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번: 컬쳐핏 면접, 50명 규모 series A 스타트업 https://brunch.co.kr/@blueingorange/42
2번: 실무 + 인성 면접, 30명 규모 10년차 에이전시 https://brunch.co.kr/@blueingorange/67
3번: 인성 면접, 3년차 에이전시 https://brunch.co.kr/@blueingorange/68
4번: 병신 면접, 10년 넘은 중소 에이전시 https://brunch.co.kr/@blueingorange/35
5번: PT 면접, 70명 규모 중소 에이전시
6번: 실무 면접 + 화상 면접, 20명 규모 대기업 계열 AI 스타트업
순서상으로는 다섯 번째 면접이 먼저이나, 여섯 번째 면접 이야기를 더 먼저 쓰게 되었다. 그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여섯 번째 면접이자, 나의 첫 화상 면접.
화상 면접. 우리들이 코로나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넘어 신세계로 갈 수 있도록 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일등 공신 중 하나.
난생 처음으로 마주하는 화상 면접에 대비해 부리나케 노트북(고물)을 준비해 스피커와 마이크, 카메라를 체크했다. 내가 쓰는 원래 컴퓨터는 데스크탑인데, 데스크탑엔 별도로 캠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어쩔수 없이 캠이 내장된 내 구식 노트북을 꺼내야 했다.
화상 면접. 화상 면접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전혀 몰라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대학교 때 보냈던 비대면 강의마냥 후리하게 흘러가진 않을 테고. 내게 보냈던 사뭇 범상치 않았던 그 이메일 내용을 보면.
만약 내 눈빛이 이상하게 보이면 어쩌지? 싸가지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면 자신감 없다고 느껴지진 않을까?
만약 내 카메라 화질이 구려서 그게 내 면접 결과에 악영향을 미치면 어떡하지?
만약 내 목소리를 잘 못 알아들어서 그것 때문에 악영향이 있진 않을까?
내가 대답을 하는데 화면이 잠깐 멈춰서 못 들으시면? 면접 잘 진행하다가 그렇게 문제 한번 생기면 흐름이 끊기지 않을까?
나는 화상 면접이 싫다. 심지어 PT면접보다 더더욱.
사무실에서 면접관이랑 마주보고 면접 보면 긴장되서 말이 잘 안나오지 않아?
집에서 하니까 덜 긴장되고 편하지 않아?
난 예전부터 그 얘기를 들으면 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집이라는 익숙한 환경에 있기에 나는 사회생활에 어울리는 가면을 곧바로 쓸 수가 없다. 변화할 수가 없다. 나는 긴장을 원한다.
옆방에 어머니가 있다. 내가 면접 답변하는 모습을 또 지켜보고 계실 것이다. 옆방에 친숙한 누군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변화에 몰입하는 데 방해한다.
변화다. 연기가 아니다. 나는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연기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전부 내 의지이며 변화다. 나는 집에 있으면 진심으로 푸르게 빛났고, 밖을 나가면 진심으로 주황빛으로 빛난다. 나는 그렇게 변하는 나 자신이 좋다.
하지만 지금 나는 회사에도 집에도 있지 않다.
집도 아니고 회사도 아닌 애매한 영역에 가만히 노트북을 펴놓고 앉아있는 나. 중간에 있는 나. 어중간한 나.
난 어떻게 해야 되지?
스타트업 면접은 이번으로 두번째.
나는 스타트업 면접을 볼 땐 스타트업에 맞는 인재로, 에이전시 면접을 볼 땐 에이전시에 맞는 인재로 맞춰서 스크립트를 세팅한다. 예를 들면, 에이전시는 보다 전문적이고 차분하게 보일 수 있게, 스타트업은 능동적이고 주체성에 집착하는 당돌한 MZ세대.
그 컨셉에 맞게 딱딱 변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 나는 너무나도 미숙하다.
나는 화상 면접이 두렵다. 직접 마주하지 않을수록, 거리가 멀수록 사람은 더더욱 타인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선입견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니까.
예를 들면.. 내 첫인상이라던가.
징징거리는 건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하기 싫다고 해도 피할 곳은 없다. 나는 더이상 철없는 아이로서 남는 건 싫다. 내 속사정이야 나한테만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거지, 면접관이나 친구들이나 부모님에겐 그 어떤 의미도 없다.
그렇지?
서두가 길었지만 면접 얘기로 돌아가보자. 이번 면접, 여섯 번째 면접은 최상단에 써놓았듯이 AI 사업을 하고 있는 대기업 계열사 스타트업이었다. 소속된 멤버들은 다들 하나 같이 외국은 기본적으로 다녀오신 고스펙 엘리트 박사님들이었고, 홈페이지에서부터 이미 트렌디하고 프리하면서도 프로페셔널한 느낌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받았다. 역시 AI.
게다가 연봉은 찾아보니까 평균이 7천이었다.
그런 회사에서부터 서류합격 이메일을 받았기에 기뻤다. 비록 가슴이 예전에 비해 많이 무뎌져, 처음으로 면접 제안을 받았을 때처럼, 대기업에게서 면접 제안을 받았을 때처럼 그렇게 기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쁘다.
