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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잉오렌지 Mar 29. 2024

공부하는 게 싫은 게 아니야

내가 원해서 하는 공부는 즐겁거든

첫 번째 대화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 후.


나는 그때 우스꽝스럽게도, 선배들 탓에 단체로 야한 춤을 췄던 때를 떠올렸다.


신입생을 환영하는 행사에서 신입생들은 다른 사람에게 재롱을 떨기 위해 자기 돈으로 무대의상을 구매해 춤을 추게 되었고,


그 무대 영상은 과 페이스북에 그대로 풀영상이 올라갔다. 1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다. 나와, 내 동기들의 추한 모습이.


그 영상을 부모님께 보여주었을 때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바로 영상에 장문의 댓글을 달았다. 이딴 행사는 그만 하라고. 아마 그때 내 선배들은 우리 아버지 댓글을 보고 '뭐야? 이 꼰대 새끼는?'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 댓글을 지우라고 냉철하게 아버지를 말렸다. 어차피 그런 댓글 달아봤자 나만 손해를 볼 것이며 변하지도 않을 거라고.



결과적으로는 올리자마자 누가 보기도 전에 그 댓글을 지우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불길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간접적으로 '힘들다'고 표현했을 때 이를 인정받았다는 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딱 한 명이라도.




그럼 한번 더 도전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딱 한번만 더. 






내가 단순히 잿빛이었다면.. 현실적으로 살기 위해서 그냥 적응하고 무기력한 채로 남았을 테지만, 그때의 나는 짙은 잿빛이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지나가는 사람만 봐도 짜증이 났고, 울기 시작한지 세 시간이 넘어도 조금만 방심하면 또다시 눈물이 흘러넘치곤 했다.


나는 그때.. 조금은 능동적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합리적인 설득과는 완벽하게 동떨어진 방식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부모님 앞에서 대놓고 울었다. 나는 평소에 눈물을 남에게 보이는 것은 엄청난 수치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방 밖에서 울었다. 미친 듯이 쪽팔렸다. 죽고 싶었다. 이렇게 한심한 모습을 부모님에게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부모님에게만큼은.


이런 방식으로밖에 내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에 큰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으로 내 '설득'이 먹혀들어갔다. 이렇게만큼은 설득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딱 한번의 작은 기회를 얻어냈다.




1년의 기회. 


1년 안에 곧바로 합격하면 인정해주겠다며 부모님은 말씀하셨다.



그 당시 나는 심리학과에 맞게, 이과에서 문과로 진로를 바꾸었었고.. 그 외에도 수능 범위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상태였다. 교육과정이 완전히 바뀌고(지금도 바뀌고 있을 테지만), 한국사라는 새로운 과목이 추가되고, 탐구는 당연히 문과 과목으로 0부터 다시 새롭게 배워야하고 이 아주 많은 변화를 혼자서 감내해야 했다. 


재수학원이나 과외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고, 오로지 독학으로만 승부를 봐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정시의 비중이 계속 줄어 수시 70%에 정시 30%, 고3보다는 재수생들이 훨씬 많은 시기(지금은 더더욱 많을 것이다), 원서는 오직 단 세 번밖에 쓸 수 없다. 심지어, 하위 분야가 많은 심리학을 종합해서 배우는 '심리학과'라는 과는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지도 않아 더욱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승낙했다. 그 도전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이고,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게, 열정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조용히 불길을 태우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년동안 집안에 쳐박혀 하루에 12시간씩 공부를 하던 나날들이..


나에겐 너무나도 행복했다. 아직 붙지도 않았는데. 


그냥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행복했다. 


직관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을만큼.



어쩌면, 내가 그 어떤 비전도 없이 도전을 하게 된 계기는.. 그리고 1년 넘게 꿋꿋이 그 도전을 이어나가게 된 계기는..


단순히 반항심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들었는데, 당시 부모님은 내가 한두달 정도 하고나면 지쳐서 알아서 공대로 돌아갈 거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래서 기대도 안 했다고 하셨다.



그 확신이 역겨웠다. 반드시 보란 듯이 붙어주고 싶었다. 



나는 공부를 하는 순간은, 나의 첫 번째 가면이었던 우울한 말없는 아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대놓고 낙관적으로 살았다. 떨어질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붙겠지. 이렇게까지 하는데 붙겠지. '떨어지면 어떡해?'라는 생각은 떨어지고나서 하자. 일단 지금은 공부나 하자.


그런 마인드로 계속해서 내 공부에 몰입했다. 



타인이 아닌 나를 위한 공부. 내가 하기로 결정한 공부. 나는 최초로 공부에 몰입이란 걸 해볼 수 있었고, 내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나의 성과로 돌아오리란 것을 처음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오직 내가 잘해야만 나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공부에 몰두했다.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는 1년 동안, 나는 어떻게 보면 치유를 하고 있었다. 나 자신의 마음을 내가 치유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나라는 사람을 내가 평가하고 정의내릴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 또한 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내 가슴에 물들었던 잿빛이 점점 사그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내 현실은 아직 그냥 '낙오한 재수생'일 뿐 어느 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희한하게도 잿빛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통째로 우울한 잿빛이었던 어린 시절.


잿빛에서 나뉜 푸른빛과 주황빛이, 불안정하게 왔다갔다하며 어지러웠던 고등학교 시절.


기분 나쁘게 눈물 흘리는 어두운 잿빛을 통째로 띠고 있던 대학교 시절.


그리고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는 1년. 나는 점점 잿빛에서 벗어나 밝은 색채를 서서히 되찾아가고 있었다.



되찾아간다고 표현을 하니 조금 우습지만..




내가 잃어버린 주황색 가면은 어느새 내 곁에 돌아와 나에게 써달라며 기다리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썼던 주황색 가면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나는 의식적으로 잿빛을 주황색과 푸른색으로 나누어 통제하려고 했지만, 어렸을 때의 난 아직 나의 감정을 능숙하게 조절하는 법을 배우지 않아 불안정했다.


지금은 달랐다. 안정적이었다. 확신이 있었다. 내가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 삶을 능동적으로, 이성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나는 다시 가면을 썼다. 내 얼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꽉꽉 눌러썼다.



나는 자유로운 주황색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 남겨진 푸른색의 가면은 무시하기로 했다.



언젠가 데리러 올게, 라며 나는 내 무의식 속에 남겨진 푸른색 가면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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