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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Jan 01. 2023

땅 - 엘라(1)

사랑의 규칙 40가지 - 번역 (10)

 노쓰햄튼, 2008년 5월 18일


엘라는 <달콤한 신성모독>을 읽다가 기진맥진하여 잠시 멈추었다.  전날 딸 자넷, 그리고 남편과 있었던 불화가 남긴 긴장감이 여전히 턱끝까지 차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펄펄 끓고 있는 무쇠솥뚜껑이 갑자기 열리면서 솟구친 뜨거운 김 속에서 오래된 갈등과 새로운 분노에 화상을 입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불행하게도 그 뚜껑을 연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엘라 자신이었다. 자넷의 남자친구인 스콧에게 딸과 결혼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려 전화를 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났을 때 그녀는 이 전화 통화를 하면서 주장했던 것들을 전부 다 깊이 후회할 게 틀림없었지만, 오월의 바로 이 날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너무나도 확신에 차 있어서 무슨 수를 다 해도 자기가 하려는 일의 끔찍한 결과를 헤아릴 수 없었다.

"여보세요? 안녕, 스콧. 나 자넷 엄마, 엘라야." 그녀는 딸의 남자친구에게 전화하는 것쯤은 아주 일상적인 일이라는 듯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통화 좀 할 수 있을까, 우리?"

"아, 안녕하세요, 자넷 어머님. 무슨... 말씀이신데요?" 스콧은 약간 놀란 듯 말을 더듬었지만 예의 바르게 응대했다.

그에 못지않게 예의 바른 어조로 엘라는, 스콧에게 나쁜 감정이라곤 전혀 없지만, 그가 자넷과 결혼을 하기엔 나이가 너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이런 전화를 받고 그가 기분 나빠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엘라는 이렇게 덧붙였다. 언젠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스콧이 그녀의 말을 다 이해할 때가 올 것이고 오히려 그녀가 적절한 때에 충고해 준 것을 고마워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면서, 그때까지 이 결혼 얘기는 없던 걸로 해달라고, 그리고 지금 이 전화 통화는 비밀로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무겁고 심각한 침묵이 흘렀다.

"자넷 어머님, 어머님께서 이해를 잘 못하시는 것 같은데요..." 마침내 입을 열어 스콧이 이렇게 말했다. "자넷과 저는 서로 사랑합니다."

맙소사, 또다시 사랑 타령이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게 사랑만 있으면 천국문이 열릴 거라는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가질 수가 있는 걸까? 그들은 사랑이란 마치 뾰로롱 휘두르기만 하면 인생의 온갖 문제들이 다 해결되는 마법 지팡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엘라는 자기 생각을 그대로 말하진 않았다. "스콧, 네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아. 정말이야, 나 네 감정 이해해. 하지만 너는 지금 너무 젊고 인생은 길어. 누가 아니? 네가 당장 내일이라도 다른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게 될지?"

"자넷 어머님, 버릇없이 굴려는 건 아닌데요, 그게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머님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누가 알겠어요? 어머님께서 당장 내일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게 되실지."   

엘라는 깔깔대고 웃었다. 의도한 것보다 더 크게 오래 웃었다.

"나는 결혼한 여자야. 나는 내 생애를 다 걸고 선택을 했어. 내 남편 또한 그런 선택을 한 거고. 그래, 이게 바로 내가 말하고 싶은 핵심이야. 결혼이란 건 정말 여러모로 따져보고 깊이 고민하면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중요한 결정이야."

"그러니까 어머님 말씀은, 제가 혹시라도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어떤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따님과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건가요?" 스콧이 항의했다.

대화는 여기서부터 악화되어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서 실망만 안겨주었다. 마침내 전화를 끊고 나서 엘라는 주방으로 갔다. 그녀가 정서적으로 불안할 때마다 늘 해오던 일, 즉 요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반시간쯤 지나서 엘라는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당신이 스콧한테 전화해서 우리 딸하고 결혼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게 사실이야? 정말 그랬어? 당신이 정말 그런 짓을 한 거야?"

엘라는 기가 막혔다. "아... 말이 이렇게 빨리 돌았어? 여보, 내가 다 설명할게."

하지만 데이빗은 단호하게 쳐냈다. "설명할 거 없어. 당신이 다 잘못한 거야, 그냥! 스콧이 자넷한테 말했고 자넷은 지금 극도로 화가 나있어. 당신을 안 보겠대." 그는 말을 잠시 멈췄다. "그런데 내가 걔를 나무랄 수가 없어."

