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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Jan 26. 2021

I MISS YOU

공중전화, 그리고 첫사랑의 노래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연합고사를 치르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에서 보는 첫 번째 시험에서 등수가 딱 두 배가 된다고 주변에서 겁을 많이 주었었다. 하지만 난 다행히도 큰 변화 없는 성적표를 받아볼 수 있었고, 나름 선방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2가 된 지금, 위기다.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성적이 떨어지고 있다. 이유를 모르지는 않는다. 허구한 날 독서실에 앉아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으니 공부가 잘 될 리가. 공부를 하려고 마음 딱 먹고 자리에 앉으면,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 생각이 난다. 어쩐지 못 본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편지 한 장만 쓰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면, 그 사이에 독서실에 온 친구가 커피 마시러 나가자고 한다. 그래, 일단 커피는 한 잔 마셔줘야지. 잠시 수다를 떨다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책을 펼치면 친구 문제로 속상해하던 짝궁 생각이 난다. 잘 해결됐을까? 내가 위로해주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또 편지 한 장 쓰고. 어젯밤 샤워할 때 입에서 맴돌던 시도 한번 살짝 적어보고. 이제 공부 좀 해볼까, 했더니 갑자기 삐삐가 울린다.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고 하는데, 얼른 이것만 듣고 와서 공부할까?


  이게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지!


  그러다 겨우 마음먹고 공부를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살며시 그분이 오신다. 내 인생 최대의 적, 졸음. 10분만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상쾌해질 거야. 그런데 그게 뭐 말처럼 쉬울까? 10분이 30분 되고, 30분이 한 시간 되고. 늘 잠이 모자란 고등학생에게 잠깐 자고 일어난다는 건, 기름 냄새가 솔솔 나는 치킨을 한 조각만 먹고 그만두라고 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 이렇게 띄엄띄엄 졸고 앉아 있느니 확실하게 한잠 자고 일어나서 진짜 열심히 공부하자. 그러고는 슬며시 바닥에 이불을 깐다. 독서실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그냥 살림을 차렸다.


  머릿속에는 늘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라 마음은 항상 불편하다. 그런데 정말 하기는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보지만, 나의 등수를 나타내는 숫자는 어김없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 과연 문제가 무엇일까! 위에 나열한 저런 사소한 것들 말고, 내가 공부할 수 없게 만드는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다는 걸 사실 나는 알고 있다.
 


  그날도 늘 그랬듯 집엔 손님들이 많이 와 계셨고, - 이 시기에 썼던 일기장에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집에 손님이 지겹도록 많이 온다고. 아빠는 너무 하다고. 나는 나중에 결혼하면 절대 집에 손님 못 오게 할 거라고. 이거 읽다가 풋 하고 웃어버렸다. 퍽이나. 그 아빠에 그 딸이지. 우리 집엔 늘 손님이 들끓는다. - 난 조용히 공부를 하기 위해 독서실에 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함께 다니던 친구들이 아무도 오지 않아, 간만에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문득 성당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가야 할 거, 오늘 미리 다녀오고 내일은 종일 콕 쳐 박혀서 공부하자!
 


  미사가 한창인데 눈치 없는 삐삐가 자꾸만 울려댄다. 아무리 진동으로 해 놓아도 조용한 성당에서는 그 소리마저 민폐이므로, 조금이라도 진동 소리가 덜 나도록 두 손으로 꼭 쥐어본다.


  현대 사회에 접어들어 생겨났다 없어진 여러 가지 통신수단 중에서, 수명은 비교적 짧았지만 가장 많은 이들에게 향수를 갖게 한 것은 삐삐일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 찰나의 순간을 살다 간 씨티폰의 웃픈 사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 처음 삐삐라는 것을 중고등학생도 가지고 다니기 시작할 무렵에는 선생님께 걸리면 어김없이 빼앗겼으므로, 속바지 안쪽에 몰래 숨겨 다니는 친구들도 있었다. 다행히 내가 삐삐를 소지할 무렵에는 선생님들도 포기하고 그냥 모른 척해주는 분위기가 되었다. 야자 중간 쉬는 시간이 되면 공중전화 부스 앞에 길게 늘어선 줄. 그게 뭐라고, 뭐가 그렇게 궁금하다고, 그 긴 줄 서기를 마다하지 않던 우리들.


  고1 때 담임이 영어 선생님이었는데, 우리가 뭔가를 요구하니까 – 가령 수업 대신 첫사랑 얘기를 해달 라거나, 자율학습을 시켜달라거나 뭐 그런 종류의 – 너희들 삐삐가 영어로 뭔지 아느냐며, 그걸 알아오면 허락해 주겠다고 하신다. 반전체가 겁나게 영어사전을 뒤적였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삐삐니까 b로 시작할 것이라는 정도의 유추는 할 수 있었던지라, b로 시작하는 모든 영단어를 샅샅이 훑었더란다. 물론! 우린 집요한 탐색 끝에 정답을 찾을 수 있었고,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원하던 것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집에 가면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이 있다고 여러 번 말씀하시던 귀여운 담임 쌤이 새삼 그다.
 


