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비우고 싶을 땐 성북동으로 떠나요
사실 성북동은 나에겐 낯선 동네다. 서울인지 긴가민가 할 만큼 생소했다.
그나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성북동은 대학교를 다니던 2010년 무렵이다. 1호선 상행선을 이용하곤 했는데, 회기역까지 가야 하는 까닭에 '성북행' 열차가 오면 유난히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양주행, 의정부행에 비해 자리도 텅텅 비어있고 청량리행, 동묘앞행처럼 중간에 내리라며 내쫓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북행마저도 광운대행으로 이름을 바꿔 성북이라는 글자는 내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지워졌다.
그러다 몇 주 전에 우연히 성북동을 찾았다. 미세먼지 농도가 짙었지만 모처럼 날씨가 포근한 날이었다. 그렇게 필름 카메라를 들고 시작된 성북동 동네 한 바퀴.
4호선 한성대입구 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좁고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 어느 낯선 슈퍼 앞 정류장서 내리니 어느덧 성북동 꼭대기에 도착했다. 지대가 높아서 탁 트인 성북동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서울을 내려다 보기는 낙산공원과 해방촌 이후 실로 오랜만이었다.
성북동은 명절 때마다 내려가던 할머니 댁 동네와 비슷한 인상을 풍겼다. 낮고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푸근하고 편안한 동네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화려한 전원주택이 모여있는 단지도 발견했다. 실제 성북동은 대기업 회장들의 저택이나 외교관 대사관이 많이 모여있는 동네다. 평창동, 한남동 다음으로 부유한 동네로 꼽히는 성북동. 실은 빈부격차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는 동네이기도 했다.
이날 성북동 꼭대기까지 올라간 이유는 만해 한용운의 생가 심우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심우장은 3.1 운동 이후 만해 한용운이 만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그런데 심우장까지 가기 위해서 구불구불하고 좁은 골목길을 지나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언덕 중턱에 자리하고 있어 숨을 헐떡이며 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알고 보면 심우장의 터엔 특별한 의미가 숨어 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거취를 정할 때 총독부로 향하기 싫다는 이유로 남향을 거절하고 북향 쪽으로 터를 잡았기 때문.
독립을 향한 열망과 간절함이 담겨있는 심우장은 성북동에서 뜻깊은 장소다. 열차의 종착역으로만 알았는데, 역사적인 장소가 숨어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성북동 심우장은 혼자 와도 괜찮다.
오히려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아 머리를 식히기 좋다. 마당 터에 앉아 깊은 사색에 빠지거나 찬찬히 내부를 둘러보기 좋다. 성북동에 갈 일이 있다면, 혹은 사는 주민이라면 심우장에 들러볼 것을 추천한다.
심우장 다음으로 찾은 곳은 길상사였다. 길상사는 매년 많은 사진사들이 방문할 만큼 풍경이 매력적이다. 때마침 석가탄신일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라 골목이며 마당이며 연등이 길상사를 물들였다.
길상사에 들어서자마자 '와, 예쁘다'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수 백개, 아니 어쩌면 수 천 개의 연등이 바람결에 따라 살랑살랑 춤을 췄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게 해주세요" "올해는 꼭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세요" 연등에는 각자 한 해 바라는 소원은 공중으로 흩어졌다. 냉정한 신이라도 아름다운 연등을 봤다면 사람들의 소원을 외면하지 못했을 거다. 그래서 매년 길상사엔 연등이 공중에서 아름답게 물결치나 보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길상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시화로 갈 곳을 잃은 성북동 비둘기였지만 여전히 성북동엔 문명의 때가 타지 않은 곳도 많다.
사실 길상사는 사찰로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다. 본래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일제강점기 때부터 내려오던 퇴폐적인 술집이자 비밀스러운 정치가 이루어지던 곳)이었는데 요정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여 사찰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위키백과나 나무 위키를 참조할 것.
햇살과 바람이 평화로운 날엔 길상사로 떠나보자.
황톳길, 푸른 숲, 향 냄새가 가득한 길상사에서 하루를 머물다 보면 무언가에 쫓기던 복잡한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여유로운 생각만이 남아 있을 거다.
승복을 걸치고 편안한 걸음으로 절을 거닐고 있는 스님도 만날 수 있다. 스님을 마주치지 못했더라도 인자한 아기 돌부처가 대신 절 앞에서 방긋 웃어준다.
심우장, 길상사 그리고 알렉스더 커피를 끝으로 성북동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넓은 야외정원의 테라스가 있는 알렉스더 커피는 내가 좋아하는 카페의 요건을 갖춘 곳이었다. 광합성을 하며 폭신한 당근 케이크와 쌉싸름한 더치커피를 함께 먹을 땐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땐 성북동으로 떠나자. 구불구불한 언덕길 끝엔 평화로운 심우장, 길상사와 달콤 쌉싸름한 알렉스더 커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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