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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잉오렌지 Mar 23. 2024

너 성우해도 되겠다

성우에서 배우까지

"너 성우해도 되겠다." - 학창시절 처음으로 목소리를 드러내고 반 친구에게 내가 들은 말.


"너 울어? 진짜 이별했어?" - 노래방에서 내 발라드를 들은 친구가 깔깔 웃으면서 해준 말.


"그럼 주인공은 oo이로 결정하겠습니다!" - 동아리에서 진행하는 목소리극 주인공이 나로 결정이 났을 때.


지체장애인에게 봉사하는 동아리에서 목소리극을 해야 해서 주인공을 누가 맡을지 정하기 위해, 한 명씩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연기를 진행했다.


내 차례에서 곧바로 끝났다. 나는 주인공이 울먹거리면서 말을 토해내는 대사를 연기했고, 나는 곧바로 주인공으로 낙찰되었다.



소위 말하는 감정연기. 그게 나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언제나 연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말없는 아이를 버려버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치 있는 아이였던 나는 유쾌하고 쿨한 성격으로 인해 무리의 분위기 메이커가 되었다.


그 무리에는 말없는 아이를 알고 있었던 어떤 친구도 섞여 있었다. 


그애는 원래 나와 2년동안 같은 반이었고 그 당시엔 아무런 접점도 없었지만, 고등학교에서 같은 무리가 되자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반 구석에 가만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모습을 2년동안 봐왔던 사람인데도,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날 처음 봤다는 듯이.


 

아마 그애는 내 존재를 정말 아예 몰랐거나, 아니면 눈치가 매우 빨랐을 것이다. 내가 정반대로 변한 모습을 보고, 내 변화를 도와주기 위해서 배려를 해줬던 것일 것이다. 그애는 누구나 당연히 궁금해할 만한 '너 중학교 땐 왜 아무 말도 안 했어?'라고 묻지 않았다. 내가 민망해할까봐. 그애는 착했고, 눈치도 빨랐다.



그럼에도 나는 그애가 불편했다. 함께 있는 것이 싫었다. 그애와 친해지는 게 두려웠다. 친해져서 깊은 얘기를 나누게 될 것이 두려웠다. 나는 내 과거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하기 싫었고, 완벽하게 잊고 싶었고, 내 삶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나는 내가 왜 그런 중학생 시절을 보냈는지 나 스스로도 몰랐기에 아무런 설명도 해줄 수 없었다. 그런 질문이 들어오면 어떡하지, 뭐라고 대답하지, 친해지면 자연스럽게 옛날 얘기가 나오겠지.. 등등 그런 하찮은 고민거리를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서 보냈다.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의 나의 감정엔, 변화에 성공했다는 기쁨과, 내 과거를 알고 있는 자들에 대한 애증이 반복되었다. 



애증. 맞다. 증오가 아니라 애증이었다. 왜냐하면 그애는 내가 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니까.



하지만 그애는 나의 불편하고 싫었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일종의 트리거가 되었다. 그애가 옆에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예전의 내 하찮은 모습이 떠올랐다. 싫었다.



나는 그렇게 불안과 즐거움의 경계, 괴리감 속에서 첫 고등학교 1년을 보냈다. 그후 2학년이 되어서 문과와 이과를 정하는 날이 왔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수학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에 전부 고민도 없이 문과로 향했다. 그리고 나 또한 수학과 과학을 싫어하는 흔한 여자애들 중 한 명이었다. 내 취미 또한 이과적인 것과는 거리가 다소 멀었다.


내가 친구들을 따라서 문과로 가는 건 당연했다. 그래야 친한 친구들과 같은 반이 될 수 있고, 그것뿐만이 아니어도 내가 이과 과목들에 대부분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과에 간다는 걸 고민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상황이었다. 우리 학교에선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들, 그리고 미래와 취업에 대해서 벌써부터 현실적으로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보통 이과에 갔고, 나는 딱히 모범생은 아니었다. 나는 공부하는 걸 싫어하는 흔한 학생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전부 문과로 향했던 친구들을 뒤로 하고 홀로 이과로 향했다. 나와 함께 하는 어떤 친구들도 없었고, 문과반과 이과반은 층 자체가 달라져 만나기도 어려운 구조였다. 친구들은 전부 나를 말렸다. 



하지만 나는 다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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