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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잉오렌지 Aug 24. 2024

말 잘하시네요 이해가 쏙쏙 돼요

정말요? 정말요? 정말요?

"말 정말 잘하시네요. 이해가 쏙쏙 돼서 잘 들었어요. 요약발표 되게 잘하시네요."


"본인 프로젝트에 대해 이해도가 높은 게 느껴져요."


"말 잘하는 거 말고 그럼 또 잘하는 거 있어요?"


내가 다섯 번째 면접에서 PT 발표를 끝내고 면접관님에게 들은 말들.



이 말을 듣고 내가 느꼈던 찬란한 주황빛 기쁨을 다른 사람들은 과연 예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한 15분 뒤에 다시 면접관이 대기실에 들어왔다. 오랜 기다림이었다.


별다른 덧붙이는 말 없이 곧바로 내 면접을 시작했다. 나는 준비해온 자기소개를 마치고 바로 발표 준비를 했다. 자기소개를 경청해서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가 강조하는 키워드를 되짚는 걸 보고 조금 호감을 느꼈다.


이윽고 발표 시간이 되어서 내가 입을 열려던 찰나... 면접관은 내게 하나 당부를 했다.




포트폴리오 내용은 지금 전부 보고 와서 알고 있으니까
이미 아는 거 또 발표해주시지 마시고 요약해서 최대한 빠르게 발표 부탁해요. 
텍스트 그대로 읽어주시지 마시구요.



산 넘어 산. 나는 열심히 준비한 면접 스크립트를 또 전부 몽땅 잊어버려야 했다.



'즉석에서 최대한 빠르게 요약발표'. 이건 본인의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IT의 포트폴리오 면접보다는, 원래 우리가 알고 있는 정석적인 PT면접에 가깝다. 물론 발표자료 자체는 내가 준비하기는 했지만.


여태 나는 나의 프로젝트를 처음 보는 사람 입장에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상세한 설명과 경험을 곁들인 형식으로 발표를 준비해왔다. 여러 번 반복해서 설명을 해줘도 까먹는 게 사람이다. 그래서 최대한 친절하게, 마치 어린아이에게 설명해주듯이 어렵지 않은 단어로 면접관을 이해시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다르다. 이번엔 '설명'을 하면 안 된다. 면접관은 이미 내 자료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발표하는 내용은, 포트폴리오에 들어있지 않은 추가적인 부분 위주가 되어야 한다. 설명을 늘어놓는 순간 마이너스 점수로 직결된다. 면접관은 지루한 내용을 또 듣고 있으니 나에게 흥미를 잃을 것이다.


애초에 진짜 이해하고는 있을까? 내 면접 준비를 하긴 했으려나? 면접날 착각해서 내 면접 준비할 시간이 15분밖에 없었을 텐데? 괜히 발표 전략을 바꿨다가 하나도 이해시키지 못하고 불합격하는 건 아닐까?


즉 스토리텔링이다. 이번에 발표할 것은 포트폴리오 내용이 아니라 분량 문제로 포트폴리오에 채 녹여내지 못한 나의 경험들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서 호기심을 자극해야 한다.


이렇게 해도 될까? 괜히 안 중요한 사담 같아보이는 얘기나 꺼내서 점수를 깎아먹지 않을까? 내 말을 알아듣고 있는 게 맞을까?


내 안에서 여러 상극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것을 무시하고 나는 요약발표를 진행했다.




결과는 최상단에 써놓았다.


잿빛은 주황빛에게 패배했다.



발표를 할 때는 말 그대로 무아지경으로 한다. 내가 뭐라고 씨부리고 있는지 의식하는 순간 발표는 끝이다. 그냥 입이 멋대로 말하게 내버려둔다. 말없는 아이가 낄 틈을 주지 않도록 한다.


나는 정말 말 그대로 물흐르듯이 발표를 진행했다. 평소 긴장하면 말을 빠르게 하는 버릇이 있어서 발음이 매우 꼬이곤 하는데 오늘따라 말이 꼬이는 일이 없었다.



내 포트폴리오에 대한 큰 질문 없이 바로 인성면접.. 아니, 면접 마지막 단계인 회사 및 복지 소개로 들어갔다. 잡플래닛 리뷰를 보면 보통 포트폴리오 심층 질문이 어려웠다고 나와있었는데, 나에겐 그런 심층 질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내 발표 하나로 전부 이해가 된 걸까? 그런 거면 좋겠어. 굳이 질문 안 해도 내 능력이 이미 전부 증명된 거면 좋겠어.



