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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잉오렌지 Mar 28. 2024

웃어넘겨야 할 땐 화내고 화내야 할 땐 웃는 아이

모순.

가족에게 '힘들다'라고 말하는 것.


우선 그것부터가 나는 가장 거대한 도전이었다.





나는 다소 예민한 성격이었고,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사춘기 시절엔 무척 짜증 많은 아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그때 나는 조금 지랄맞은 사람이었다. 


다만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반대였지. 비록 내 이미지는 '할 말 다 하고 사는 막내딸'이었지만. 



나는 할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나는 진짜 해야 하는 말은 머릿속에서만 열정적으로 토해낼 뿐 실제 세상에 드러나게 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나는 아무 의미도 없이 조금이라도 짜증나는 사건이 있을 때마다(예를 들면 음식을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버스를 놓쳤을 때, 게임에서 졌을 때 등등..) 과하게 화를 표출했던 비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 혹은 의견을 논리정연하게 표현하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돌려서 표현했다'. 나는 이런 사소한 일에 짜증이 날 정도로 마음에 독이 쌓인 상태라는 걸.



그래선 정말 안됐는데 말이지.


그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나중엔 전부 나의 변화를 막는 장애물이 될 거란 걸, 철없던 시절에는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로' 감정을 표현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때에,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 침묵을 유지한다.





내 전공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심리학과로.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합리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도피에 불과했다. 나에겐 아무런 비전도 없었고, '그냥 우연히 교양으로 들어보니 재미있어서'가 도전의 이유가 다였다. 


심리학 교양은 왜 신청했냐고? 아무 이유도 없었다. 그냥 마침 시간대가 비어서 신청했다. 완벽하게 우연이었다. 나는 그 수업을 들어보기 전까진 심리학이 뭔지도 몰랐다. '심리 테스트하는 곳인가?' 진짜 그런 생각으로 교양을 신청했다.


정신을 연구하는 심리학과의 운명적인 만남.. 인간에 대한 고찰.. 심리에 대해 배운다는 신비.. 다친 사람의 치유.. 



그런 건 전부 나중에 갖다붙인 이유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난 내가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으니까.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것뿐이지 난 완벽하게 정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나에겐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열망보다는,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회피심이 훨씬 더 컸다. 설마 여기보다 안 좋겠어? 라는 마음 뿐이었다. 



아무 이유도 없었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냥 벗어나고 싶었다. 특별한 이유나 논리는 어떤 것도 없었다.


내가 심리학과에 가려고 마음을 먹었던 건, 처음엔 그저 도피에서부터 시작된 결과였다.



아무 이유없이 휴학을 할 순 없고, 아무 이유도 없이 자퇴를 할 순 없다. 내 가슴속엔 수많은 가능성이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나 전공 바꾸고 싶어." -> "취업 안 할 거야?" 

"나 심리학과에 가고 싶어." -> "니가 거길 가면 뭘 할 수 있는데? 너 혼자서?"

"나 자퇴하고 싶어." -> "미쳤구나."


이런 생각밖에 안 들었다. 




부모님의 공대에 가라는 조언은 어떤 것보다도 현실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아버지가 엔지니어로서 회사에 다니셔 직무를 배울 수 있었고, 내가 취업을 할 수 있는 인프라 또한 상당했다. 4년동안 버티기만 하면, 얼마든지 취업을 할 수 있다는 확고한 데이터들이 수두룩했다. 



4년동안 버티기만 하면나는 대학에 입학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아서 절망을 맛보았지만, 그건 내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투정이다. 어딜 가나 비슷한데 이것도 버티지 못하면 나중에 뭘 할 수 있겠나. 내가 아직 현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불평불만이다. 이것보다 심한 일은 밖에 나가면 수도 없이 겪는다. 일단은 더 있어봐라, 적응하면 된다..  


그런 말들이 부모님의 입에서 튀어나오고, 나는 그 모든 말을 귀기울여 듣고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런 것들의 반복. 똑같은 나날들. 조금이라도 학교에 대한 불만을 토하면, 본격적으로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내 입은 다물어지고 철없는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한번이라도 반박을 당했을 때, 내 의견을 펼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나는 펼칠 수가 없다.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었으니까.




내 첫 번째 대화 시도는 실패했다. 왜냐하면 내가 혼자 우물우물 쭈뼛거리면서 말을 하다가 스스로 말을 삼켜 대화를 그만뒀기 때문이다. 


나는 논리적으로 내 의견을 전달하는 법은 하나도 몰랐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회피하고 수용하며 적응하는 것밖에는 할 줄 몰랐다. 


내 감정을 표출하는 건 더욱 할 줄 몰랐다. 나는 내 삶에 진정으로 몰입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진정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화를 내보거나 열정을 쏟아부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잿빛이었다.


무기력한 잿빛보다는 조금 더 어두운.. 짙은 잿빛이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바로 현실을 받아들였을 내가, 철없게도 두 번째 시도라는 것을 해볼 마음이 들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나는 절박했다. 절박한지도 몰랐지만, 절박했다. 나는 잿빛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설령 실패해서 의미가 없는 도전이 되어버린다고 하더라도 해보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어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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