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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리스러브 이유미 Oct 24. 2021

1. 내면아이를 만나다

유리 소녀의 정원

"소녀야. 일어나 봐. 정신이 드니?"

"너는 누구야?"

"나는 숲이야."

"여긴 어디지?"

"나지. 네가 상처투성이로 쓰러져 있어서 나에게 데리고 왔어. 

네가 안전하다고 느낄 때까지 여기 있어도 좋아."



소녀는 이곳이 꽤 안전해 보였다. 숲의 목소리는 빛처럼 따뜻했다. 연둣빛 잔디는 폭신했다. 동그란 모양의 잔디밭을 소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싸고, 그 뒤로 메타세콰이아 나무가 높은 벽을 만들었다. 잔디는 넓었지만 눈을 돌리면 한눈에 들어오는 안전하게 적당한 크기였다.

멀리서 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폭포가 있는 걸까. 숲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은 깜깜해서 무서웠지만 소리의 정체를 아는 것은 이곳에 계속 머무를 것 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중요한 일이었다. 겹겹이 쌓인 나무 사이를 지날 때마다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마지막 나무를 지나 발을 내디뎠을 때 하마터면 소녀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바다였다. 그 바다와 소녀 사이에는 아찔한 절벽이 있었다. '이 길로는 사람이 올라올 수 없겠는걸. 아무도 여기 사람이 살 거라고는 생각 못할 거야.' 갑자기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소녀는 이곳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소녀는 절벽 가까이로 몇 걸음 더 움직여 보드라운 풀이끼가 자란 평평한 땅에 웅크리고 앉았다. 멀리 보이는 바다를 보고 있자니 파도가 삼킬 것 같았지만, 파도도 저 높은 절벽은 타고 오르지 못했다. 파도가 거칠게 날아올라 흩어지고 작은 파도는 더 큰 파도에 잡아먹혔다. 바다도 별 수 없군. 그래도 쉼 없이 움직이는 바다를 멀리서 지켜보는 건 흡족했다.

바다가 익숙해지자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얀색 민소매 원피스는 무릎길이에서 퍼져 흔들리고, 자그마한 발은 갓 구운 찐빵같이 보드라워 보였다. 맨발로 여기까지 온 걸까.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카락이 어깨를 간지럽혔다. 여기 왜 있는 걸까. 이 아이는 다섯 살쯤. '숲에게 물어봐야겠어’     


"숲아~."

"나는 이렇게 어리지 않아. 나는 이미 다 커 벼렸는 걸"

"너의 어린아이 모습일 거야. 이곳에 오는 아이들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단다."

"너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니?"

"응. 나는 네 생각, 기억, 마음 모든 걸 알고 있지."

"나는 숲이 무서워. 12살 때부터 나는 숲이 무서워졌어.”

“알아. 나도 많이 아팠어. 꼭 기억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때 생각을 하니 뒷목이 서늘하고 가슴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토할 거 같았다. 내 잘못이 아니라니. 나는 아무 반항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던 내가 수치스러웠다. 쓸모없고 더러웠다.

“너는 위험하지 않니?"

"나는 위험하지 않아. 숲은 언제나 안전하단다. 사람의 욕심이 위험할 뿐이지."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어. 여기서 살아도 돼?"

"응. 그렇지만 네가 안전하다고 느끼면 언제든 돌아가도 좋아. 네가 원하며 언제든 네가 사는 세상을 볼 수 있어. 하지만 그들은 널 볼 수 없지. 여긴 네 마음 안에 있거든."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이야. 나는 집이 필요해. 유리로 만들면 좋겠어. 단단한 유리. 누가 오는지 무엇을 하는지 집 안에서 지켜볼 거야. 그러면 위험한 일이 생길 때 언제든 알 수 있겠지."


숲은 소녀에게 유리 집을 선물해주었다. 3층 정도 높이의 천장이 높은 새장 모양이었다. 소녀는 그 집이 좋았다. 언젠가 동생과 함께 갔던 캐나다 토론토의 카사로마 대 저택이 생각났다. 다들 화려한 저택에 반했지만 나는 미녀와 야수가 살 것 같은 정원에 반했다. 그 후 언제나 나만의 정원을 갖기를 꿈꾸었다. 내 정원을 만들 거야. 소녀는 꽃씨를 심기 시작했다. 장미, 리시안셔스, 라너큘너스. 보라색 꽃을 빼놓을 수 없지. 라벤더 씨앗을 대지에 뿌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치마의 리듬을 따라 라벤더 씨앗은 멀리 퍼졌다. 싹이 나고, 잎이 열리고, 꽃이 한 송이씩 필 때마다 소녀는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뻗어 보라색 꽃밭을 손끝으로 쓸며 뛰면 바람에 실려 들어오는 라벤더향이 부푼 가슴을 꽉 채운다. 몸에서 라벤더 향이 난다. 라벤더 밭을 거닐다 작은 길을 발견했다.     