"말 잘하는 거 말고 또 잘 하는 거 있어요?" 면접관이 내게 물었다.

"음.. 글 쓰는 걸 좋아합니다." 나는 글쓰기라는 활동이 비즈니스 세계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면접관은 눈에 띄게 기뻐하는 표정을 지으며 뭔가를 계속 써내려갔다. "마침 저희 회사에 UX Writing 하는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아주 좋아요." 심지어 직무와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글쓰기? 게임 끝이지.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어요? 출근 거리는 어때요? 아, 그럼 가깝네. 우리 회사에도 oo님이랑 같은 지역 사는 사람 많거든요."

 

"파견 계약직이라고 해도 어차피 우리 회사 팀원들이 다 같이 가요. 성과 따라서 매달 성과급 타가는 사람도 있고 전환도 자유로워요. 왜냐면 지금 맡고 있는 프로젝트가 큰 프로젝트라 사람이 많이 필요하긴 한데 그 프로젝트가 끝나면 그만큼 직원이 많이 필요하진 않거든요. 그래서 계약직으로 뽑는 거예요. 근데 만약 정규직 의사가 있으면 당연히 전환할 수 있죠." 


뻔한 말이라고 생각되겠지만 이 사람 말대로 현재 IT 업계 채용 트렌드가 계약직/프리랜서 쪽으로 가는 건 맞다. 에이전시다 보니 프로젝트 규모에 따라 직원이 많이 필요한데, 그래서 직원을 왕창 뽑았다가 그 프로젝트가 끝나면 그 왕창 뽑은 직원들은 전부 다 잉여 인력이 되잖나. 그래서 프로젝트 단위로 프리랜서를 뽑는 회사가 많아졌다고 들었다.



그 말은 즉, 파견계약직이라고 해서 내가 불이익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 인수인계? 돈? 계약직을 뽑는 이유? 내가 걱정하고 있는 사항들을 면접관은 내 맘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딱딱 설명을 전부 해주었다. 


어떻게든 나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현재 진행하려는 프로젝트도 상세히 설명해주었고, 그 프로젝트는 내가 포트폴리오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자기 회사 직원 중, 내가 원하는 회사로 얼마 전에 이직한 사람도 있다며 내게 어필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실력, 복지, 연봉, 그 사람은 뭐 하나 빠짐없이 내게 회사를 어필했다. 그리고 그 어필은 내게 있어 정말 원하는, 합리적인 어필이었다. 또 속는 걸지도 몰라.


편견은 깨지고, 그 자리에 확신이 대신 자릴 잡는다. 부정적인 감정이 긍정적인 감정으로 전환될 수만 있다면, 그 파괴력은 처음부터 긍정적인 것뿐이었던 감정과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커진다. 너 속고 있는 거야.



노골적인 호감. 노골적인 시그널. 호감가는 사람들, 호감가는 회사 분위기.


점점 내 안에 있었던, 이 회사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도, 부정적인 경험도 전부 잊혀 갔다. 


면접일을 착각해? 파견계약직? 뭐 그럴 수도 있지. 주황빛은 그런 것에는 굴하지 않는다. 내가 좋으면 그만이고, 내가 잘하면 그만이니까.



나에게 궁금한 게 딱히 없어서 면접을 빨리 끝내려고 한 걸까.


면접 준비를 못해서 내 면접은 빠르게 넘기려고 하는 것때문이 아니면 좋겠다.



잿빛은 아직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면접은 잘 봤다고 해도 그건 면접관님이 제대로 면접 준비를 못했던 탓일 수도 있어.


면접날짜를 착각한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나한테 더 잘해주려고 했던 걸지도 몰라.


지금은 내가 마음에 들었다고 해도 나중에 다른 직원들이랑 얘기하다 보면 정신 차릴지도 몰라.


정신 차려서 내가 사실 별볼일 없다는 게 들통나겠지.



나는 애써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무시했다. 그건 단순한 잡념만은 아니었다. 전부 논리적이었다. 


2주 후에 면접 결과가 나올 것이다. 나는 기쁘고 설레는 마음과 약간의 잿빛을 동시에 가슴 속에 안고 회사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성숙한 주황빛 직장인으로서 나의 꿈으로 한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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