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다. 확실히 말하면 지금 내 이야기가 아니다. '살아온 나'들의 이야기라고 해야겠다. 나는 과거를 사는 아이였다. 과거에 머물러 나 스스로를 가두고 그 안에 안전한 성을 만들었다. 우울증인지 모르고 한 없는 어둠에 침몰되던 날이면 침대로 하염없이 가라앉곤 했다. 커튼 빛을 차단하고 눈을 감으면 펼쳐지는 보이는 또 다른 세상. 현실보다 더 생생했던 그곳에서 나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앞에 나타나는 어린아이에게 묻고 또 물었다.
괜찮냐고. 이제는 괜찮냐고.
그 물음에 소녀는 언제나 딴짓을 했다. 정원의 꽃을 따거나, 노래를 불렀다. 소녀는 그곳이 가장 안전하고 좋다고 했지만 세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누군가를 기다렸고, 바닷가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 이야기는 스스로를 고립시켰지만 미치도록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고 싶었던 내 내면 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어린 소녀가 사랑하는 소년을 만나 상처를 치유해가는 연애이야기이기도 하다.
내면 아이의 치유에 관한 책을 읽고 심리 상담 선생님에게 질문했다.
"내면 아이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은가요?"
"흔하지는 않아요. 그쪽으로 예민하게 발달했을 수도 있고요. 그 상처가 너무 커서 이미지로 나타날 수도 있지요."
나는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상상을 이미지화하는 일이 발달 된 듯 하기는 했다. 별로 맘에 들지는 않았다. 너무 생생한 기억, 꼬리에 꼬리를 물로 이어지는 상상은 이미 끝난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무서웠다. 내가 정신이 이상한가? 그 아이는 처음에는 혼자였고 조금씩이지만 자라고 있었다. 어느 길에서는 방황하는 청소년으로, 어느 순간에는 아가씨가 되어 서로에게 말을 걸고, 길을 묻고, 경계하다 함께 걷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모두 나 인 것을 알았다. 하나로 통합되기를 바랐지만 그 아이들은 자신이 겪은 상처들이 가장 아프다며 고집스럽게 자신을 주장했다.
그 존재들을 존중하고 돌보면서 나는 이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이제 그 이야기를 글로 써보려고 한다. 내 안의 어린아이를 돌보고 성장시키고 미로 같은 길을 빠져나왔던 이야기를 최대한 자세하게 풀어내려 한다. 어딘가 자기만의 세상에 숨어있는 누군가에게 닿기를 기도하면서. 그 안은 안전한 듯 보이지만 외롭고 아프다. 열망하고 갈증이 난다. 그 안에 있는 동안 현재의 나마저 망가질 수 있다. 그러니 빠져나오라고. 현재를 살라고. 과거의 너는 지금의 너와 다르니 현재의 너를 가꾸며 살라고 말해줘야 한다. 아직 살 날이 많이 남아있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 당신을 아끼는 사람들, 당신이 지켜야 할 사람들이 곁에 있다고.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집중해 과거의 허상이 아닌 현재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라고.
이 사실을 늦게 깨달아 딸을 잃을 뻔했다. 내면 아이를 잘 키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과거에 매여있었고, 그 사이 외롭고 힘들었던 딸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런 극적인 처방으로 현실감각을 깨닫는 경험은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또 하나의 당신을 가두는 트라우마를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당신은 충분히 이길 수 있고, 현재의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내가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사랑이었다. 나를 내게 허락된 사랑할 수 있는 기회였다. 딸은 살았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과거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버릴 수 있었다. 버려야만 했다. 주먹을 꽉 지고 움켜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면서 그토록 감추고 싶던 수치심, 자존심이 손가락 사이로 하찮게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드디어 힘을 잃었다. 사람들에게 꺼내 보이는 일이 쉬워졌다. <내면 아이와 유리 정원 >은 처음 내면아이를 만나고 세상으로의 여행을 시작하기까지의 이야기다.
트라우마는 예상치 못한 자극을 만나 발화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내가 놓았다기보다는 더 강한 (긍정이든 부정이든) 감정으로 내 본능은 재조정된 것이 분명했다. 여전히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그 상처의 기억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다. 그러니 용기를 내기 바란다. 더 소중한 것을 위해.
내 상처의 이야기를 꺼내고 나니 사람들의 숨겨둔 상처를 만나는 일이 많아졌다. 자신의 상처를 조금은 가볍게 툭 던진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꺼내니 그들도 조금은 가볍게 툭 꺼내어 본다. 물론 절대 가볍지 않다. 무거운 추를 달고 아주 조금 그 모서리를 내보이는 정도일 테니까. 그 뒤에 숨겨진 오랜 시간 겹겹이 쌓인 상처를 누가 감히 다 알 수 있을까. 자신조차 알 수 없는(누군가는 너무 큰 충경으로 기억을 삭제하거나 굴절이 되어버리기도 한) 기억들은 모든 삶에 영향을 준다. 좋든 싫든 지금의 나를 만드는 가장 큰 역할을 했을 중요한 사건이다. 벗어나고 싶어도 큰 돌덩이 같아서 도저히 치울 수 없을 것 같은 그 일을 다른 사람이 가볍게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더 꺼내놓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뭐 그 정도로 그러냐고. 이렇게 해보라고.' 다른 사람에게는 별일 아닌데 나만 바보처럼 놓지 못하는 것 같은 2차 피해를 당하고 나면 그 상처는 더 겹겹이 쌓여 깊이 숨어 들어간다.
타인의 상처를 이해한다고도 함부로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상처를 되풀이해서 말하는 이유는 자신 스스로를 이해해보려는 노력일 수 있다. 그러니 급하게 해결책을 내놓을 필요도 없고, 과장된 파이팅을 외칠 필요도 없다. '너도 많이 아팠구나. 나도 이런 일이 있었어.' 상처의 기억들을 함께 나누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당신의 상처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대신, 내 속에 유리 정원을 만들고 살았던 내면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이런 생각 정도면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맞다.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다. 정말 아프다. 너무 아파서 외면해 버리고 꾹꾹 눌러버리는 그 마음. 그럼에도 빗방울 하나에 바르르 떨리는 그 마음 한 조각씩 꺼내어 보길 바란다. 이 이야기를 따라 내 손을 붙잡고 함께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 나오기를 바란다. 그 세상은 생각보다 안전하고, 당신은 강하며, 다시 어려움이 와도 이길 힘이 있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경험해봐야 아는 일이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 다시 당신을 지켜내기 바란다. 소중한 당신과 당신의 사람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