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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Apr 18. 2022

영생(永生)에 대한 소고(小考)

열역학의 관점에서

인간이라면 한 번이라도 영원한 삶을 꿈꾸어 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하려 했고, 길가메시는 죽지 않는 방법을 찾아 떠났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여러 종교는 내세의 영생을 약속하면서 현세의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어떤 사람도 현생에서 영생의 염원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인간, 아니 모든 생명체는 이곳 지상에서 영생할 수 없는 걸까? 그럴 수 없다면 영생의 길을 가로막는 현실의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은 뭘까? 만일 인간이 영생을 획득한다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물리학 법칙, 보다 구체적으로는 열역학을 통해 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 한다. 열역학은 명칭으로만 보면 주 관심사가 열의 거동과 관련된 좁은 분야에 한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열역학이 처음 시작하던 시기에는 열의 물리적 특성을 연구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의 열역학은 우리가 아는 한, 가장 작은 초미세 입자에서 은하계 전체에 이르기까지 우주에서 관찰되는 모든 것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우주는 138억 년 전에 대폭발(빅뱅)으로 만들어졌다. 그로 인해 에너지가 퍼져나갔고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는 대폭발 당시의 에너지 총합과 같다. 에너지는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단지 그 형태만 바꿀 뿐이다. 자동차를 예로 들어보자. 화학 에너지가 들어있는 휘발유가 실린더에서 폭발하면서 열에너지가 발생한다. 열에너지에 의해 연소 가스는 급격히 팽창하여 피스톤을 밀어 올린다. 이때 만들어진 운동 에너지로 바퀴가 회전하여 자동차가 달린다. 엔진에 연결된 발전기에서 만들어진 전기 에너지로 전조등을 켜면 빛 에너지가 되고 경적을 누르면 소리 에너지로 된다. 나머지 열에너지는 대기 중으로 방출된다. 아인슈타인의 E=mc2에 따르면 심지어는 물질도 에너지로 전환된다. 열역학에는 이것을 ‘열역학 제1법칙’ 또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 부른다.


앞의 자동차의 예를 역으로 생각해보자. 엔진의 효율이 30% 정도라고 하니 배기구나 라디에이터를 통해 공기 중으로 빠져나간 70%의 열이 저절로 엔진의 실린더를 데워 피스톤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같은 열량의 에너지가 교환된다면 ‘열역학 제1법칙’을 위배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열은 언제나 뜨거운 것에서 차가운 것으로 이동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확률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이 원자나 분자와 같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이미 알고 있다. 입자들의 운동이 빠르면 뜨겁고 느리면 차갑다. 자동차 엔진 주위에는 공기 분자들이 운동하고 있다. 그중에는 빠른 것도 있고 느린 것도 있다. 확률적으로 봤을 때 빠른 공기 분자들만 엔진 주위에 몰려 엔진을 뜨겁게 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빠른 공기 분자와 느린 공기 분자가 엔진 주위에 무질서하게 분포할 확률이 어마어마하게 훨씬 크기 때문에 엔진이 저절로 뜨거워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열역학에서는 이것을 ‘열역학 제2법칙’ 또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라 부른다.


열역학 제2법칙은 시간과도 연결되어 있어 열의 흐름을 정할 뿐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설명한다. 당구대의 당구공을 생각해보자. 만일 당구공이 멈추지 않고 구른다면 이를 촬영하여 화면을 앞으로 돌리든, 뒤로 돌리든 구분이 되지 않는다. 당구공의 운동 에너지가 마찰 때문에 열에너지로 소모되기에 당구공은 멈추게 되고 비로소 시간의 방향을 알 수 있다. 만일 우주가 열적으로 완전히 평형에 다다라서 더는 열이 흐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시간은 멈출 것이다. 열이 흐르지 않으면 시간의 흐름도 없다. 이를 ‘우주의 열죽음’이라 부른다. 

     

이제 영생과 열역학을 연결해보자.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열의 흐름이 있어 엔트로피가 증가함을 의미한다. 생명체도 생명 활동도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생명 활동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주의 열죽음’ 같이 열의 흐름이 없고 시간이 멈춘 상황이라면 생명 활동이 멈춰 죽음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열역학적으로 가능한 영원이다. 

    

1893년에 프랑스의 아마추어 천문가 카미유 플라마리옹은 『우주의 종말(La Fin du Monde)』에서 열죽음에 대해 묘사하였다.

 

카미유 플라마리옹의 책에는 강한 인상을 주는 판화 그림이 실려 있었다. 그림에는 파도가 솟구쳐 올라가다 꽁꽁 얼어붙어 만들어진 듯한 벽으로 둘러싸인 황량한 얼음판이 무시무시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림의 앞부분에는 턱수염을 한 노인이 다 헤진 옷을 입고 얼음에 엎드려서 주위를 마지막으로 그리고 절망적으로 돌아보는 모습이 있다. 그 옆에는 퀭한 눈과 예수와 같은 모습을 한 조금 젊어 보이는 남자가, 부러진 검정색 날개처럼 목도리가 바람에 펄럭이면서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종말을 헛되이 피하려는 듯이 다 떨어진 망토의 남은 조각을 필사적으로 끌어안은 채 맨발로 서 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애처로운 사람은 남자들 뒤에 있는 바위 위에 앉아 자기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껴안고 있는 짙은 색의 긴 머리를 한 어머니와 그녀의 아기이다. 이 악몽 같은 그림의 제목은 ‘사악한 인간은 추위로 멸망할 것이다’이다. 

   

카미유 플라마리옹의 열죽음에 대한 묘사는 뭔가 어색해 보인다. 열죽음이 우주가 열적으로 완전히 평형에 다다라서 더는 열이 흐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시간은 멈출 것이라면 바람이 불고 추위를 느끼고 사람들이 서로 끌어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열죽음에 대한 보다 생생한 묘사는 미국의 판타지 작가인 어슐러 K. 르귄의 『어스시 연대기(Earthsea Cycle)』에서 찾을 수 있다. 어슐러 K. 르귄의 묘사를 살펴보자.  

   

그리고 그들의 이름 짓기 기술이 서쪽 땅들 전체에 거대한 주문을 쳤고, 그리하여 섬들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들은 서쪽 너머 서쪽으로 가 거기서 영혼으로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담이 세워지고 주문의 그물이 쳐지자 바람은 그 담장 안으로 불기를 멈췄습니다. 바닷물은 빠져나갔지요. 샘물들은 솟아 흐르기를 그쳤습니다. 해 돋는 산들이 밤의 산들이 되었지요. 죽은 이들은 어둠의 땅, 메마른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바람』, p. 356) 

    

언덕 비탈을 한참이나 걸어 내려온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쩌면 그리 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지 않으며 별들이 움직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들은 거기 있는 도시들 중 한 곳의 거리로 들어섰다. 아렌은 불이 켜진 적 없는 창들을 보았고, 그중 어떤 집들에서는 고요한 얼굴과 텅 빈 손으로 서 있는 이들을 보았다. 죽은 자들이다.……

옹기장이의 녹로는 돌지 않고, 베틀에는 실이 걸려 있지 않고, 화덕은 차디찼다. 어떤 목소리도 노래 부르지 않았다.

(『머나먼 바닷가』, pp. 315~316) 

    

영원히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는 무한한 시간이 필요하기에 어슐러 K. 르귄은 마법의 힘을 빌렸다. 영생은 끝없는 시간을 의미하기에 영원히 사는 존재는 열죽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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