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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Apr 20. 2022

『내 젊은 날의 숲』의 생명들

복수초와 얼레지


복수초꽃
얼레지꽃

숲에 눈이 쌓이면 자작나무의 흰 껍질은 흰색의 깊이를 회색으로 드러내면서 윤기가 돌았다. 자작나무 사이에서 복수초와 얼레지가 피었다. 키가 작은 그 꽃들은 눈 위에 떨어진 별처럼 보였다. 눈 속에서 꽃이 필 때 열이 나는지, 꽃 주변의 눈이 녹아 있었다. 차가운 공기와 빈약한 햇살 속에서 복수초의 노란 꽃은 쟁쟁쟁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꽃은 식물의 성기라는데, 눈을 뚫고 올라온 얼레지꽃은 진분홍빛 꽃잎을 뒤로 활짝 젖히고 암술이 늘어진 성기의 안쪽을 당돌하게도 열어 보였다. 눈 위에서 얼레지꽃의 안쪽은 뜨거워 보였고, 거기에서도 쟁쟁쟁 소리가 들리는 듯싶었다.


목련


목련

춘분이 다가오면 목련의 겨울눈이 부풀어 벌어졌다. 그 안에 빛이 고이고 빛에 실려서 꽃잎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벌어지는 겨울눈 속에 고이는 밝음과 그 쟁쟁쟁 소리…


민들레 솜털 열매


민들레 솜털 열매

민들레는 꽃이 지고 나면 공처럼 둥근 솜털의 열매로 바람 속에서 풍화된다. 그 열매는 자신의 존재량을 극소화해서 헛것으로 흔들린다. 솜털들은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방식으로 신생의 땅을 열어 가는데, 그 헛것의 솜털뭉치 속에 들어 있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표정…


진달래


진달래

진달래는 메마른 돌밭이나 다른 나무들이 버리고 떠난 비탈에서 산다. 거기서, 진달래는 다른 나무들보다 먼저 꽃을 피운다. 그 꽃의 색깔은 발생과정에 있는 색깔의 이거나, 미래에 있을 색깔의 추억이거나 아니면 태어나기 이전에 죽어버린 색깔의 흔적이었다. 그 색깔은 식물의 꽃이라기보다 숨결처럼 허공에 떠 있다가 스러졌다. 정처 없고 근거 없고 발 디딜 곳 없는 색깔이었다.


옥수수


옥수수

옥수수는 6월 하순부터 7월 초순 사이에, 크는 소리가 들리듯이 자라난다. 그때, 커져가는 잎은 힘을 주체하지 못해서 휘어지고 꺾인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 때, 옥수숫잎은 전신을 뒤틀면서 쓸리운다. 잎이 뒤틀린 고랑으로 빗물이 흘러내릴 때 옥수숫잎은 흔들리고 시달리면서 견디어낸다. 폭우에 땅이 패고 줄기가 땅에 쓰러져도 비가 개고 7월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쪼이면 줄기는 땅을 딛고 다시 일어선다. 가벼운 바람에도 잎들이 서로 쓸려서 옥수수밭에서는 먼 썰물의 소리가 난다. 그 잎은 어릴 때부터 잎맥이 도드라져서 긴 여름날의 노동을 예비하는데, 가물고 뜨거운 여름날에 물을 실어 나르는 옥수수의 잎맥은 굵고 힘세다. 커다란 동물의 혈관처럼 옥수수의 잎맥은 벌떡거린다. 잎맥 속을 흐르는 옥수수의 힘…


수련


수련

아침햇살에 봉오리가 열리는 수련을 보려면 이른 새벽에 늪으로 가야한다. 그런 날에는 셔틀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내 차를 몰아서 출근했다. 열리는 봉오리 안쪽이 늘 내 눈길을 잡아당겼다. 그리기 전에 오래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오래 들여다볼수록 연필을 들기가 머뭇거려져 아침의 늪가에 앉아서 수련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리는 자가 아니라 들여다보는 자가 되기 십상이다.

아침햇살은 수련의 어린잎을 통과해서 물 밑에 닿는다. 수련의 여린 잎맥이 드러나고 잔바람에 흔들리는 물의 음영이 수련 잎에 비쳤다. 해가 좀 더 올라와서 수련 잎의 그림자가 물밑으로 내려앉을 때, 꽃이 열린다. 그 봉오리는 돌발사태처럼 세상에 처하게 되는데, 열리는 꽃 속에서 빛과 색이 쏟아져 나온다. 밤을 지낸 수련의 잎이 햇살을 맞이하고 봉오리가 열리는 사태…


작약꽃


백작약

키 큰 나무들이 물러서는 양지에서 작약꽃은 피면서 동시에 졌고, 지면서 또 피었다. 검은색만이 흰색을 표현할 수 있었는데, 검은 수채물감을 풀어서 검은색이 사위는 자리에 흰색을 드러내는 것은 흰색 물감을 풀어서 새카만 꽃잎을 그리는 일과 같았다.

