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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아데스 Sep 24. 2023

가을이 써 내려간 편지

하루의 분주함을 조용히 묻기라도 하듯,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비 내리는 밤, 너희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안녕, 잘 지내니?’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이런 식으로 인사하려니 약간 쑥스럽기도 하다. 되돌아보니 모든 것이 그립구나. 추억이라고 다 황홀한 무늬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기억 속에 남아있는 우리의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리라.


교실에 들어서면 늘 시커멓게 그늘이 지던 남학교의 4년을 마치고, 새로운 기대에 문을 열어준 것은 바로 너희의 그 하얀 미소였단다. 아직도 첫 만남을 잊을 수가 없구나. 너희가 고등학교 생활을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시작할 때 나 역시 기대와 책임감으로 무언가를 다짐했었지. 솔직히 말하면 너희가 무척 좋았고 원하는 것은 뭐든 해주고 싶었다.

2박 3일의 수련회, 중간고사가 끝난 후 함께 불렀던 노래, 스승의 날의 초코파이 축하, 그리고 폭우가 쏟아지던 날 밤의 깜짝 무도회. 정말 꿈같이 보낸 날들이었지. 그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아마도 줄다리기 대회에서 우승한 일이겠지? 치열한 예선전을 거치느라 기진맥진했었지. 힘이 센 7반도 이겼고 목소리가 큰 1반도 우여곡절 끝에 이겼잖아. 가까스로 올라온 결승전에서 우리는 반신반의했었다. 8반을 이길 자신은 정말 없었으니까. 그런데 온 힘을 다한 결과 결국 승리했어. 모두 하나가 되어 남은 힘으로 비명만 지르고 있을 때, 심판이 우리 쪽을 쳐다보며 손을 번쩍 들었지. 그때 환호를 하면서 얼싸안고 얼마나 울었던지.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랑스러웠어. 고함을 지른 후유증으로 성대에 이상은 생겼지만, 한동안 정말 행복했었다.


좋은 일만 있었겠니?

담임은 제쳐놓고 옆 반 총각 선생님에게 눈길을 돌리는 너희를 보며 난 질투의 화신을 잠재워야 했어. 너희가 온갖 전율을 느끼며 야간자습으로부터 도망갈 때, 또한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대야 했었지. 순정이 너 기억나니? 노래방의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네가 나한테 했던 말. “저도 제 마음을 어쩔 수 없어요. 오늘만 봐주세요. 선생님, 사랑해요오오~~~.” 지각생이 많아 매일 답답한 가슴을 두드리며 그 명단을 확인해야 했었다. 그러던 중 희열도 있었지. 어느 날 우리 반 지각생이 한 명도 없는 게 아닌가? 그날 아침 천사의 날개를 달고 하늘을 몇 번이나 날아올랐는지 모른다. 후에 알게 된 얘기지만 합창 연습 때문에 아침 7시까지 모두 모이기로 했다나. 어쨌다나.


물론 행복한 일이 더 많았고 설사 힘든 일이 있었더라도 한 잔의 커피처럼 쓰기에 더 향기로운 추억으로 남는 것 같구나. 그러니 너희를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 여겨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 모두 씩씩하게 인생의 바다를 잘 헤엄쳐나가고 있으리라 믿지만 혹시라도 너희의 삶이 팍팍할까 봐 걱정도 되기도 한다. 현실을 당당히 마주하고 마음껏 꿈틀거리며 용기 있게 살아가면 좋겠구나.


창 밖에 내리는 저 가을비가 포근하게 느껴진다면 너무 억지일까? 너희에 대한 마음만큼이나 뜨거운 커피를 앞에 두고 오늘 밤은 마음이 닿는 데로 그렇게 너희를 만나고 싶다. 그리고 오랜만에 외쳐본다. 그것도 온 밤하늘을 가르며 이렇게 말이다.

‘1번 은미부터 끝 번호 선영이까지, 전학 간 효정이, 민희도, 반장 소현아! 들리니? 언제까지고 난 너희 편이야. 우리는 한편이니까. 모두 정말 사랑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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