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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Dec 30. 2022

땅 - 샴스(1)

사랑의 규칙 40가지 - 번역 (8)

제1부. 땅  

단단하지만 모든 것을 흡수하면서도 여전한 것  


 

샴스  


사마르칸트 외곽의 여관, 1242년 3월  


여기저기 갈라진 나무 탁자 위에 놓인 밀랍 양초가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오늘 저녁 내게 나타난 환상은 매우 선명했다.  


큰 저택 안에 노란 장미가 가득 피어있는 뜰이 있고 그 뜰 한가운데에는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물이 차오르는 우물이 있었다. 고요한 늦가을의 밤, 하늘엔 보름달이 떠 있었다. 멀리 뒤편에서는 몇몇 야행성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중년의 남자가 집에서 나왔다. 온화한 얼굴과 넓은 어깨 그리고 연한 갈색의 깊은 눈빛을 지닌 그는 나를 찾기 시작한다.  

“샴스, 샴스, 어디 있어?” 그는 사방에 소리쳐 나를 불렀다.  

강한 바람이 불어오고 달은 이제 곧 벌어질 일을 목격하고 싶지 않다는 듯 구름 뒤에 숨었다. 부엉이는 소리를 멈추고 박쥐들도 날갯짓을 접었다. 심지어 집안의 난로도 불꽃을 틔우지 않았다. 완벽한 정적이 세상을 덮었다.  

그 남자는 천천히 우물로 다가가 몸을 구부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샴스, 내 소중한 사람.” 그가 속삭였다. “거기 있는 거야?”

나는 입을 열어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남자는 몸을 더 기울여 우물 속 깊은 곳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처음엔 암흑처럼 어두운 물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저 깊은 우물 바닥에서 나의 손이 물 위에 떠올라 마치 사나운 폭풍에 찢긴 뗏목처럼 방향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것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곧이어 그는 나의 눈을 알아보았다. 이제 막 짙은 구름을 벗어난 보름달이 비추어 두 개의 검은 보석처럼 빛나는 나의 눈을. 내 눈은 마치 이 살인을 하늘이 증언해주기를 기다리는 듯 달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 남자는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그놈들이 그를 죽였어! 그놈들이 나의 샴을 죽였어!” 그는 절규했다.  

바로 그때 수풀 뒤에서 한 그림자가 후다닥 튀어나와 허둥대다 들고양이처럼 빠르게 담을 넘어 사라졌다. 그 남자는 킬러를 알아채지 못했다. 몰아치는 고통에 사로잡혀 울부짖고 울부짖고 그의 목소리가 유리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져 그 날카로운 파편들이 그 밤을 갈기갈기 찢을 때까지 울부짖었다.  


“뭐 하는 작자야? 왜 미치광이처럼 소리를 질러?”

“...”

“당장 조용히 안 하면 걷어차서 내쫓아버리겠어.”

“...”

“조용히 하라고! 내 말 안 들려? 그만해!”

바로 옆에서 위협적으로 쾅쾅거리며 말하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환상 속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어서 그 남자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내 죽음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환상 속에 있던 그 남자의 슬픈 눈을 가까이 보고 싶었다. 그는 누구일까? 나와는 어떤 관계이기에  가을밤에 나를 그토록 애타고 찾고 있었을까?            

하지만 내가 환상 속으로 한번 더 들어가려는 찰나, 누군가 내 팔을 잡고 이빨이 부딪힐 정도로 흔들어대는 통에 나는 현실로 끌려오고 말았다.  

마지못해 천천히 눈을 뜬 나는 내 곁에 서 있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키가 크고 몸집이 거대한데 턱수염은 하얗고 콧수염은 두꺼우며 끝을 말아서 뾰족하게 만들어놓았다. 나는 그가 여관 주인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그를 보자마자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겐 늘 거친 말투와 폭력으로 사람들을 겁주는 게 일이라는 것과 그런 그가 지금 매우 화가 나 있다는 것이었다.  

“왜 그러시는 거죠?” 내가 물었다. “왜 내 팔을 잡고 있는 겁니까?”

“내가 왜 이러냐고?” 주인이 나를 노려보며 을러댔다. “조용히 하라는 거야. 소리 지르지 말라고! 당신이 우리 손님들을 겁주고 있잖아.”      

“정말이요? 제가... 소리를 질렀습니까?” 나는 웅얼거리며 겨우 그의 손아귀에서 팔을 빼냈다.   

“지르다마다! 발바닥에 가시 박힌 곰처럼 비명을 질렀다구.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저녁 먹다 말고 갑자기 졸았어? 꼭 악몽을 꾸는 거 같던데.”   

악몽이라고 하면 그럴듯한 설명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주인은 만족할 것이고 평화롭게 나를 내버려 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말했다. “아닙니다, 형제님. 나는 잠을 잔 것도 아니고 꿈을 꾼 것도 아니에요. 사실 전 꿈은 전혀 꾸지 않아요.”

“그럼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쳤던 거야?” 주인이 궁금해했다.  

“환상을 봤어요. 그건 꿈과는 다른 거죠.”

