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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잉오렌지 Aug 31. 2024

가장 개같았던 날 나는 가장 좋은 기회를 얻었다

불행 뒤엔 행복이 온다고 나는 철썩같이 믿는다


내가 유일하게 믿고 있는 미신.



"행복 뒤엔 불행이, 불행 뒤엔 행복이 찾아온다."



미신은 객관적이니 주관적이니가 중요한 게 아니다.


믿음으로서 나는 견딜 수 있다.






내가 하나 글에 쓰지 않고 넘겼던 또 하나의 기회가 존재했었다. 1번부터 6번 면접까지, 리스트에 들어있지 않았던 또 하나의 기회.


리디 인턴. 


즉 탈락한 6번 면접(대기업 계열사 스타트업)을 제외하고 실질적으로 내게 남겨진 기회는 지난 화에 봤었던 5번 PT면접과, 리디 인턴 두 개다.



이 리디 서류는 내가 집어넣은 것은 아니다. 때는 이전 시기로 돌아간다. 4번 병신 면접을 보고 기분이 가장 잡쳐있었을 때.


면접이 끝나 건물을 나오자마자, 모르는 번호로 내게 전화가 왔었다. 뭐지. 010이라서 일단 받았다. 2천만원짜리 보이스피싱에 당한 후로 모든 전화를 경계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려서 잔뜩 긴장하면서 언제든지 공격에 임할 준비를 하고 전화를 받았다. 보이스피싱 관련한 글도 브런치 어디엔가 있다.(https://brunch.co.kr/@blueingorange/15)



아무튼 전화를 받자마자, 그 알 수 없는 "보이스피싱범"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ooo컨설팅입니다.
사람인에 올려주신 이력서 보고 제안차 연락드렸습니다.



아, 헤드헌팅이다. 나는 헤드헌팅을 다짜고짜 예고도 없이 유선으로 받는 경우는 처음이라 조금은 당황한 얼굴로 일단 전화를 받았다. 


헤드헌팅이야 당한 적은 많다. 잡코리아 같은 곳에 이력서를 올려놓은 사람들은 대부분 내게 공감할 것이다. 대부분은 내 이력서를 안 읽고 막 제안한 것이 티가 나는 보험사/잡다 일용 사무직/학원강사/최저임금미달... 이런 것들이다보니 나는 헤드헌터에 대해서 일단 부정적인 생각밖에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대충 전화를 잇다가 전화를 끊을 만한 적절한 타이밍을 엿보려고 했다.



그런데 어라? 요놈 봐라. "oo님의 경력과 포트폴리오를 읽어봤는데 이 경력이라면 저희가 찾고 있는 지원자상에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전화드렸습니다."


내가 올려놓은 이력을 줄줄이 세세하게 읊으면서 내 과거 경력에 대해서 꼼꼼하게 캐묻고 확인하지 않나. 


"RA 과정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더 구체적으로 뭘 했는지 말씀해주세요."

"그럼 유사 직무 경험이 있으신 거네요?"

"그 스킬 역량에 대해서 대략적인 그래프 수치로 표현해주시겠어요?"


마치 간단하게 폰 스크리닝 면접을 보는 것처럼.



"회사가 어디라구요? 리디?" 나는 다시 한번 회사명을 확인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리디는 하나밖에 없는데. 


"네, 맞습니다. 리디북스." 미친.



심지어 직무 또한 내가 가장 원하는 UX 연구 직무였다. 전환될 가능성도 있다. 전환되지 않더라도 사실 거기에 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겐 이득이다. 나 같은 글쟁이 이력에 글쟁이 회사 커리어가 추가된다면 그것만큼 내 라이프에 있어서 더 할나위 없는 스펙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회사 성향이 그래서 나와 맞는지에 대한 면에서는 더 할 말이 있지만은..