비록 인턴이라 정직원만큼 돈을 받는 건 아니긴 했으나, 전환형 인턴이니까 희망은 있다(요즘 전환형 인턴 관련해서 전환을 안 시켜준다느니 말이 많지만 어쨌든 반년이라도 인턴 경험이 있는 게 없는 것보단 낫다).
그리고 동시에, 이번 면접은 만만치 않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이메일에서 풍겨오는 그 회사의 전문가스러운 냄새 때문이었다.
서류합격 후, 그 회사는 메일로 면접 때 내게 어떤 류의 질문을 물어볼 것이며, 면접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에 대한 내용을 아주 상세하게 써서 내게 보내주었다. 예를 들면,
oo님, 면접 안내 드립니다. 소요 시간은 약 1시간 가량이며, 하단 내용은 면접에서 중점적으로 진행할 질문들입니다. 해당 내용 바탕으로 면접 준비를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 프로젝트의 상세 기획 flow
문제 탐색, 가설 수립, 지표 설정, 정량 데이터 기반 가설 검증 등 프로젝트 세부 진행 과정
2. 문제를 해결하면서 느낀 고민거리 및 느낀점, 이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경험
그렇다. 이번 면접은 직무 면접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전문적인.
참고로 이거 인턴 면접이다.
나는 여태 면접을 다섯 번 정도 봐왔으면서도 사실 진짜배기 직무 면접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컬쳐핏 면접을 먼저 봤다던가, 면접을 한번만 봐서 인성 위주로 질문이 들어왔다던가, 단순 발표 질의응답식이었거나, 애초에 면접이 빙신 같았던가.
그래서 이메일을 보고, 정신이 바짝 드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공들여서 만든 작품을 본격적으로 무너뜨리려고 하려는 그 움직임을 느꼈다. 선전포고.
선전포고. 맞아.
이건 나에게 있어 선전포고다. 지금부터 네가 만든 예쁜 모래성을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일 테니 각오하라는 소리다. 네가 쌓아올린 포트폴리오, 네가 쌓아올린 가면들을 전부 무너뜨리겠다고. 나에겐 그 '친절한' 메일이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게 맞았다.
1시간 면접이라고 메일에는 써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20~30분 정도 진행했다. 스타트업답게 파고드는 질문이 많았고, 날카로웠다.
말투가 날카로웠냐고 묻는다면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면접관의 이미지만 보면 순박한 인상이셨다.
그러나, 모든 질문이 스크립트를 암기한대로는 절대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티나지 않지만 면접관이 머릴 써서 만든 게 보이는 고급스러운 질문들이었다. 교묘하게 내 예상을 빗겨나갔다. 내가 준비했던 예상질문과 비슷하게 보이면서도 맥락이 조금씩 비틀렸다. 함정이었다.
'내 질문의 의도를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을까?' 그렇게 나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OK. 어차피 내가 면접을 준비하는 방식은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
나는 내가 썼던 스크립트를 전부 잊어버리고 무의식 속에 가둬두었다. 나는 오직 면접관의 의도에만 귀를 기울이고, 무의식이 흘러가는대로 답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면접준비했던 내용이 떠오르면 하고자 했던 답변에 끼워맞췄고, 떠오르지 않으면 그대로 잊어버렸다. 나의 면접 스크립트는 비교적 '유연했다'.
언제든지 변경하고 삭제하고 죽이고 갖다버릴 수 있다. 내가 집에서 지금 쓰고 있는 수많은 '작품'들처럼.
횡설수설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으나, 나름 내가 준비해놨던 면접 답변 리스트에 있었던 내용을 많이 써먹었다. 약간 맥락에서 벗어난 답변을 한 것 같기도 하고, 나름 말은 되는 답변인 것 같기도 해서 지금으로선 결과를 전혀 예상할 수 없다. 아무튼 나는 대놓고 말문이 막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자, 면접관은 내가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과정...보다, 오히려 다른 쪽을 더욱 캐묻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에서 어떤 걸 배울 수 있을 것 같은가요?
라고 당신께선 물으셨다. 이런 류의 질문은 정말 처음 받아봐서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망설였다.
나는 약간의 고민 끝에.. 이렇게 대답했다.
"습관. 발견하고자 하는 습관, 고민하고자 하는 태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그러자 당신께선 이번엔 또다른 질문을 가져오셨다.
평소에 많이 사용하는 AI 관련 프로덕트가 무엇인가요?
어?
그 프로덕트에서 본인이 개선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인가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면접관에게 잠시만 앱을 찾아보겠다고 말하고 폰을 켜서 내가 스터디용으로 깔아놓았던 앱을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AI에 대해 그닥 관심이 없다. 내가 이 회사에 지원했던 이유는 단순히 JD가 마음에 들어서였고, 내가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나는 회사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 도메인에 대해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회사가 어떤 프로덕트를 만들고 있는지, 그 도메인에 대해서 얼마나 몰입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이 나에겐 하나도 없었다. 꼭 이번 기업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그랬다.
금융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회사, 그리고 금융권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나.
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사실 금융에는 단 하나도 흥미가 없었다. 금융권 프로젝트를 하면서도 금융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걸 나는 '새로운 관점'이라고 예쁘게 포장했다. 나는 회사가 하고 싶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내가 성장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쉽게 말하면 로열티.
어렵게 말하면..
이기심.
결과가 어떻게 될 것 같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