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잉오렌지 Mar 27. 2024

'안 맞는' 모녀 간에 대화하는 법

능숙하게 회피하기

우리 가족은 이상적인 4인 가족이다.


진취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아버지.

현명하고 지혜로운 어머니.

다정하고 공부 잘하는 오빠.

귀여운 막내 여동생.



귀여운 막내. 철부지 막내. 온실속 화초 막내. 자유롭게 자란 막내. 할 말 다하고 사는 막내. 고생 안하고 자란 막내. 백수 막내. 챙겨줘야 하는 막내. 세상 물정 모르는 막내. 현실도 모르는 막내. 사회 경험 없는 막내. 싸가지 없는 막내. 곱게 자란 막내. 잘 배워서 차아아암 똑똑한 막내. 입만 잘난 막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귀여운 막내.



나는 세상에서 귀엽다는 말을 가장 혐오한다.






나는 집 안에서 가장 두꺼운 가면을 쓴다.



남들이 흔히 말하는 '본성', '편할 때 나오는 성격'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나는 그것 또한 가면이라고 부른다.


애초에 성격 Personality라는 단어의 어원이 뭔가? Persona. 가면이라는 뜻이다. 이미 옛날 사람들은 진작부터 성격이란 개념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 '첫 번째 가면'은 내 의지로 만든 가면이 아니다. 나의 집에서의 위치로 인해 정해지는 견고한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은 어지간해선 변하지 않는다. 가족들이 완벽하게 개방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면야.


그래서 나는 집에서 막내의 위치에 있었고, 이에 걸맞는 프레임을 받았다.




우리 가족은 본인들이 만들어낸 이상적인 프레임 안에 갇혀 살고 있다. 그리고 이를 지키고자 하면 하하호호 지내지만, 어기고자 하면 그 즉시 호통이 날아온다.


그리고 나는 매우 순종적인 성격이었으며(그 누구도 나의 이미지 탓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 프레임대로 사는 것을 선택했다. 틀을 깨는 게 두려웠으니까.



우리 가족은 언성을 높히는 일이 거의 없다. 싸우지 않는다. 부부싸움? 부모자식 싸움? 없다. 그래서 나는 우리 가족이 정말 이상적인 가족의 표본이라고 생각했다.



맞긴 맞다. 서로 할 말 못 할 말 철저하게 가리는 똑똑한 사람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하게 '사이가 어긋나지 않을 말'만 골라서 한다. 그래서 싸움이 없다. 암묵적으로 우리들 사이에 형성된 이상적인 분위기를 깨트리려 하지 않기 때문에.



들춰내려하지 않는다.



내가 밥을 먹다가 갑자기 서러워서 울면, 무시한다. 나는 방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물을 멈춘 다음에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서 밥을 먹는다.


서로 아무 일도 없었던 척을 한다.



가끔 친한 친구들에게서 가족 얘기를 듣다보면, 공감이 되는 게 아니라 신기했다. 친한 친구가 어머니랑 전화하며 논리정연하게 자기 주장을 하는 걸 보고 다른 세상이라고 느꼈다. 친한 친구가 집에서 어머니와 대판 싸웠다는 소리를 듣고, 신기했다. 집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는 친구 얘기를 듣고 나는 깜짝 놀랐고, 화장실에서 노래를 흥얼거린다는 소리를 듣고 또 깜짝 놀랐다.



나는 가끔 한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혼이 났으며, 목소리에 조금이라도 짜증이 섞이면 짜증 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니가 잘못해서 짜증이 난 건데 왜 나한테 짜증을 내냐?" 짜증이 난 것과 짜증을 내는 것은 지대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나는 짜증이 서 혼잣말로 무심결에 중얼거린 것이다.


하지만 실수로 나의 짜증을 바깥 세상으로 표현해버린 나는 어느새 주변 사람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드는 철부지가 되어있었다. 나의 짜증은 분위기를 깨트리는 민폐다.



불평불만. 우리 어머니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내가 어떤 감정을 안고 있는지에 대한 그 어떤 논리와 근거, 데이터도 이 불평불만이라는 단어 하나에 전부 요약이 된다.



언제는, 어머니는 "엄마한테 짜증내도 돼. 원래 가족한테 그런 거 푸는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웃었다.



어머니는 내게 그 말을 하고 기분이 좋으셨을 것이다. '나는 딸의 감정까지 돌봐주는 좋은 엄마야'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생각 속에서 살게 내버려두었다.



어머니는 항상 '다르다'를 '틀리다'라고 말씀하셨고, 그 두개를 구분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내가 한번 언급을 하자, 나는 부모님께 참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말버릇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내가 세상 잘난척을 하며 그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멋진 개썅마이웨이 인간을 연기하자, 깔깔대고 니가 뭘 아냐며 웃으면서도 좋아하셨다.


내가 힘들어할 때, '힘들어할 시간도 없어. 이 정도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약과지. 세상이 원래 그런 거지.'라고 말을 덧붙이며 나는 이 정도로 좌절할 정도로 약한 사람이 아니라고 안심시키면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해주셨다.


내가 온전히 나의 의지로 몇달에 걸쳐 혼자 만든 포트폴리오를 보고 어머니의 지인이 말씀하셨다.


"자식 교육을 시키셨네요." 분노가 치밀었음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긴 하지.


내가 부정적인 감정이 묻어나는 얘기를 꺼내려고 하면,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다. 그럼 나도 그 화제로 얘기의 방향을 돌린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러운 척.



나는 눈치가 빨랐으니까. 남들보다 조더. 나는 이기적인 막내딸이 되고 싶진 않았으니까. 징징거리는 어린애 취급을 받고 싶진 않았으니까.



나는 그래서 그냥 유쾌하게 살기로 했다. 뭐든지 웃어넘기고, 시덥잖은 농담따먹기나 하고, 내가 힘든 것 가지고 징징대지 않으며, 시간 때우기용 쓸데없는 얘기(예를 들면 어디 커피가 맛있다..)나 하며 진솔한 얘기는 전혀 하지 않는 가벼운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러자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사이좋은 가족이 되었다.



'이상적이다'라는 말은.. 달콤하다.


그리고 동시에.. 역겹기도 하다.




이전 08화 야한 춤을 시키는 학교와 우중충한 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