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밍디터 Dec 17. 2020

당신의 평결이 궁금해지는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

내가 배심원이라면 어떤 평결을 내릴까.

(좌)연극 포스터  (우)영화 포스터

극단 산수유의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온라인 중계로 봤다. 제목이 낯익은 이유는 1957년 영화로 만들어진 <12명의 성난 사람들>을 원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관련 교양수업을 들을 때 이 영화에 대해 추천을 받은 기억이 났다.(공연을 보고 나니 영화와의 차이점도 궁금해진다.) 이 연극을 온라인 중계로 보여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메모해놓았던 건 작년에 아깝게 놓쳤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포스터를 보고 예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공연이 끝난 뒤였다.


16살의 소년이 친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죽여버리겠다는 외침을 들었다는 사람과, 지하철 안에서 창밖으로 소년이 한 살인을 목격했다는 증인이 있다. 살인에 사용된 다소 독특한 손잡이를 가진 칼과 똑같은 칼을 소년이 구매하였고, 그를 기억하는 잡화점 주인도 있다. 평소 폭력적이었던 아버지가 아들을 상습적으로 때리곤 했다는 사실도 모두에게 공개됐다. 배심원으로 선정된 12명의 사람들이 유죄로 평결을 내리면 이 소년은 바로 사형에 처해진다. 단, 평결은 반드시 만장일치여야 한다.


거수로 투표를 하기 전, 배심원들은 소년의 유죄가 확실하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믿는다. 첫 번째 투표의 결과는 11대 1. 단 한 명의 배심원만이 그 소년이 유죄가 확실한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아니, 당신은 저 모든 정황과 증거를 보고도 저 소년이 무죄라고 생각하는 거요?'
'아뇨. 저도 소년이 무죄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소년이 유죄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투표에 소년의 사형집행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유죄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이 남자의 등장으로 배심원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간다.


연극의 재미는 아수라장 속에서 서로를 설득하려는 배심원들의 소년의 유/무죄에 대한 생각과, 배심원들의 평결이 지니는 무게에 대한 각기 다른 시각과, 계속되는 몇 차례의 투표 속에서 바뀌어가는 숫자 대결에 있다. 11대 1이었던 숫자가 9대 3, 6대 6... 을 지나 어디까지 변화하는지, 왜 변화하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포인트다. 물론 공연을 보며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내 생각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겠다.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12명의 사람들의 대화에서 증인과 정황 증거가 언급되기 시작할 때는 나 역시 소년이 유죄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물론 소년의 사형집행이 12명. 특히 무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1명의 손에 달려있는 상황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했다. 유죄라고 생각한다는 거수투표에 지나치게 빠르게 손을 든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확신이 있었을 수는 있으나, 대체로 더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어 했으며, 사형집행의 결정이 자신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12명이라는 집단에 손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배심원 개인에게 '오로지 당신의 결정만으로 저 소년의 사형집행이 결정됩니다.'라고 말했다면 거수투표의 결과는 달라졌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무죄에 손을 들었던 1명의 배심원의 말에도 완전히 동조되기는 어려웠다.

'그건 증인의 말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증인의 말에 실수가 있을 수도 있죠.'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변호사가 그 사실을 몰랐다면요?'

모든 정황 증거와 증인의 말에 대해서 의심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말들은 일리가 있지만, 그 배심원 1명에게도 적용되는 말이기도 했다. 선서를 한 증인의 말이 있음에도, 그 말이 거짓이라고 가정하고 있으며. 실수가 있었을지 없었을지 모르지만 있었다고 가정하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저 사람이 사건과 일부분 관련이 있어서 뭔가를 알고 그러는 건가 싶었지만 극을 다 보고 나서 알았다. 그가 뭘 알고 무죄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정말 무죄인지 유죄인지를 몰랐던 거다. 증거와 증인이 확실하지만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고, 집단지성의 힘을 빌려 그 석연치 않은 구석을 해소해야만 평결을 내릴 수 있다고 강하게 판단했던 거다. 결과적으로 이 1명의 배심원이 제기하는 의구심 덕분에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정황과 증거의 '헛점' 으로 보이는 것들이 드러나고, 그러면서 무죄로 평결을 바꾸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 1명의 반대편에 서있던 다른 11명도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내내 고성을 지르고, 노인을 무시하던 한 배심원(정말 어떤 관객이라도 별로일 거라고 생각할 만한 사람)은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이, 살인자를 풀어줄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냐'라고 지적한다. 생각이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도 의구심을 제기하며 입장을 바꾸기도 한다. 자신이 유죄를 고집하면 절대 이 회의가 끝나지 않을 것 같다며 그냥 무죄로 바꾸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당당하게 뱉어내는 어떤 배심원도 '부끄러운 줄 알라'는 다른 배심원의 지적에 깨갱하며 일말의 수치심을 느끼는 듯 보이기도 한다.


다만 그들 모두 처음부터 그 평결의 무게를 인지했던 사람들은 아닌 것 같다. 어쩐지 점점 판단과 결정이 가벼워지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더욱이 11명의 반대편에 섰던 1명의 배심원과 같은 사람이 사회에 꼭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실이 맞는지 계속해서 의심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보다는 '평결과 한 사람의 삶과 목숨에 대한 무게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서다.  그러나 이 작품이 현실이 된다면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그 1명의 배심원을 귀한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을까. 내가 같은 상황에서 배심원이 되어있다면 나 역시 그 1명의 사람을 좋게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이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집단 속에서의 인간,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비슷하면서도 정말 다 다른 존재들이어서, 인간 본성에 대해 질문하고 보여주는 작품들은 많은 시간이 지나도 꾸준한 사랑을 받을 것 같다. 비록 온라인으로 실황을 보았지만 12인을 하나하나 다 지켜보고 싶은 연극이어서 온라인보다는 오프라인에서 훨씬 강점이 많은 극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대사가 나올 때 특히 눈여겨보고 싶은 배심원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으므로, 다음에 극이 돌아온다면 꼭 현장에서 관람하고 싶은 공연이었다.

+좋은 작품을 무료로 중계해주신 울산광역시 학생 교육문화회관에 감사를!

매거진의 이전글 주목받지 못하는 인생을 노래하는 연극 <콘트라바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