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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잉오렌지 Jul 27. 2024

나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 면접관

나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최악이었던 면접

왠지 검색해봐도 구글에 마땅한 정보가 나오지 않는 기업.


잡플래닛에 존재하지 않는 기업.


홈페이지 관리를 하지 않아 진행한 프로젝트를 볼 수 없는 기업.



몇 가지의 쎄한 단서가 내 눈에 보였고, 나는 그래도 겪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밤을 새가며 면접 준비와 포트폴리오 발표를 준비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50분동안에도 끊임없이 쫑알거리며 대본을 외워갔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나에게 있어 면접이란, 단순히 직장인이 되기 위한 관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장. 변화. 탈피. 떨어질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내 얼굴에 눌러붙은 주황빛의 가면에 못을 박아버릴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들이다. 그만큼 나에겐 면접 기회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설령 내가 그 회사에 가지 못하더라도, 사회생활력이 남들보다 다소 수준이 떨어져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나에겐 아무리 작은 회사의 면접이라 하더라도 큰 의미가 있었다. 어떤 면접을 본다 하더라도 그 면접들에서 얻는 것, 발전하는 것이 최소 하나쯤은 반드시 존재했다.




럼 이번 면접은?


어떨까?


이번엔 어떤 종류의 개같은 면접을 겪을 수 있을까?




"자, 물어보고 싶은 거 맘껏 물어보세요."



라는 말만 12번 정도 들었다. 면접 시작하자마자.







가장 먼저 뭘 물어보려나? 자기소개? 지원동기? 포트폴리오 발표를 시키려나? 압박면접이라도 하려나? 일단 어떤 질문이 나올지 모르니 계속 내 직무경험을 되새기며 대비하자..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나 자신이 바보같았다.

 



그 회사는 나에게 그 어떠한 유의미한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그냥 가끔 양쪽이 말이 끊기면 묘한 말을 하나씩 던질 뿐 그 어떤 특별한 질문도 하지 않았고, 내가 회사가 진행한 프로젝트나 직무에 관한 질문을 던지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묘한.


그런 공허한 '커뮤니케이션'의 반복.



맞다. 공허했다. 진솔한 척하지만 사실 그 누구도 진심을 드러내지 않는 간보기의 연속이었다.


나는 이 회사가 왜 나를 서류통과를 시켰는지에 대한 그 어떠한 단서도 얻지 못했고, 단서를 얻지 못했단 것 자체가 내가 사전에 생각해두고 있던 불길한 가능성을 확신시켜주는 큰 단서가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떤 가능성일까?



"주변에 미술하는 인맥 있어요?" 저 디자이너 아닌데요.

"형제자매 있어요? 부모님이 사이가 좋은가 보네?" 그것도 아이스브레이킹이라고 하시나요?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덕분에 준비를 못해가지고." 10분씩이나 일찍 가서 참 죄송합니다.

"주로 하는 프로젝트요? 그냥 위에서 일 주는 대로 해요." 그렇구나.

"(인쇄한 내 포트폴리오를 슬쩍 보며) 어차피 이런 일은 할 일이 없어요." 그렇군요.



"자,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뭐든 물어보세요." 


질문을 해야 하는 건 당신 쪽 아니냐?



그래서 나는 시키시는 대로 염병할 병신 같은 질문을 열 개도 넘게 쥐어짜냈다. 하시는 대로 내가 인터뷰를 해드렸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끝나면, 면접장에서 있을 수가 없는 정적이란 게 흘렀다. 면접관이든, 면접자든 누군가는 반드시 말을 하고 있어야 하는 면접장에서 정적이란 게 흐른다.



가관이었다.



그 흔한 자기소개도 지원동기도 뭣도 없었다. 포트폴리오 발표도 없었다. 심지어 2번 면접 는 포트폴리오 발표와 형식적인 질문이라도 받았지, 그래서 면접 질문 리스트를 보충할 수 있었고, 발표 연습도 오랜만에 해볼 수 있었다. 경각심을 기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면접은 정말..



시간 낭비였다.




진짜로 궁금한 거 없어요? 긴장 풀고 뭐든지 물어보세요.


무슨 질문이 나오길 기대하는 걸까? 궁금한 게 없냐고? 내가 방금 질문한 건 '진짜' 궁금한 걸로는 안 보였나 보지? 왜 자꾸 긴장을 풀라고 하지? 그것도 10번씩이나?


긴장이 풀린 내 입에서 뭔가 튀어나오길 원하나본데? 뭘까? 본인이 원하는 질문이 특별히 있나본데?


근데 이 사람 내 얘기를 듣고는 있는 건가?





첫인상은 좋았다. 말투도 친절했고, 사근사근하며 극진히 대접해주려는 그런 모습이 엿보였다.


그리고 조금씩 그 극진한 대접 속에 숨겨진, 묘한 감정을 나는 느꼈다.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묘한 가면을 느꼈으며, 그와 동시에 나의 가면을 벗기려고 안달복달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냥 사소한 거라도 솔직하게 물어보세요!"

"이제 긴장은 좀 풀렸죠?"

