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잉오렌지 Mar 26. 2024

야한 춤을 시키는 학교와 우중충한 나

나는 이 순간만큼은 시꺼매지고 싶었다

공대에 합격해서 단체 채팅방에 들어갔고, 나는 대학에 대한 첫인상을 입학하기 전부터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각인시키게 되었다. 


입학하기 1주일 전에 있는 행사인, 반드시 참가해야 하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그리고 내가 가장 처음 본 공지사항 메시지는 이거였다.




여학생들 춤 연습해야 하니 학교로 오세요.




서로의 얼굴도 모르는데 OT에서 공연할 춤 연습을 하러 대학에 가는 신입생들. 


일렬로 세워놓고 면상에 술을 뿌리며 전통이라고 예쁘게 포장하던 선배들.


행사에 참여하지 않으려면 사유서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단체로 회의실에 불려서 쌍욕을 퍼붓던 학생회.


남학생은 발가벗고 여장대회, 여학생은 발가벗고 섹시댄스.


MT때 따라와서 나갈 문을 막고 앉아 한 명씩 자기소개를 시키며 "안 들린다"라고 윽박지르면서 커다란 종이컵에 소주를 꽉꽉 따라주던 까마득한 선배.


선배들을 피하기 위해 새벽 3시에 진득히 취한 척을 하며 간신히 도망쳐나와 필사적으로 동기들에게 지금 어디냐고, 시체 방 어디냐고 메시지를 날렸던 나날들.



조금씩 화사한 빛으로 덮어씌워지던 내 잿빛에 점점 검은빛이 기운다. 





잿빛은 검은색이 될 수 없다. 


나는 눈을 감고 귀를 닫고 무시하는 법은 잘 알았지만 내 의견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다.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법은 몰랐지만 나 자신을 공격하는 법은 아주 잘 알고 있었고 항상 실천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런 막장스러운 짓을 미리 당해서 다행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에게 닥칠 현실의 무서움을 조금이나마 미리 체험해볼 수 있었다. 진짜 현실에 비하면 별거 아니겠지만, 그래도 사람을 보는 눈은 조금 키울 수 있었다.


어디 가서 나름 꼰대질을 당해봤다고 조금은 목소리를 키워서 말할 수 있었다. 약간의 마음의 안식이랄까? 내가 뭣도 모르고 오냐오냐 맘 편하게 살아온 온실 속 화초만은 아니라며 조금은 스스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당연히 내가 당한 건 다른 사람에 비하면 먼지만큼도 안 될 고생이겠지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나는 내 대학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타의가 아니라 내 의지로 하는 행동들에 강박적인 집착을 지니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좋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건 몇년이 지나 감정을 잊은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런 말을 한가하게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당시에 그 상황을 직접 겪고 있었던 과거의 나에게 지금 같은 말을 하진 못할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힘들었다.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완벽하게. 



예를 들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봤을 만한 조별과제에서의 해프닝이 있었다.


조별과제에서 팀원이 데이터를 안줘서 아침 6시까지 자료를 만들어본 건 버틸 수 있었지만, 그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발표자가 발표가 꼬였을 때 대놓고 '어라, 이상하네. 자료를 만든 분들이 잘못 만드신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라며 꼽을 주는 건 정말 참기 어려웠다.



"우리 과가 대대로 춤에서 1등을 먹어왔으니 반드시 1등을 해야 한다"라며 압박을 주던 댄스부 언니(나의 직속 선배들)들이 있었다. 


나는 뭐라고 반박하고 싶은 힘은 안 들어서, 그냥 대놓고 춤을 안 췄다. 대애충 췄다. 그랬더니 나는 블랙리스트에 들어갔고 후엔 선배들에게 불리는 일이 없었다. 집에서 나올 때마다 혹시라도 선배들을 마주칠까 눈치란 눈치는 전부 봤다. 뒤에서 욕은 욕대로 쳐먹을지언정, 그래도 엮이지 않아 맘은 편했다.



나를 교묘하게 개무시하던 선배도 있었다. 


나는 손이 예쁘다는 이유로 '곱게 자라왔으니 과제에 도움이 안 되는 골빈 년' 취급을 받았다. 내가 말을 할 때 어려운 단어를 쓰자 깜짝 놀라며 '보통 일상생활에서 그런 말을 쓰나?'라며 교묘하게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던 그 선배는 아직도 가끔 떠오를 때마다 치가 떨린다. 그리고 내가 실제로는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사람은 결국 이미지로 평가된다는 것도 그 선배를 통해 배웠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나는 공대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잘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함께 도서관에 가고, 함께 어울리긴 했지만... 


난 그냥 겉도는 존재였다. 나 자신이 그걸 느꼈다. 난 몰입하지 못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였다.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나라는 사람을 그냥 '자원의 낭비'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해봤자 어차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은, 점점 색깔을 잃어가게 된다. 잿빛이 되어간다.



그렇지만 나에겐 조금.. 예외였다. 왜냐하면 애초에 내 색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았으니까.


원래 잿빛이었던 사람이 색깔을 더 잃어버리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짙은 잿빛. 검은색에 가까운 잿빛. 



그것이 내가 그 어느때보다도 큰 우울감에 빠져 있을 때 느낀 나 자신의 색깔이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무언가를 해내고 싶다, 바꾸고 싶다는 욕망이 가장 컸던, 검은색의 에너지가 컸던 시기였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뭐라도 해보려고 한다. 가장 기분이 좋을 때엔 열정이 생기는 건 당연한 거지만, 가장 기분이 더러울 때도 희한하게 열정이 생긴다. 하얀빛, 그리고 검은빛은 방향이 명확하다. 


잿빛은 그렇지 않다. 잿빛에 물든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무기력하다. 뭐든지 수용하고 주어진 일에나 적응하려고 할 뿐인 의욕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검은빛에 가까운 잿빛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가장 우울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거대한 도전, 자퇴와 새로운 진로라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너무나도 큰 버팀목, 그와 동시에 너무나도 큰 장애물이었던..



가족. 가족에게 처음으로 입을 열어보기로 했다.

이전 07화 나는 엄마아빠 딸이니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