주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콧수염 끝을 돌돌 말았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당신네 데르비시들은 식료품점에 갇힌 쥐새끼들처럼 미쳤어. 특히 당신같이 방랑하는 데르비시는 더 그렇지. 하루 종일 푹푹 찌는 태양 아래서 쫄쫄 굶으면서 기도하고 걸어 다니잖아. 머리통이 햇빛에 튀겨질 지경인데 헛것이 보이는 것도 당연하지!”  

나는 웃었다.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스스로 정신줄을 놓는 것과 신에게 버림받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도 있다.    

식당에서 시중드는 소년 둘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왔다. 그 위엔 구운 염소고기, 염장해서 말린 생선, 향신료에 재운 양고기, 밀전병, 미트볼과 병아리콩, 양고기 꼬리 기름을 넣고 푹 삶은 렌틸콩 수프가 가득 놓여있었다. 두 소년이 음식들을 손님들의 식탁에 두루두루 놓아주면서 그윽한 양파향과 구수한 마늘향, 그리고 각종 향신료 냄새가 퍼져나갔다. 그 쟁반이 내 식탁 앞에 멈추자 나는 뜨거운 수프 한 그릇과 검은 빵 하나만을 골랐다.  

“그거 먹을 돈은 있는 거요?” 주인이 거들먹거리듯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아니요. 없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음식에 상응한 보답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음식과 잘 곳을 주시면 제가 당신의 꿈을 해석해 드리죠.”  

그랬더니 주인은 양팔을 벌리고 손을 허리에 댄 자세로 콧방귀를 뀌었다. “당신 좀 전에 꿈을 전혀 안 꾼다고 말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저는 꿈 해석가죠. 꿈 해석가는 남의 꿈을 해석하지 자기 자신은 꿈을 꾸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당신을 여기서 내보내야겠어. 다시 말하지만 당신네들 데브리시는 돌았어.”  

주인은 이렇게 내뱉었다.

"내가 충고 하나 하지. 당신 몇 살인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속세와 천국 둘다를 위해서 기도 꽤나 했겠지. 그럼 이제 좋은 여자 찾아서 정착하쇼, 아이도 낳고. 그래야 발을 땅에 붙이고 살 수 있어. 도대체 왜 세상을 방랑하고 다니는 거요? 어딜 가봐야 똑같이 다 비참한 꼴인데. 내 말 들으쇼. 아무리 다녀봐야 신통한 거 없수다. 우리 손님들 중엔 세상 끝에서 온 사람도 있지만, 술 몇 잔만 들어가면 늘어놓는 얘기는 죄다 똑같아. 세상 어디에서나 인간들은 다 똑같아. 먹는 것도 거기서 거기, 노는 것도 거기서 거기, 똥 싸는 것도 거기서 거기라구."

"저는 새로운 걸 찾아다니는 게 아닙니다. 저는 신을 찾고 있어요." 내가 말했다. "제가 이 세상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은 신입니다."

"그렇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어." 그가 비꼬았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무거워졌다. "신은 이 땅을 버리고 떠났어! 신이 다시 돌아올 거 같아?"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신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건 자기 자신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여관주인의 입가는 쓰디쓴 미소로 뒤틀어졌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마치 어린아이가 받은 상처와 같은 아픔과 억울함을 보았다.

"신의 말씀 중에 '나는 네 목에 경정맥보다 더 너에게 가깝다'는 말 들어보셨나요?" 내가 물었다. "신은 멀리 저 하늘 위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각 사람 안에 계십니다. 이게 바로 신이 결코 우리를 버릴 수 없는 이유죠.  어떻게 내가 나 자신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버렸어. 신은 인간을 버렸다구." 그는 차갑고 반항적인 눈빛으로 단언했다.
"만일 신이 이 세상에 있는데 우리가 벼랑 끝에 몰려서 죽을 지경으로 고통받고 있는 걸 보면서도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있는 거라면, 그걸 신이라고 할 수 있어?"

"첫 번째 계명은 이렇습니다, 형제님." 내가 말했다. "내가 바라보는 신의 모습은 바로 나 자신이다. 만일 내가 신을 두려워하며 나를 꾸짖는 존재로 여긴다면 그것은 나의 내면에 두려움과 죄책감이 가득하다는 뜻이다. 만일 신이 나에게 한없는 사랑과 연민을 주는 존재라면 나 자신도 그러한 존재다."

여관주인은 즉각적으로 반대했지만, 내 말에 그가 놀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게 그럼 결국 신이란 건 상상의 산물이라는 말과 뭐가 다르다는 거요? 난 모르겠구만."

내가 막 대답하려고 할 때, 식당 뒤편에서 난동이 일어났다.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거칠게 생긴 두 남자가 엉망으로 취해서 마구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무법자 행세를 하며 다른 손님들의 음식을 빼앗아 먹고 남의 컵에 든 음료수를 함부로 마셔대고 있었다. 못된 애들을 다루듯이 그들을 혼내줄 사람이 필요했다.

 "누군가 저 개망나니들에게 쓴 맛을 보여줘야겠군, 그렇지 않소?" 여관주인이 이를 악물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잘 보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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