"숲아. 저 길은 뭐지."

"세상과 연결되는 길이야."

"여기서 너는 언제나 소녀지만 용기를 내서 저 길을 간다면 너는 자랄 거고 진짜 너와 만나게 될 거야."

"진짜 나를 만나면 행복할까."

"그건 너에게 달렸지."

"그런 날이 올까. 나는 여기가 좋아."         


  



12살. 아빠는 집에 자주 안 들어왔다. 엄마는 매일 술을 마셨고, 그러다 어느 날 집을 나갔다. 뒷산에 갔다가 어느 낯선 남자의 호기심에 몸이 더러워졌고, 씻어도 씻어도 남아있는 기분 나쁜 느낌은 여성이 아닌 모든 것들을 거부하게 했다. 남자라는 성과 마주칠 때마다 소름 끼치는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엄마도 아빠도 집에 없었고, 혼자 감당했던 정체 모를 감정들은 정리할 틈도 없이 어떤 것은 흘러가고, 어떤 것은 내 속에 욱여넣었다. 수치심, 모멸감, 자괴감, 두려움, 불안 모든 어두운 감정들이 내 안에 자리를 못 잡고 쑤셔 넣어 피를 타고 온 몸을 도는 거 같았다. 그러다 기묘한 자극에 분노로 변했다. 벌어진 상처로 피가 솟아나는 것처럼, 미친 듯이 화가 뿜어져 나왔지만 안으로의 외침일 뿐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분노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눈물로 녹아내렸다. 화장실로 갔다. 단칸방에서 안전하게 울 곳은 없었다.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으면 터질 것 같은 심장이 진정이 되었다. 냄새가 났지만 수컷의 음흉한 냄새보다는 견딜만했다. 더러운 새끼들. (지금은 욕이라도 하는데. 그때는 그 조차도 무서웠다.) 모든 남자를 경멸했고 저주했다. 길에서 마주치는 걸음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고, 나와의 거리를 좁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는 게 싫어서 안경을 쓰지 않았고 사람들과 고립되어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갔다. 점점 우울해졌고 예민해졌다. 나는 늘 히스테리컬 했고, 비판적이었고, 화를 내다 울다 이내 우울했다. 사람을 분석했고, 한참을 떨어져서 면밀히 관찰했다. 그런 내게 유리 집은 가장 안전하게 세상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이따금 그리움을 담아 시를 적었다.          



맨발로 걸었다.

피할 곳이 필요했다.

나만의 정원을 만들었다.

길목에 앉아 먼 길을 바라본다. 

누군가 신발을 들고 찾아와 주길. 




수치심과 외로움

슬픔의 가장 깊은 핵심감정은 수치심 중독과 외로움이다. 우리는 부모가 우리르 버린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있다. 우리가 뭔가 잘못되었다고, 마치 더럽혀진 것처럼 느낀다. 이러한 수치심은 우리를 외로움으로 이끈다. 우리의 내면아이는 결함이 있고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시로 만들어진 거짓자아로 참자아를 덮어버리려고 한다. 그리고는 거짓자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결국 참자아는 혼자 남겨져 고립되어 버린다.  -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129p 


 내면아이와의 만남

내면아이와의 만남-누군가 자기를 위해 있어주고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가 알게 되는 것-은 아이에게 기쁨과 즉각적인 안심을 준다. 슬픔을 쏟아 내는 애도의 시간이 실제로 얼마나 걸리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슬픔의 과정이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정확히 말할 수 없다. 다만 당신의 방어기제를 어떻게 버려야 할지를 아는 것이 해결의 열쇠다. 사실 방어기제에서 계속 벗어나 있을 수는 없다. 당신의 애도작업을 하기에 안전하지 않은 사람들과 장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때때로 안전한 환경이 필요하다. 상처 받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이를 치유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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