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잉오렌지 Aug 17. 2024

좋은 파견계약직은 죽은 파견계약직뿐이다

임이여 나에게 거짓을 전하지 말아주오

6개의 리스트.


여기서 더욱 늘어날 지 혹은 여기서 멈출 지.


숨겨져 있었던 것이 자연스레 떠올라 자리를 차지하게 될 지.


그 누구도 모른다.






1번: 컬쳐핏 면접, 50명 규모 series A 스타트업 https://brunch.co.kr/@blueingorange/42

2번: 실무 + 인성 면접, 30명 규모 10년차 에이전시 https://brunch.co.kr/@blueingorange/67

3번: 인성 면접, 3년차 에이전시 https://brunch.co.kr/@blueingorange/68

4번: 병신 면접, 10년 넘은 중소 에이전시 https://brunch.co.kr/@blueingorange/35

5번: PT 면접, 10년차 중소 에이전시

6번: 실무 면접 + 화상 면접, 20명 규모 대기업 계열 AI 스타트업 https://brunch.co.kr/@blueingorange/49




다섯 번째 면접 날. 아직은 내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던 시기. 


이 날 기준으로 나에게 존재했던 취업의 기회는 3개(왜 2개가 아니라 3개인지는 다음 화에). 비록 그 3개 중 하나는 이미 나와 인연이 없었다는 게 지난 화에 드러나버렸지만.


오늘도 면접장에 가기 전에 다시 한번 리마인드식으로 발표 연습을 진행했다. 여전히 연습하는 내내 하루종일 짜증이 나고 연습이 안 되고 안 외워지고 은근하게 또 배가 아팠지만 무시했다. 면접을 주구장창 몇 번을 봐도 면접 경험을 쌓는 건 말없는 아이가 아니라 재치있는 아이이니까 어쩔 수 없나보다.



이번 면접은 상단에 써놓았듯 PT면접이다. 내가 일주일 넘게 계속 쫑알거리며 발표 연습을 하게 만든 바로 그 장본인이나 다름없다.


사실상 이 면접을 위해 목 빠지게 발표 연습을 해왔다. 왜? 그만큼 이 기업이 가고 싶어서? 중소라고 해도 매우 가망이 있는 좋은 기업이라서? 대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줄까봐? 아니면 나랑 잘 맞을 것 같아서?



아니, 나는 이 기업에 사실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파견계약직 면접이었으니까.




나는 '계약직'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큰 부정적인 의견은 없다. 요즘 1년, 2년 사이로 이직하는 게 사실상 트렌드가 돼버렸는데, 그렇게 따지면 1년, 2년 계약직으로 다니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나. 애초에 그 계약직이 정규직보다 오래 다닐 수도 있다. 웃긴 일이다.


다만 '파견계약직'은 조금 마음에 걸렸다. 나는 '파견'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은 갖고 있었다. 특히 아무런 경력도 없는 신입 입장에서 파견직은 실무를 원활하게 인수인계받을 기회도, 회사 분위기에 적응할 기회도 현저히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 이건 나름 객관적인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실무를 알고 본인만의 사이클이 있는 경력자라면 몰라도 신입이 파견직부터 하는 건, 경력 쌓기도 어려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 회사에 지원한 이유는...



별 이유 없다. 눈높이를 더욱 내렸을 뿐이다. 이 당시 나는 회사 자체에서 괜찮은 느낌이 난다면, 즉 내가 배울 만한 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계약직이든 파견계약직이든 그냥 넣었다. 내가 회사를 고르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는데(JD, 회사 위치, 문화, 정규직, 법규 준수 등), 그중 '정규직'을 지웠을 뿐이다.



또한 내가 취준을 갓 시작할 때 내가 도전해볼 직업의 기준으로 삼은 것 중,


1) 내가 도전은 해볼 수 있을 만한,

2) 몇년 안에 직업 자체가 사라지지 않을,

3) 일을 배우기 위한 교육 인프라가 잘 잡혀있어 빠르게 취준 단계로 들어갈 수 있는,

4) 알바 말고 정규직


4번을 지우겠다는 소리다.