그날 저녁 집에 들어오지 않은 건 자넷뿐만이 아니었다. 데이빗은 엘라에게 문자 메시지로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고 알렸다. 급하다는 그 일이 뭔지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평소의 남편답지 않았고, 결혼의 정신에도 위배되는 일이었다. 그는 이 여자에서 저 여자로 바꿔가며 선물도 사주고 섹스도 하면서 바람을 피웠을지언정, 매일 저녁이면 반드시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었다. 엘라와 데이빗 사이에 균열이 아무리 깊었어도, 엘라는 남편을 위해 요리했고, 데이빗은 아내의 요리를 먹었다. 아내가 접시에 담아주는 음식이 무엇이건 간에 무조건 맛있게 고마운 마음으로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잘 먹었다는 인사를, 진심에서 우러난 고맙다는 인사를 단 한 번도 빠트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엘라 역시 매번 그 인사를 남편이 저지르는 외도에 대한 사과로 해석했다. 그렇게 그녀는 남편을 용서했다. 늘 그래왔다.

남편이 이처럼 뻔뻔스럽게 행동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된 건 내 잘못이라고 엘라는 자기 자신을 탓했다. 또다시 엘라의 주특기인 "죄책감"이 등장한 것이다.


쌍둥이들과 같이 식탁에 앉았을 때, 엘라의 죄책감은 우울함으로 바뀌었다. 에비는 피자를 시켜달라고 졸랐고 올리는 아무것도 안 먹겠다고 튕겼지만 엘라는 어느 쪽도 허락하지 않았고, 껍질콩과 겨자 소스를 발라 구운 소고기를 올린 현미밥을 주고는 천천히 꼭꼭 씹어 먹게 했다. 이렇듯 겉으로는 손수 아이들을 챙기며 걱정하는 한결같은 엄마의 모습이었지만, 속에서는 절망이 꾸역꾸역 차올라 담즙이 역류한 것처럼 쓰고 신 맛이 그녀의 입안을 채우고 있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부엌에 혼자 남은 엘라는 여전히 무겁고 불안한 우울 속에 잠겨 있었다. 문득 남은 음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몇 시간씩 들여서 정성스럽게 요리한 그 음식들은 하나도 특별할 게 없어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시시하고 하찮은 것들로 보였다. 엘라는 스스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거의 마흔이 되어서야 자신의 인생이 뭔가 잘못되어 있음을 알게 되다니 너무도 불쌍했다. 그녀는 사랑을 주고 싶어 안달을 했지만 그런 사랑을 달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엘라의 생각은 <달콤한 신성모독>으로 흘러갔다. 그녀는 타브리즈의 샴스라는 인물에게 흥미를 느꼈다.

"내 주변에 샴스 같은 사람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녀는 혼자 실없는 말을 했다. "그런 사람하고 같이 있다면 절대 지루할 틈이 없겠지."

그러더니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마음속에 어떤 한 남자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키가 크고 피부는 거무스름한데 가죽바지와 모터사이클 재킷을 입고서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를 한 신비스러운 남자다.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빨간색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있는데 핸들바에는 색색깔의 태슬이 달려있다. 그녀는 이 상상의 이미지에 웃음이 났다. 잘 생기고 섹시한 모습으로 모터사이클을 타고 쭉 뻗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수피라니! 히치하이킹을 하다가 그런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태워준다면 정말 멋진 일일 것 같았다.  

엘라는 만일 샴스가 그녀의 손금을 본다면 어떤 얘기를 해줄지 궁금해졌다. 어째서 가끔씩 그녀의 마음이 온통 어두운 생각들로 뒤덮이고 마는지 설명해줄 수 있을까? 아니면 이렇게 여러 명의 사랑스러운 가족이 있는데도 왜 이렇게 외로운지 말해줄 수 있을까? 그녀의 아우라는 어떤 색깔일까? 밝은 색, 혹은 대담하게 짙은 색? 최근에 그녀의 삶이 밝았던 적이나 대담했던 적이 있었나? 혹은 인생을 통틀어 한 번이라도?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오븐에서 비쳐 나오는 희미한 불빛만 남아있는 식탁에 혼자 앉아서, 엘라는 비로소 자신이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사랑을 부정하는 온갖 고상한 말들을 끌어다 대면서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 놓은 채 살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랑을 원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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