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잉오렌지 May 18. 2024

면접: 낯선이에게 나를 마케팅한다

말없는 꼬맹이의 첫 컬처핏 면접 도전기

처음엔 두려웠다.


가장 가까운 부모에게도 제대로 할 말을 못하는 내가, 면접이라는 일생 최대로 내 얘기를 잘 풀어내야 하는 자리에서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내 걱정은 완벽하게 기우였다.


낯선 사람. 날 처음 보는 사람.


그런 사람이었기에 나는 내 의견을 두렵지 않게 주장할 수 있었다. 


잘 주장하진 않았다. 내가 냅다 떨어진 걸 보면.







지난 화에 적었던 나의 인생 첫 번째 면접. 면접 제안을 받아 이력서가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헐레벌떡 갔다온 면접 이야기.


아르바이트 같은 걸 제외하고, 내 인생을 바꾸기 위해 진정성 있게 도전하는 첫 번째 면접이었다.


평가당하는 시간. 내 표정, 말투, 답변 내용, 그것들 하나하나 종합해서 나라는 사람이 객관적으로 실력이 있는지 빈 깡통인지에 대해 판단 내리는 시간. 내가 지금까지 하고 놀았던 가면놀이의 가치가 사회에 증명되는 시발점이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나 다름없는 시기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경험이었다.



만약 예전의 나였다면... 도망쳤을 것이다. 평가당한다는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어디든지 내가 평가당하지 않을 만한 곳으로 도피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자대 대학원이라던지. 이미 안면을 익혀왔고 함께 연구까지 진행해와서 이제 와서 새롭게 평가당할 일도 없는 그런 곳이라던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최소한 면접을 보는 행위 자체에는 이제 적응했다. 그 결과에는 아직도 적응하진 못했지만.



나는 업력이 약 9년 정도였던 스타트업의 면접 제안을 받아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 갔다. 갑작스러운 면접 일정 탓에 면접 인강까지 새로 결제해 3일만에 독파하고, 아침에 일어나서(정확히 말하면 밤을 샜다. 나는 원래 중요한 일정이 있는 날은 한숨도 못잔다) 5시간동안 중얼중얼 면접 연습을 했다. 지하철에서부터 슬슬 배가 은은하게 아파와 면접 스크립트를 읽으면서 고통을 잊었다.


지하철역에 1시간 반 정도 전에 도착해, 역 주변을 걸으면서 긴장을 풀까 하다가 처음 신는 구두 탓에 발이 아작이 났기 때문에 얌전히 역에서 앉아 기다렸다(이때 발이 아작난 후유증이 약 2주를 갔다. 개같은 거).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면접 직전이 가장 고통스럽다. 막상 면접을 볼 때는 배가 아픈 것도 모르고 주절주절거리기 때문이다.


면접 15분 전에 회사로 올라갔다. 15분 전에는 회사에 가 있어야 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근데 대기업 면접이 아니라면 그냥 5분 전에 도착하는 게 가장 적절할 것 같다. 면접 때마다 15분 전에 회사에 도착하곤 했는데 다들 당황하시더라. 




면접 분위기를 요약하자면... 그건 정말 '토론'에 가까웠다. 


심지어 뉴스에 나오는 그런 전문적인 토론도 아니다. 그건 정말 '나'를 드러내는 토론이었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본인이 평소에 품었던 철학적인 생각을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드러내야 했다. 나는 면접 준비를 철저하게 내 포트폴리오 기준으로 사무적으로 해갔기 때문에 정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좋게 말하면 진솔한 철학적인 얘기. 나쁘게 말하면 뜬구름 잡는 얘기. 나는 스타트업의 컬쳐핏 면접이란 게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걸 정말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쁘진 않았고, 오히려 뭔가 내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다만 무진장 어렵기는 했다. 예를 들면.. 가장 기억에 남았던 질문이 이거였다.



"인간의 본성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면접관님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이런 질문을 면접자리에서 받아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당돌했다. 내 전공을 살려서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남들과는 다른 의견을 드러냈다는 두려움에 면접관님의 표정을 봤다. 의외로 담담했다.


"저희도 사실 그렇게 생각해요." 면접관님은 나에게 공감해주었다. 정답이었다.



떨어진 건 아마 이 대화 때문이 아닐 것이다. 이것 외에도 "선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런 질문도 받았다. 한번 의견을 말하자 꼬리질문이 들어왔다. 내 얕은 의견에 대해 반박이 들어왔다. 


"그 말은 이런 상황에서는 도덕이란 게 이러이러하단 뜻인가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요?" 아, 무섭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내가 품고 있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의 내 이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공격받고 비판받는다 생각하니, 지금 생각하니까 또 식은땀이 난다. 


이런 걸 어떻게 따로 '면접 준비'를 해? 요즘 면접 진짜 하기 어렵다. 솔직히 다른 회사에서 또 이런 질문 받으면 제대로 대답할 자신이 없다. 이런 질문은 몇번을 받아봐도 절대 적응할 수 없을 것이다. 글 쓰는 거 좋아하고 생각하는 거 좋아하는 나도 어버버거릴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떨어진 이유는.. 내 생각에 아마 내가 회사의 비전과 맞지 않는 인재여서 그랬을 것이다.


아마 그 회사는 내 이런 '뜬구름 잡는 소리를 좋아하는' 성향을 내 포트폴리오에서 파악해 실력이 좀 부족하더라도 면접 제안을 줬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그 회사는 초점을 맞추는 관점이 미묘하게 정반대였다. 면접 초반부, 묘하게 서로 생각하는 방향이 어긋나는 것을 나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상하기 짝이 없는 대화에서 예상도 못한 기묘한 공감선을 느껴서 쓸데없이 기대를 하고 말았던 거지.

 


아무튼 떨어졌고, 본격적인 취준 전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면접이었기 때문에 아쉽긴 했지만 정신적인 충격을 크게 받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나는 이번 면접을 보고 그해가 끝날 때까지 어떠한 면접도 잡지 못했다. 



그때 내가 원하는 회사에게 면접 제안을 받았던 건 한여름밤의 꿈이었을까. 내가 꿈에서 면접을 본 건가, 망상을 한 건가. 그렇게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이 실감이 안 났다. 내가 무려 면접 제안을 받고 면접을 보고 왔던 것도, 지금 이렇게 몇 달동안 아무런 서류합격 소식이 없는 것도 전부 실감이 안 났다.



서류에서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고쳐도 또 떨어지고..


떨어지는 이유라도 정확하게 알고 싶었지만, 떨어지는 이유는 고사하고 합격 불합격 통보조차 해주지 않는 곳이 태반이다. 나는 취준을 하면서 세상에 대한 기대치가 밑도 끝도 없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현실에 있어서, 당연한 건 그 어떠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면접에서 떨어진다.


여러 가지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겠지만, 그 여러 이유가 나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넌 여기와 어울리지 않아.




수많은 달콤한 미사여구 속에서 나에게 전달되는 의도는 그것 하나뿐.

이전 05화 뭐? 이력서 다 쓰지도 않았는데 면접 제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