내가 정규직 면접에 지원서를 넣은 것 자체가 주제도 모르는 오만한 행위일지도 모르잖아.




아무런 기대도 없이 회사에 갔다. 지하철을 갈아타지 않아도 되서 나름 편하다. 면접 시간도 오후 3시라 넉넉하게 갔다.


아무런 기대도 되지 않았다. 본사가 아니라 외부 사무실에서 일하는 파견계약직. 잡플래닛에는 '채용공고에 정규직이라고 올려놓고 면접 자리 와서 파견계약직이라는 걸 밝혔다'는 매우 구체적인 부정적 리뷰가 존재했다. 


내가 올린 채용공고엔 이미 파견계약직이란 언급이 되어있었다. 나한텐 거짓말하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면접장에 도착했다. 한 직원분이 나를 면접실로 안내해주었고, 회사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인테리어가 깔끔하고 세련됐고, 직원 분위기도 나름 좋은 편이었던 것 같다. 인테리어와 직원들 통합해서 꽉 막힌 느낌은 전혀 없고, 편한 수평적인 분위기가 엿보였다. 염병같은 네번째 면접과 전혀 다르게 말이다. 거기서 조금은 이 회사에 대한 호감도가 올랐다. 


내 안의 부정적인 편견을 깨부술 회사가 되어주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조용히 상상했다. 깨부숴주면 좋겠다고.




면접 진행방식은 다음과 같다. 처음 시작부터 일단 포트폴리오에 관한 발표를 진행하고, 이에 관해 질의응답을 하는 방식으로 면접이 진행된다. 준비만 확실하게 되었다면 차라리 이게 평범한 면접보다 유익할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범위에서 질문이 던져질 것이며, 이 질의응답 자체가 내 결과물에 피드백을 받는 좋은 시간이 되어줄 수 있을 테니까.



안내를 받아 회의실에 들어갔고, 나는 보란 듯이 놓여있는 노트북 자리에 앉았다. 이 노트북으로 포트폴리오를 넘기면서 발표를 진행하면 될 것이다. 나는 미리 조금 입을 풀어두기 위해 노트북에 띄워진 화면을 보았다.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인 노트북에는 누군가의 포트폴리오가 띄워져 있었다.




'누군가'의 포트폴리오. 그 포트폴리오는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포트폴리오를 관찰했다. 불길하다. 그 포트폴리오는 내가 아니라 어떤 디자이너분의 포트폴리오였다. 잘 만들었다. 반짝반짝 비주얼 이펙트까지 화사하게 수놓여 있었다. 나는 내가 디자이너를 포기한 것을 너무나도 잘한 선택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 세련된 포트폴리오와 내 투박한 포트폴리오를 보면 너무나도 초라했다. 왜 지금 내 면접 시간에 이게 놓여있을까.



잠시 후 면접관님이 들어오셨고, 내가 다른 사람의 포트폴리오를 띄워놓으셨다고 말씀드리자.. 


면접관님은 당황하셨다.



나는 그 순간 큰일이 났음을 직감했다. 설마 내가 면접일을 착각한 걸까? 나는 면접관님보다 더욱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폰을 꺼내서 이메일을 체크해 면접날, 면접시간을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내가 간 시간이 맞아서 두번 세번 네번을 확인했다.


보아하니 내가 아니라 면접관님이 실수하신 모양이다. 하지만 누가 실수했냐, 그건 내게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 맞이하는 변수에 나는 가면을 쓰는 것도 잊어버리고 거대한 생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내가 실수한 게 아니라고 해도 이것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불이익이 생길 수 있어.


내 면접 준비를 못했으니까 이번 면접은 그냥 대충 넘기려고 하겠지.


대충.



그런 날 혼자 내버려두고 면접관님은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면접실을 나가셨다. 



그렇게 나는 혼자 덩그러니 대기실에 남겨졌다.






이전 17화 불합격이라는 안정적인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