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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Jan 19. 2023

땅 - 엘라(3)

사랑의 규칙 40가지 - 번역(14)

노쓰햄튼, 2008년 5월 20일 


엘라의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은 그날 밤, 그녀의 꿈속에서는 밸리댄서와 데르비시가 빙빙 돌고 있었다. 읽다 만 원고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든 그녀는 우락부락한 전사들이 길가의 여인숙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접시 위엔 맛있어 보이는 파이와 디저트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엘라는 자기 자신을 보았다. 외국의 한 성채 안에 있는 시끌벅적한 시장 안에서 그녀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녀를 온통 둘러싼 사람들의 무리는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어떤 곡조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콧수염을 늘어뜨린 한 뚱뚱한 남자를 멈춰 세우고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했는데, 무엇을 물어보려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 남자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절뚝거리며 가 버렸다. 그녀는 여러 명의 상인들과 물건 사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려고 시도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상대해주지 않았다. 처음엔 그녀가 그들의 언어를 말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입에다 손을 넣어봤을 때 혀가 잘려 나가고 없는 것을 깨닫고는 공포에 휩싸였다. 점점 그녀를 옥죄어 오는 극심한 공포에 그녀는 그녀가 그녀 자신이 맞는지를 확인하려고 거울을 찾아 마구 헤매는데 시장엔 거울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떤 소리가 잠 속으로 들어왔고, 엘라는 자기 혀가 아직 붙어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꿈에서 깨어났다. 

엘라가 눈을 떴을 때, 반려견 스피릿이 미친 듯이 뒷문을 긁고 있었다. 아마도 어떤 야생 동물이 현관으로 들어와 스피릿을 흥분시켰던 모양이다. 특히 그게 스컹크였다면 더 했을 법하다. 지난겨울 스컹크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기억이 스피릿에겐 여전히 생생했을 것이다. 엘라가 개의 몸에 밴 그 고약한 냄새를 없애느라 토마토 주스를 부은 욕조에 넣고 여러 번 씻겼는데도 고무 타는 것 같은 그 악취가 완전히 가시기까지는 몇 주가 걸렸었다. 

엘라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새벽 3시 15분 전이었다. 데이빗은 아직도 오지 않았고, 어쩌면 아예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쟈넷은 엘라가 남긴 전화 녹음에 아무런 답도 없었다. 아무래도 답이 올 것 같지 않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도 딸에게도 버림받은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엘라는 냉장고를 열고 몇 분 동안 안을 들여다보았다. 체리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덩어리 떠서 먹고 싶었지만 살찌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엘라는 재빨리 한발 물러서서 필요 이상으로 냉장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녀는 레드 와인을 한 병 따서 와인잔에 부었다. 가볍고 싱싱한 느낌으로 달콤 쌉싸름함이 강조된 좋은 와인이었다. 한 잔을 다 마시고 두 잔 째 따랐을 때 퍼뜩, 이게 혹시 데이빗이 갖고 있는 최고급 보르도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벨을 확인해 보니 샤또 마고 1996년 산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녀는 병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너무 피곤하고 너무 졸려서 더 이상 원고를 읽을 수가 없었다. 대신 이메일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대여섯 개의 스팸메일 사이에 미셸에게서 온 메시지가 있었고, 원고 작업은 잘되어가는지를 묻고 있었다. 그리고 아지즈. Z. 자하라에서 답장이 와 있었다.      


친애하는 엘라 (이렇게 불러도 될는지요...)      


보내주신 메일을 받았을 때 저는 과테말라의 모모스테낭고라는 마을에 있었습니다. 이곳은 오늘날 지구상에서 여전히 마야 달력을 사용하고 있는 몇 남지 않은 지역 중 하나입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호스텔 바로 건너편에 소원 나무가 있는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색깔과 모양으로 제각기 다른 수백 개의 천조각을 매달아 장식해 놓았지요.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마음 아픈 이들의 나무’라고 부른답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종이에 써서 가지에 묶어놓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너무 주제넘은 짓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편지를 읽고 나서 저는 그 소원 나무로 가서 당신과 당신의 딸이 서로 오해를 잘 풀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루미(Rumi)가 말했듯이, 사랑은 생명의 물이기 때문에 티끌만큼의 사랑일지라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 경험상 이제껏 살아오면서 도움이 되었던 게 하나 있는데, 내 주변 사람들을 내가 바꿀 수 없다면 간섭하지 않고 답답해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참견이나 방관 대신, 저는 승복(承服)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승복’을 ‘나약함’과 잘못 혼동하기도 하지만, 전혀 다릅니다. 승복한다는 것은 우주의 섭리를 평온하게 받아들이고 우리가 현재 바꾸거나 납득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마야달력에 따르면 오늘은 무척 상서로운 날입니다. 주요한 별들이 위치를 이동하면서 인간을 새로운 의식의 각성으로 인도해 줍니다. 그러니 해가 져서 오늘이 끝나기 전에 어서 서둘러 이 메일을 당신에게 전송해야겠군요. 

가장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가장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도 사랑을 찾으시길 바라며

진심을 담아     


아지즈      


엘라는 노트북을 덮으면서, 멀고 먼 세상의 외딴곳에서 서로 아는 것도 없는 낯선 사람이 그녀를 위해 기도해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녀의 이름이 적힌 쪽지가 소원 나무에 묶여 공중에 뜬 연처럼 자유롭고 행복하게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잠시 후에 그녀는 부엌문을 열고 뒷마당으로 나가 가볍고 시원한 산들바람을 즐겼다. 스피릿이 그녀 옆으로 와서 섰다. 불안정하게 그르릉거리면서 계속해서 킁킁 공기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개의 눈이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겁먹은 듯 커지고 두 귀는 바짝 섰다. 마치 저 멀리에 무서운 뭔가를 감지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엘라와 개는 늦봄의 달 아래 나란히 서서 끝없이 아득한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 알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하는 둘의 모습은 서로 닮아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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