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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잉오렌지 Mar 24. 2024

누구나 사랑하고 싶어해 나를 빼고

나는 내 가면을 벗기 싫었으니까

고등학교 2학년. 나는 이과반으로 홀로 내려왔고,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를 사귀었다. 


이곳엔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재치 있는 아이로서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나는 반에 홀로 우두커니 친구 없이 앉아있는 애를 발견했다. 


처음엔 왜 혼자 있을까 생각을 했다. 수많은 생각을 했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해서 친구 사귀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고, 나처럼 묘한 문제가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공부를 한다거나 그런 이유가 있어서 일부러 사귀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수많은 가능성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먼저 다가갔다. 이왕 가면을 쓰기로 한 거, 아예 틈도 생기지 않을 정도로 가면을 내 얼굴에 깊게 풀칠을 해버리려고 했다. 나는 그애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름이 뭐야, 어디서 왔어, 그런 정상적인 얘기를 시도했다.



그러자 그애는 날 거부하지 않고 나의 손을 잡아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애는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낯가림이 조금 더 있을 뿐인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그후, 나는 나의 과거를 완벽하게 지워버리기로 정했다. 이상한 건 나 혼자였으니까.






2학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도 드디어 사랑이란 감정이 찾아왔다. 


내가 이과로 올라와서 새로 사귄 친구는 사랑 관련 화제에 민감한 사람이었고, 나도 자연스럽게 그런 화제가 익숙해지게 되었으며 절로 사랑에 대한 동기부여도 가지게 되었다. 그애는 예쁘다곤 할 수 없었지만 성격이 매우 호감형이었고, 쉽게 얼굴이 발개지는 귀여운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얼굴이 빨개지면 어쩌나하는 사랑스러운 고민을 하는 사람이었다.


나도, 친구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고, 서로 그 얘기를 공유하며 사랑이란 감정을 더욱 크게 키우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사랑이란 감정은 남들에게 털어넣고 설명하며 자각할수록 더욱 비대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 자신을 농담삼아 짝사랑꾼이라고 말하고 다녔고, 



고등학교 졸업 전, 우리 둘 다 고백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애는 자신이 고백하는 바로 그 순간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내게 지켜봐달라고, 너무 떨린다고 그런 얘기를 했다. 그애는 정말 솔직한 성격이어서 자신의 모든 부끄러운 점을 친구에게 드러내도 상관없어보였다. 그래서 나는 마치 스파이가 된 것처럼, 친구의 부탁으로 친구가 고백하는 곳 근처에 잠입해서 고백 광경을 엿보았다. 


내 친구는 젠틀하게 차였고, 그애는 포기하지 않겠다며 오히려 굳은 다짐을 했다. 



얼마 후 나 또한 고백을 하게 되었고, 나는 내 친구와 달리 전혀 솔직한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친구에게 고백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직접 만날 자신도 없어서 전화를 걸었다. 심지어 전화번호를 서로 공유한 사이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뭣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만 할 수 있는 패기라고 할 수 있겠다(지금도 어리지만 지금의 나에겐 패기란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당연하게도 차였고, 그순간 나에겐 슬픔과 분노와 도전 욕구보다는..



수치심만이 내 뇌를 가득 채웠다.



나는 그순간 깨달았다. 

내가 사랑했던 건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변화한 나 자신이었고, 그 남자애가 아니었다는 걸.


내가 미친 듯이 가슴이 떨렸던 건 그 남자애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말도 잘 못했던 아이가 오랜 기간의 짝사랑을 고백한다는 거대한 도전에 대한 긴장 때문이었다는걸.




나는 그 남자애를 수단으로만 간주하고 있었다. 


나는 주변에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쪽팔린 일'을 들킬까봐 안절부절해하고 있었다. 사귄 후에 대한 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디로 데이트할까? 손을 잡으면 어떤 기분일까?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말을 나눠본 적도 거의 없었고, 가끔 말을 나눌 때마다 환상이 깨져 묘하게 감정이 식는 느낌을 들었는데도, 그냥 고백했다.



나는 너무나도 어렸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생각에만 이기적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그런데도 내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는 법도 몰랐다.



나는 그때의 일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잊어버리기로 했다. 


말없는 아이, 그리고 자기수치로 가득한 고백. 


그렇게 내 일기장에만 보관해놓은 흑역사가 두 개. 나의 역린이 둘. 이 두 가지 감정적인 흑역사로 인해 나는 드디어 도전과 감추기의 조율을 해야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후부터 내가 무언가에 격렬한 감정을 쏟아붓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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