"뭐든 물어보라니까요?"




"이제 좀 긴장 풀렸어요?"


"(슬슬) 긴장 풀렸어요?"


"지금 많이 긴장했죠? (솔직하게 말하라니까?)"



사실 나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안 했다. 그렇게 보고 싶은 거겠지. 아니면 그렇게 나를 몰아가고 싶은 거겠지.


나는 그냥 말하기 싫어서 말하지 않은 거다.


정말 단순히 솔직하게 커뮤니케이션을 원하는 거였다면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열 번 넘게 반복하진 않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라고 웃는 얼굴로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꼈다.



'어쭈, 안 넘어오네?'

'어차피 잡무밖에 안 하게 될 텐데 잘난 척은 다하고 있네?'

'이래도 입을 안 열어? 내가 이 정도까지 다 내려놔줬는데?'

'어차피 니가 궁금한 건 직무니 프로젝트니 그런게 아니라 연봉에 복지에 워라밸인 거 다 알고 있거든?'

'너 어차피 그냥 아무데나 서류 넣은 거 다 알고 있거든?'

'야근 안 한다니까? 합리적이라니까? 어서 물어보라니까?'




'미끼를 물어보라니까?'



그 사람은 '나'에게 궁금한 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 이전에 내 직무 자체를 몰랐다.



그래, 사실 내가 진짜로 궁금했던 게 있긴 했다. 눈치 보느라 안 물어본 질문이 있긴 했다. 내가 진짜로 묻고 싶었던 질문은 이거였다.



너 이거 보여주기용 면접이지?



뭐가 있을까? 국가 지원금? 신입들 면접 보게 해주면 뭐 정부에서 꽁돈이라도 나오나? 


아니면 직원들이 일 많다고 불평해서 쇼맨십이라도 하는 건가? 


"아, 괜찮은 사람 있으면 데려올 텐데, 인재가 없네. 신입 뽑을 때까지는 미안하지만 너네가 고생해~ 괜찮지? 지금 뽑고 있으니까 얼마 안 걸릴 거야~ 면접하는 거 봤지?" 



이렇게 이 사람이 나를 왜 면접장에 불렀는지에 대한 다양한 이유, 다양한 가능성이 예측된다. 


그 중 나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이 될만한 가능성은 뭐가 있을까? 



전부다. 왜냐면 이런 지가 지혜로운 줄 아는 병신 밑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1도 들지 않아서.




"(포트폴리오를 보며) 이런 걸 보면 oo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죠. 글 쓰는 거 좋아하시죠?"


예, 좋아합니다. 참 대단하신 통찰력이십니다. 자기소개서에 대놓고 써놨는데 그걸 발견해내시다니요. 그런데 계속 포트폴리오 맨 앞장 표지만 보시던데 그걸 어떻게 발견하셨나요? 똑같은 페이지만 계속 읽으면서 넘기는 시늉이나 하시던데?



"다른 회사는 어려운 일 관련 질문 같은 걸 물어보겠지만 저희는 안 물어봐요. 신입이잖아요. 이런 배려 있는 면접 처음이죠?"


예, 처음이네요. 병신아.




자소서, 이력서, 포트폴리오. 안 읽었다는 게 티가 난다.


거기까지는 괜찮다고 치자. 하지만 면접자리에서조차 관심이 없다. 안 읽는 것을 정당화한다. 논리적인 것 같은 이유를 들어 정당화한다. 준비해온 거 뻔히 알면서도 보려고도 안 한다. 내가 신입이니까.



그럼 무슨 기준으로 신입을 뽑으시나요? 내가 대놓고 물어봤다.


그러자 당신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투, 태도. OK.


그렇구나.


그럼그럼. 신입이면 신입답게 술도 잘 마셔야되고, 가족관계도 좋아야지. 아, 출신 지역도 물론 중요하고. 일 같은 건 못해도 돼~ 예의 바른게 최고 아니겠어?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잖아~




지원자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인재인지 아무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 이유로는 세 가지 정도가 예상된다. 셋 다일 수도 있고.


1. 어차피 누구나 할 수 있는 잡무나 시킬 거니까.


2. 어차피 보여주기용 면접이니까.


3. 어차피 내가 경력도 뭣도 없는 신입이니까.



신입이 잘나봤자 뭐 얼마나 잘나겠어?





그럼 이 사람이 면접 시간 동안 시간을 때우기 위해 나에게 질문 대신 퍼부은 생색들에 대해서 분석을 해볼까?



1. 신입 '따위'에게 깍듯이 숙이는 허리. 음료수를 세 개나 가져다주며 첫인상 어필하기. 

"원래는 일곱 개를 준비하는데 oo님이 일찍(10분) 와서 세 개밖에 못 준비했어요~"


누가 면접할 때 신입이 음료수를 세개씩이나 쳐먹냐, 탕비실에서 그냥 가져오면 되는 것 가지고 무슨 생색질이야. 그거 쪼끄만한 캔 뭐 가격이 얼마나 한다고. 



2. 일 관련 질문을 하면 내가 신입이라서 대답하지 못할까봐 그런 점을 신경 써주는 척 하면서 대충 얼버무리기. 


