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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자 조르바 Apr 15. 2021

우즈벡에서 낯선 남자와의 동침

우즈벡(타슈켄트)Episode 1

“네 지금 가는 중이에요. 조금만 기다려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한국어에 고개가 홱 돌아갔다. 목소리의 출처는 한국인이 아닌 금발에 파란색 브릿지를 넣은 백인 여자였다. 반갑고도 놀라운 마음에 그녀가 전화를 끊자마자 말을 걸었다.


“오 한국어 잘하시네요?”

원어민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이 친구 이름은 카밀라다. 한국인 남자와 결혼하여 타슈켄트에서 같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거 알아요? 우즈벡 사람들은 외국인을 엄청 좋아해요”

이 말은 사실이었고 우즈벡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복에 겨운 환대를 받았다. 우즈벡 편을 읽다 보면 당신도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싶은 충동이 들 지도 모른다.


카밀라는 바쁜 와중에도 나를 게스트 하우스 앞까지 태워다 주었다. 타슈켄트 공항에서 어떻게 하면 저렴하게 숙소까지 갈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었던 나에겐 단비 같은 호의였다.

첫출발이 굉장히 순조롭다. 내가 묵을 숙소는 가격은 싸지만 위치가 안 좋으니 다음에는 셔틀버스가 있는 좋은 곳에 묵어라는 충고를 남긴 채 그녀는 떠났다.


1.


다음날 아침 모스코로 가기 위해 지하철로 향했다. 우즈벡 지하철 안은 안내방송 스크린이 없다. 덕분에 지금이 어느 역인지, 환승은 어떻게 하는지 알 턱이 없다. 타고난 길치의 성향까지 더해지니 지하철 타는 것 자체가 모험이다.

두리번거리며 환승 게이트를 찾는 중에 웬 젊은 여자가 말을 건다.


“도와드릴까요?”

큰 눈, 뚜렷한 이목구비, 비교적 큰 키에 밝은 미소. 우즈벡 여행을 떠나며 내심 고대했던 장면이다. 한국인의 프레임 ‘장모님의 나라 우즈벡’이 궁금했긴 했다. 말로만 듣던 우즈벡 미인과 대화의 물꼬를 트는 영광의 순간이다.


서둘러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환승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런데 이 여성분, 영어를 많이 못한다. Nice to meet you, How Can I help you 같은 기본 문장만 말할 수 있을 뿐, 다음 단계의 소통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영어를 못하는 게 오히려 감동이다. 불안한 눈동자의 외국인을 돕기 위해 먼저 서투른 영어로 말을 걸어 주다니. 한창 내적 감동을 받고 있는 찰나 옆에서 지켜보던 웬 까무잡잡한 남자가 말을 한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이 청년의 이름은 나지르. 우즈벡 미인과 즐거운 눈동자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도중 끼어든 불청객. 이게 나지르의 첫인상이었다. 확신에 찬 태도로 다가온 그는 ‘환승’, ‘목적지’ 등의 단어를 알아들었다. 아쉽게도 우즈벡 미인과의 대화는 스파시빠를 외치며 자동으로 종료됐다.


“나 한국 엄청 좋아해. 너만 괜찮다면 내가 타슈켄트 투어를 도와줄게”


“오 한국을 엄청 좋아하나 보네. 고마워”


“만약 네가 괜찮다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 내 친구는 한국 요리도 할 줄 알아. 같이 놀자”

아니,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재워준다니. 굉장히 수상하다. 한국이었다면 바로 ‘도를 아십니까’를 넘어 범죄 집단이라고 판단하고 못 들은 척 무시했을 멘트다. 하지만 조곤조곤하게 이야기하는 나지르에게는 도무지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다 이 청년, 자세히 보니 눈빛에서 총기가 느껴진다. 선한 인상에 총기 있는 눈동자. ‘나는 착하다’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인상이다. 느낌으로 사람을 판단하기엔 세상이 너무 각박하고 가혹하지만, 그래도 대화를 이어가 본다.


“말은 고마운데 그건 모르겠어. 이미 게스트하우스에 3일 치 돈을 냈거든.”

하루 10달러였지만 여행자에겐 큰돈이었다. 머뭇거리자 나지르가 한번 더 설득한다.


“나는 법학대학을 다니고 있고 몇 년 후엔 석사 학위를 받으러 한국을 갈지도 몰라. 국제 변호사가 꿈이거든”


역시, 괜히 총기가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다른 것 보다 나의 사람 보는 눈에 스스로 감탄했다.

나지르는 자기가 안전한 사람이라는 걸 입증하고 싶은 듯 학생증을 보여줬다. 한술 더 떠 명문대라고 자랑한다.

학생증은 모조품이라고 하기엔 너무 훌륭했다. 애당초 카우치서핑을 하려다가 호스트를 못 찾아서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고 있는 나에겐 고마운 제안이기도 했다. 내 직감과 그의 학생증을 믿어 보기로 마음먹으며 왓츠앱 번호를 교환했다. 머나먼 타국 길거리에서 만난 낯선 남자와의 동침이 이루어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총기 있는 눈을 가진 나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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