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두세 줄만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그런 예술을 창조해내지는 못하겠지만, 뭐 구색 맞춰 쓰려면 쓸 수는 있을 것 같다는 거다. 그렇지만 소설? 에이...


그런데 써보니까 이게 또 써지네? 심지어 생각보다 괜찮았다. 역시 해보지도 않고 지레짐작으로 시도조차 하지 않거나, 어차피 되지 않을 거라 예단할 필요는 없는 걸까? 하지만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소설을 쓰지 못하리라는 것을. 소설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이를테면 나는 이런 표현은 죽어도 쓰지 못할 것 같다.


한동안 봄 같은 날씨가 이어졌지만 어딘가에서 아직 손대지 않은 한기의 재고를 찾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오늘 아침부터 다시 갑작스레 추위가 되돌아왔다. 『마티네의 끝에서』 히라노 게이치로


생략한다 해도 스토리 전개상 아무 문제 없을 이 '무용'한 표현은, 바로 쓸모없기 때문에 더 오랫동안 마음에 머물다 가는 게 아닐는지.




추리소설은 또 어떤가. 내게 잘 쓴 추리소설은 아름다운 예술이다. 소년탐정 김전일과 명탐정 코난 같은 추리만화 한 권을 한 시간 동안 탐독하던 어릴 적 버릇을 결국 남 주지 못한 걸까? 그러나 세세하고 치밀한 플롯을 짜고 소설의 처음부터 아주 조금씩 적절하게 정보를 흘려주다가 마지막에 반전을 일으키는, 이런 글을 쓰지는 못할 것 같다. 인상 깊게 읽었던 작품은 자그마치 664페이지에 달하는 찬호께이의 『13.67』. 60년대부터 반환 전후까지 홍콩의 현대사가 깔려 있는 6개의 챕터는 제각각 독립적이고 완성된 추리소설의 형태를 띠면서도 서로 유기적으로 얽히며 한 권의 책을 만들어낸다. 추리소설 작가들은 다 천재인가?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는 하와이에 모여 돌아가신 어머니(손주들에게는 할머니)의 제사를 지내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전통적인 방식의 제사 대신 하와이 여행을 하며 어머니/할머니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를 찾아내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며 고인을 추억한다. 설정 자체도 신선하고 흥미롭지만 내가 가장 놀랐던 건 13명에 달하는 가계도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의 서사를 부여하고 밀도 있게, 그러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었다. 이 또한 나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가장 까다로운 건, 내가 가장 중요시하고 좋아하는 특징이자 매력인 '극한까지 깊게 파고 들어가는 인물의 감정이나 상황 묘사'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작가에게, 특히나 소설가에게 필요한 미덕을 딱 하나만 꼽으라 한다면 세상과 사람에 대한 '관심'이라 답할 것이다 (무슨 대단한 평론가라도 되는 양 떠들고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소설가가 되기 어려운 결정적인 이유도 여기에서 찾는다. 다른 이들에 대한 진심 어린 관심이 부족하지 않은가? 사회적으로 형성된 배려나 존중 말고. 그래서 나는 유명 작가가 아니더라도 소설을 쓰는 모든 분들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언젠가 한 번쯤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 역시 가져본다. 아마 첫 소설을 쓰게 된다면 그건 자전적 소설이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의 소설가에게 첫 작품은 자전적 소설인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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