사실 너 실무 잘 모르지?



3. "저는 면접은 서로가 대화하는 자리라고 생각해요, 그 어떤 거라도 부담없이 물어보세요." 듣기 좋은 말.


진짜 수평적인 사람은 본인 스스로 수평적이라고 이미지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도 면접 처음부터.



4. 자꾸 다른 회사 얘기를 꺼내며 비교질하기. "다른 회사는 1시간씩이나 면접을 본다는데 뭐 그렇게 신입한테 깐깐하게 구는가 싶어~"


뭐 정보라도 캐내고 싶니? 하긴 자기 회사 장점이 없으니까 돋보이려면 다른 회사를 까내려야겠지?



5. 쓸데없는 질문이라도 좋으니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 물어보라며 내가 긴장을 풀기를 기다리는 것. 일부러 내게 끊임없이 질문을 유도하며 내가 본심을 털어놓게 만들기. 아니면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한테 관심받고 싶어서 옘병하기.


내가 긴장 풀린 척 민감한 화제인 야근에 대해서 물어보자 얼씨구나 흥분하면서 말을 잇더라.


'야근이나 주말출근 아예 안한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작년에는 단 한번도 주말출근을 하지 않았다. 지난주에 딱 한번 있었지만 그 말은 그 전까진 한번도 없었다는 뜻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라며 현실적인 척, 교묘하고 은근하게 '우리는 합리적으로 야근하는 회사'라는 이미지를 가져가는 것.


우리 회사는 야근 안한다고 하면 연기인 게 너무 뻔히 티날 테니까.

  



전부 계산된 행위라는 것을 나는 느꼈다.


이것들 하나하나는 지극히 사소한, 우연일 수도 있는 단서지만.. 여러 개의 단서가 조합되고 나면 그 사소한 단서는 서서히 힘을 가지게 된다.


면접관들은 흔히 단 몇 분만에 지원자가 어떤 사람인지 순식간에 판단한다고 했나?


면접자들도 마찬가지다. 면접관이 어떤 사람인지는, 조금만 냉철하게 분석해봐도 몇 분만에 다 알 수 있다.


진짜 좋은 사람과, 좋은 척을 하는 사람은 티가 난다. 사람은 그렇게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단서를 흘리고 다닐 수 밖에 없다.


연기를 할 거면 똑바로 해야지.




그제서야 나는 이 회사가 왜 잡플래닛에 나오지 않았는지 그 진실을 조금이나마 통찰했다. 나는 신입치고는 조금 가면놀이에 익숙한 사람이었으니까.



아, 이 사람 관리하는 사람이구나.


뭘?



가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네 번째 면접에 대해선 전부 잊어버리기로 했다. 소시오패스를 감별하는 스킬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배운 점이 없는 쓰레기 같은 면접은 내 기억에서 휘발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나는 첫 번째 면접을 통해 '일에 대해선 안 묻고 나의 도덕철학에 대해서 토론을 유도하는 면접관'에 적응하게 되었고, 

두 번째 면접을 통해 '내 문자는 전부 씹고 내 이력서를 면접자리가 되어서야 그제서야 읽는 면접관'에 적응하게 되었고, 

세 번째 면접을 통해 '전부 잘 맞았고 무조건 붙겠다 싶었지만 날 떨어뜨린 면접관'에도 적응하게 되었고, 

네 번째 면접을 통해 '면접을 보지 않는 면접관'에도 적응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어떤 면접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아직 다칠 기회는 너무나도 많이 남아있다. 커밍쑨.





그로부터 약 4일 후, 월요일.


사실 나는 이 면접을 합격하길 바랐다.


그래야 합격 이메일에 답장으로 "아 죄송ㅋㅋ 돈 더 잘 주는 딴데 합격해가지고 님 회사 갈 생각이 없는뎅"이라고 염장을 지를 수 있잖아.


하지만 떨어졌다. 쳇.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이메일로 불합격 메일이 한번 더 날아왔다. 응?


뭐지? 두 번이나 불합격시켜서 꼽주려는 수작질인가? 이런 식으로 가스라이팅을 하네? 



..자세히 보니 나한테 보낸 이메일이 아니었다. 이메일에 면접자 이름이 전혀 적혀있지 않아서 이새끼가 엿먹이려고 불합 메일을 두번이나 보냈나 했는데, 메일에 적힌 면접일정이랑 내가 본 면접일정이랑 달랐다. 다른 사람에게 보내려던 이메일인데 주소를 착각했나 보다. 근데 생각해보니 그런 아주 중요한 걸 착각하는 것 자체가 그 면접관 양반이 매우 문제 있는 양반이란 소리라는 의미다.


불합격 메일 내용은 나한테 온 것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다. 그냥 템플릿이지. 최소한 메일에 니 이름이랑 면접자 이름 정도는 써주지 않겠니? 세 자 쓰는 게 그렇게도 어려웠니? 


나는 그래도 당신과는 다르게 예의를 지켜서 잘못 보내신 것 같다고 그 메일에 답장을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싸가지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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