  미사가 끝나자마자 나는 성당 앞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몇 개의 음성 메시지. 그 아이였다. 아마도 내가, 나 이제 성당에 갈 거라는 메시지를 남겼던 것 같다. 나한테 연락해, 성당에 가지 마, 가지 말고 나랑 만나자. 음성 메시지를 들으면서 살며시 미소 짓고 돌아서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아이가 바로 앞에 서서 나를 보고 웃고 있다!


  깜짝 놀라 문을 열고 나가는 내 손을 다짜고짜 잡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그 아이.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어딜 좀 가자며 내 손을 잡아끈다. 무작정 그 아이의 손에 이끌려 버스를 탔고, 어디에선가 내렸다. 그리고 문득 들어간 곳은 다름 아닌 어딘지 모를 동네 후미진 곳에 있는 노래방이었다. 그 아이가 이끄는 대로 노래방의 작은 을 열고 들어가니, 또래 남자아이 두셋이 한창 노래를 부르던 중이었고, 그 아이는 다짜고짜 친구들이 부르던 노래를 다 끊고 자기가 부르고 싶은 곡을 시작했다.



  서지원의 노래다. 서지원. 우리에게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그 푸르메의 또 다른 이름. 이미라 작가의 순정만화 ‘인어공주를 위하여’에 등장하는 그 멋진 푸르메, 또는 서지원. 이 가수가 서지원이라는 이름으로 데뷔를 했을 때 우리는 모두 분개했었다. 감히 우리 푸르메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다니. 만찢남처럼 생긴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우리의 푸르메, 서지원인데. 그 정도로 그 시절 ‘인어공주를 위하여’의 인기는 대단했었다. 어릴 적 헤어진 푸르메를, 전학 간 학교에서 서지원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이슬비, 그 둘의 풋풋하고 가슴 시린 사랑이야기. 얼마나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는지 모른다. 이 만화 주인공을 전혀 염두 해 두지 않고 활동명을 서지원이라 짓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엔 푸르메를 사랑하는 우리들 모두를 한 번에 매수하려는 수작이 아니냐며 가수 서지원을 미워했고, 어쩌면 이것도 지금으로 치면 노이즈 마케팅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자주 서지원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고, 그의 노래를 듣게 되고,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그의 매력에 빠져 버리게 되었으니까. 어쨌거나 가수는 외모도 이름도 그 무엇도 아닌, 음악으로서 인정받는 것이 우선일 텐데, 가수 서지원의 노래가, 그의 음색이 너무 좋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었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그래서 더 아련하고 아름다운 그 서지원의 노래를
그 아이가 나를 위해 불러주었다.
네가 그리워,라고.
 

  그 먼 곳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이 노래 딱 한곡 불러주고 다시 나를 독서실로 데려다준 그 아이. 친구들에게 나를 보여주고 싶었고,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고, 나와 함께 있고 싶었고, 하지만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이 불안한 나의 시간을 오래 빼앗을 수 없었던 그 아이의 배려와 따뜻함과 사랑스러움에, 나는 이 노래를, 그 아이를 잊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서지원의 노래를 참 많이도 들었다. 그가 떠난 후 발표된 2집을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며, 슬퍼하며 오래도록 들었다. ‘작별 의식’이라는 곡 하나로 많은 이들에게 깊이 각인된 베이시스, 그 베이시스의 정재형이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작곡한 곡이 ‘내 눈물 모아’라는 걸 알고 나니 어쩐지 정재형도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지원이 떠났을 때 얼마나 놀라고 마음 아팠을까.
 


  그 아이가 나를 위해 불러주었던 I MISS YOU라는 곡은 사실 강수지가 부른 것이 원곡이다. 강수지의 4집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이오공감으로 유명한 오태호가 작사/작곡했다고 한다. 서지원의 2집에서 이 곡을 들은 이후 강수지 버전, 서지원 버전 둘 다 참 많이도 들었다. 강수지라는 가수가 나에게 특별한 이유는 나의 윤상 씨가 – 유일하게 내가 존칭을 붙여서 부르는 내 가수. 언젠가 윤상 씨의 음악에 대해서 얘기할 기회도 있을 것이다. - 1, 2집을 프로듀싱 한 인연 때문이고, 그녀가 맑고 고운 목소리로 부른 I MISS YOU 역시 서지원의 리메이크 곡 이상으로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잠시의 일탈 이후 독서실로 돌아온 나는, 코앞으로 다가온 중간고사를 위해 열심히 공부를 했었을까? 아니면 돌연 내 앞에 나타난, 실은 내가 더 만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있었던 그 아이 생각에 남은 하루를 망쳐 버렸을까?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봄날의 쌀쌀한 저녁과 성당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과 손때 묻은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듣던 음성 메시지와 나를 위해 노래하던 그 아이의 목소리, 그리고 떨리는 가슴 부여잡고 독서실에 앉아 있던 소녀가 생각날 뿐이다.



한 편의 뮤직비디오 영상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날은,
언제까지나 이 노래와 함께 기억될 것이다.




P.S.

그리고... 아름다운 사연과는 무관하게 이 글의 끝이 슬픈 이유는, 그 아이 덕분에 (때문에?) 나는 망했다는 거다. 그 아이를 알고 난 후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의 레벨이 확 떨어져 버렸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아이를 알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그건 결코 그렇지 않다. 내 가슴속에 그 아이도 있고, 서지원도 있기에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추억할 때 나는 행복하다. 그러면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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