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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잉오렌지 Mar 25. 2024

나는 엄마아빠 딸이니까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잘하는 것에서 눈을 돌렸어

내가 이과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완전히 다른 곳에서 새로 시작하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부모님의 의사가 많이 개입되었기도 하다.


우리 가족은 네 명이 전부 이과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아버지는 엔지니어, 어머니는 회계, 오빠는 물리학, 그리고 나. 엄밀히 말하면 회계 자체는 이과가 아니지만 어머니가 숫자와 계산하는 것을 좋아하셔서 일단 넣었다.


그럼 나도 당연히, 엄마아빠 딸이니까. 이과적인 성향을 띠고 있겠지. 이과의 재능을 가지고 있겠지. 당연히 이과에 가야지.


그렇게 나는 내 성적과 흥미, 객관적인 데이터와 주관적인 데이터 양쪽을 싸그리 눈을 감고 무시해 그냥 이과로 갔다. 언젠가는 잘하게 되겠지. 나는 엔지니어의 피를 물려받았으니까.


완전히 개소리.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아마 진짜 어렸을 때부터. 한 네다섯살쯤부터 나는 그림을 그렸다. 그것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좀 민망한 그림들을 가득 그렸다. 그래서 내 그림 노트를 부모님께 들키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싹수가 노랬다. 여러 의미로.




노란색. 혹은 주황색. 


나의 원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색깔.



나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노란색 계통을 좋아한다고 주변에 말하고 다녔다. 실제로 좋아해보려고 노력했다(왜냐고? 나도 모른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여서 지나가는 선생님들이 날 보고 놀라기도 했다(내가 평소에 선생님들께 싹싹하게 굴고 다녀서 크게 혼나진 않았다. 우리 학교는 두발자유까진 아니었지만 비교적 규정이 자유로운 곳이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정말로 노란색, 주황색 등을 좋아하게 되었고, 내 잿빛은 서서히 둘로 나뉘어 밝은 오렌지, 그리고 잔잔한 블루로 명료화되기 시작했다.




푸른색. 영어로 하면 블루.


블루의 또다른 의미, 우울.




나는 색채에 담긴 상징적인 의미나 심리를 하나로 규정하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색깔의 느낌 차이를 탐구하는 것이 내가 나 자신의 색깔을 이해하고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내 취미가 그림 그리기였다는 것이다. 글쓰기가 아니다. 글쓰기를 좋아하게 된 건 좀 나중의 일이다. 어쨌든 나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직업으로 삼으려고 친구와 함께 고민했을 정도로 나는 한때 그림을 좋아했다. 나의 노란머리와 취미 두 가지 단서가 합쳐져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진지한 이미지보단 자유로운 예술가 이미지로 점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내가 만들어낸 가면에 속아넘어갈 정도로 내 연기는 훌륭했다. 난 그때 정말 진심으로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감히 부모님께 미술 공부를 해보겠다는 소리는 하지 못했다. 그런 소릴 하면 내쫓길 게 뻔했다.



그래서 한번 떠봤다. "내 친구가 미대에 가려고 미술학원 다닌다는데.."


어머니는 즉답했다. "미쳤구나."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후.. 나는 그림 그리는 취미를 바로 접었다. 어머니에게 빈정상해서는 아니고..


그때 현실적인 소리를 듣고 바로 내 몰입이 깨졌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그때 미술을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로 애초에 그렇게 잘하지는 않았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그림은 내 재능이 전혀 아니었다. 그렇게 많이 그렸는데도 잘 그리는 수준이 아닌 걸 보면 난 확실하게 그림에는 재능이 없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림은 그냥 수단이었다. 그 당시엔 전혀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나의 내면에 있는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사랑했다. 그 수단이 그림이었을 뿐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떠올린 무언가를 대충 끄적이고 기록해두는 걸 좋아했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어떤 좋은 작품을 감상하거나 따라그리는 건 정말 싫어했다.


내 재능은 내 영감, 내 생각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는.. 이과적인 재능과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나는 세상에서 수식과 기계, 틀에 박혀있는 공식들을 가장 싫어했으니까.




아무튼 그때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게 중요하다. 나는 그래서 적당히 납득하고 이과에서 공대에 가기 위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수험생 때는 예민하고 힘들듯이 나도 그랬다. 하지만 그나마 다른 학생들과 내가 차이가 하나 있었다면, 고등학교 3학년 때 그 누구보다 운동을 열심히 해서 최저 몸무게를 기록했다는 정도? 


내가 산책하면서 생각에 빠지는 걸 좋아해서 짧은 저녁 시간에 50분 정도 걸어서 집에 다녀오기도 했고, 보충 수업을 빼먹고 2시간 반동안 산책을 다녀오기도 했고, 우리 집이 15층이 넘지만 굳이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했고, 공부가 하기 싫어서 딴청 피우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출했다. 고3이 운동한다고 하는데 혼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는 이렇게 딴청이나 피우며, 수험생 시절을 공부나 취업에 대한 별다른 동기부여 없이 아주 설렁설렁 시키는 공부만 하면서 보냈고, 적당한 공대에 합격했다. 부모님은 기뻐하셨지만, 난 딱히 기쁘지 않았다.


들어갈 학교에 지원서를 내 손으로 쓰고 제출하는데도 체감이 되지 않았다. 남의 원서 넣는 기분이었다. 몰입이 되지 않았다. 내 심장은 아주 평온했다. 내 전공은 부모님이 정해주셨고, 지원할 대학은 담임 선생님이 정해주셨다.



나는 말을 잘 듣는 딸이었고, 말을 잘 듣는 학생이었다(비록 머리 색깔은 노랬지만). 


거기에 더해서 나는 어리기 때문에 현실을 잘 알지 못하는 막내딸이었고, 남들보다 조금은 문제가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남들보다 조금은 더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크게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고칠 점이 크지는 않아 주변에서 이상한 평가는 받지 않았지만, 성격을 조금은 스스로 고칠 필요가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래서 말을 잘 들을 필요가 있었고, 입을 다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인정받기 위해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에서부터 만족감을 느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두려웠다.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나는 내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표현할 용기가 없었다. 나는 내 얘기를 하는 것이 두려웠다. 조금이 아니라 큰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두려웠다. 두려움은 점점 심해져가고, 그 두려움은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의 내부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내 무의식 속에 담겨있었다.



언제나. 지금도.



그리고 나는 내 의지가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선택이 곧 불러올 결과를, 그때는 아직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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