검은색을 이끌고 흰색으로 가는 어느 여정에서 내가 작약꽃잎 색깔의 언저리에 닿을 수는 있을 테지만, 기름진 꽃잎이 열리면서 바로 떨어져버리는 그 동시성, 말하자면 절정 안에 이미 추락을 간직하고 있는 그 마주 당기는 무게의 균형과 그 운동태의 긴장…


패랭이꽃


패랭이꽃

꽃잎에 이슬을 매단 채 아침햇살을 받으면 패랭이꽃은 이파리 끝가지 긴장하면서, 쟁쟁쟁 소리가 날 듯한 기운을 뿜어내는데, 흐린 날 아침에 꽃은 긴장하지 않았다. 패랭이꽃 이파리는 가느다란 한 쌍이 마주 달린다. 그 이파리는 단순하고 또 명료하다. 그것들은 군더더기가 없고, 이 세상에서 부지런하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들만으로 가지런하다. 그 꽃은 가냘프거나 옹색하지 않다. 꽃에 대한 어떠한 언어도 헛되다는 것을 나는 수목원에 와서 알게 되었다. 꽃은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꽃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그때의 패랭이꽃을 세밀화로 그려내려면 그 ‘쟁쟁쟁’한 기운을 화폭에 옮겨와야 할 터인데, ‘쟁쟁쟁’이 물리적 구조를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쟁쟁쟁’은 그 구조 너머에 떠도는 것이어서 화폭에 좀처럼 내려앉지 않았다. 날이 흐려서, ‘쟁쟁쟁’은 울리지 않았다.


도라지꽃


도라지꽃
도라지꽃 퐁퐁

비가 그친 아침에 젖은 숲이 흐리고 나무들의 밑동이 물안개에 잠겨 있을 때, 그 물안개 속에서 도라지꽃이 멀리 보였다. 도라지꽃은 김소월의 말대로 ‘저만치’ 피어 있었는데, 꽃이 눈에 띄는 순간 ‘저만치’라는 거리는 소멸해버리고 도라지는 내 곁에서 보라색 꽃의 속살을 벌리고 있었다. 도라지꽃은 별처럼 피어난다. 색깔이 짙지 않지만, 특이하게도 눈에 잘 띄는 꽃이다. 멀리서 봐도, 고개를 옆으로 돌린 꽃들조차 나를 향해 피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오므렸던 도라지 꽃잎이 꽈리가 터지듯이 터지면서 벌어졌다. 꽃잎이 벌어질 때 ‘퐁’ 소리가 났다. 내가 다가가는 발소리와 진동에 충격을 받아서 꽃송이가 터진 것이 아닌가 싶어서 큰 나무 뒤에 숨어서 봤더니, 아무런 기척이 없는 적막 속에서 도라지 꽃봉오리들은 퐁, 퐁, 퐁 열렸다. 열릴 때, 꽃잎에 달려 있던 물방울들이 잎사귀 위로 떨어져 흘러내렸다.


서어나무


서어나무 군락
서어나무 새순
서어나무 단풍

서어나무는 자등령 일대의 산악에서 극상림의 군집을 이룬 수종이었다. 자등령 일대의 햇빛과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서어나무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서어나무는 자등령의 토양과 기후와 더불어 오랫동안 평안했고 다른 수종들이 그 권역을 넘보지 못했다. 넓은 잎이 많이 달려서, 능선에 걸린 뼈들을 덮은 나뭇잎은 대부분 서어나무의 낙엽이었다.

나뭇가지에 아직 잔설이 남아 있는 초봄에 서어나무는 핏빛처럼 새빨간 순을 내밀었다. 새순이 아니라 단풍을 먼저 내미는 나무 같았다. 나무 안에 그렇게 새빨간 것들이 가득 차 있다가 봄이 와서 물이 도니까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겨울에 온 산에 눈이 내리듯이 초봄에 온 자등령 숲에는 서어나무의 새빨간 순이 돋아났다. 그 새빨간 순이 연두색의 이파리로 변해가면서 서어나무는 여름을 맞는다. 윤기 흐르던 여름이 지나면서 서어나무의 잎들은 빨강에서 흰색에 이르는 모든 색을 드러내면서 가을볕 속에서 바스락거린다.


김훈 작가는 『내 젊은 날의 숲』에서 자등령에 있는 식물원의 생명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발췌한 묘사들과 잘 어울리는 사진을 골라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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