가장 병신 같은 4번 면접을 보고 난 후로, 가장 좋은 기회가 나에게 제발로 굴러떨어졌다? 이거 완전 액땜한 수준 아니야? 마치 내가 꿈에 그리던 대학을 합격하고 그 다음주에 바로 2000만원 보이스피싱을 당한 것처럼. 


역시 불행과 행운은 한 몸이야. 이렇게 나는 미신에 대한 확증을 향해 더 한 발짝. 



아, 하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나는 보이스피싱을 당한 이후로 모든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으니까.


나는 리디사 채용 공고 페이지에 들어가서 이 사람이 내게 무슨 공고를 추천하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리디사에는 인턴을 뽑는 채용공고가 올라와 있지 않았다.


"지금 리디사 홈페이지에 말씀하시는 공고가 안 올라와있는데요, 어떻게 된 거죠?" 나는 살짝 따지듯이 물었다.


"아, 안 올라와 있을 거예요. 리디사에서 저희 측한테 괜찮은 사람들을 뽑아달라고 의뢰를 한 공고거든요. 일반 지원자들에게 공개되는 공고가 아니예요." 머쓱.


나는 의심 속에 일단 속는 셈 치고 내 이력서로 지원 요청을 하라고 헤드헌터에게 보냈고, 헤드헌터는 내게 이메일로 구체적인 공고 내용을 알려주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가장 먼저 나는 잡플래닛에 들어가 그 헤드헌터 회사에 대한 리뷰를 살펴보았다.


평점이 4점이 넘는다. 리뷰 수도 많다. 일단 오케이. 저질 헤드헌터 회사는 아닌 모양이다.


얼마 후에 헤드헌터는 내게 이메일로 세세한 채용공고를 내게 보내주었다. 확실히 거짓말은 아니다. JD도 꼼꼼히 확인했다. 그 무엇보다도 내가 원하는 직무였다. 


만약 이 인턴 자리를 합격하면, 이 인턴이 비록 인턴 수준으로 끝나더라도 나는 내 꿈으로 향하는 엄청나게 직결되는 우수한 징검다리를 건너는 셈이 된다. 신입에게도 경력을 요구하는 이 비합리적인 세상 속에서, 나에게 좋은 회사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의심은 사라지고 점점 달콤한 상상이 내 머릿속을 메운다.


나는 이메일로 내가 면접을 볼 수 있는 시간대를 기입해서 헤드헌터에게 보냈다. 5번 면접을 본 다음 날이다. 그 날에 이메일로 면접 일정이 확정지어질 것이다. 



나는 그날부터 웹소설과 웹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리디에 대해 빠짐없이 조사해 면접 스크립트를 웹툰 웹소설 러버 맞춤형으로 커스터마이징했다.


사실 나는 웹소설/웹툰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농담이라도 친해질 수 없는 사이였다. 그래서 솔직히 리디와 내가 맞을지는 잘 모르겠다. 요즘은 기업에서 면접을 볼 때 직무보다 문화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니까.


그래도 난 최선을 다했다. 몰입과 갖다버리기는 내 가장 출중한 특기 중 하나니까. 이 순간만큼은 나는 웹소설을 사랑하는 중증 중독자였다. 웹소설 좋아하는 친구한테 추천받아서 읽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5번 면접을 기똥차게 잘 보고 주황빛 얼굴로 신나게 회사에서 나온 나. 


발걸음은 한없이 가볍다. 안 그래도 더운 날 지하철에 사람이 꽉 차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끼이고, 나는 잡을 것조차 없어 구두 신은 발로 무게중심을 잡으러 필사적으로 버티는 중에도 기분이 좋았다.


오늘이 바로 그 헤드헌터에게서 연락이 오기로 한 날 전날이다. 내일, 리디 면접 일정이 나온다. 


5번 면접에 합격해도, 리디 인턴에 합격해도, 어찌 되었던 내겐 이득밖에 없다. 나는 둘 다 합격해서 둘 중에서 어딜 갈지 고른다는 행복한 꿈에 취하기 시작했다.



아주 행복한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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