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안 했는데 무슨 포기냐고 말하지 마라 슬프니까
전공자는 뭘까?
4년동안 관련 지식을 배웠다? 직무 경험을 대학에서도 배운다? 그 지식들을 빡세게 익혀나가면 비전공자도 전공자만큼 잘할 수 있어?
완전 틀린 말은 아니지만, 포커스를 맞춰야 하는 부분이 조금 어긋나있다.
그런 피상적인 것들을 넘어서 '전공자'라는 스펙에는 더 큰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것이 바로 전공자와 비전공자의 차이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스킬.
1년을 가까이 뻘짓하고 나서 깨달은 건, 내가 UX 디자인에 재능이 없다는 거였다.
디자인 부트캠프를 수료한 건 어디까지나 그냥 내가 수료했다는 것이고 그게 내 실력과 재능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그림 그리기엔 별로 재능이 없단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UX 디자인은 그냥 그림그리기가 아니니까 괜찮아'라는 말만 믿고 계속 갔다. 실제로 UX 디자인은 그냥 그림 그리는 일과는 동떨어져 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까지 UX 디자인에 한해서만 생각을 하고 있었다. UX 디자인에서 요구로 하는 스킬만 배우면 된다고. 피그마, 유저 리서치, 와이어프레임, 프로토타이핑. 적당히 앱 분석해서 구조 파악하고 똑같이 그려서 간격 칼 같이 맞추기. 피그마 같은 좋은 툴이 많이 나와서 복잡한 어도비 툴이 없어도 큰 어려움 없이 실력을 키울 수 있다며.
실제로는 전혀 아니다. 캠프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바로 디자이너 지망생이 보통 가지고 있는 관점과 기초적인 디자인 스킬이다.
실제로 취업 시장이 요구하는 스킬은 단순한 UX 디자인 스킬이 아니라, 그걸 포함해서 좀 더 포괄적인 디자인의 영역이었다.
심미성. 영감. 나아가서 어도비 툴 다루는 실력, 포트폴리오 구축하는 법, 디자인 정보와 인사이트 찾는 아카이빙 습관, 매일 같이 인사이트를 얻고자 하는 습관, 예쁜 걸 숭상하는 취향, 디자인 업계에서의 용어와 커뮤니케이션 능력 등등.
그건 보통 디자인 전공자라면 '당연하게' 깔고 가는 스킬들이었고, 채용공고에서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자산이다.
심리학과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아주 '수우우웅고한 철학'을 해왔던 나와는 거리가 먼 스킬들이었다.
이런 관점 차이가 바로 채용에서의 승패를 가른다. 생각하는 방식. 성격. 취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이것들이 전부 대학에서의 4년에서 굳혀진다. 대학의 커리큘럼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중요하다(자기 전공에 몰입도 있게 다녔다는 가정하에).
이공계 대학을 나온 사람과 미대를 나온 사람은 당연히 사고 체계가 다르다. 그렇게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숫자만 보고 자란 사람과, 한글만 보고 자란 사람은 지식의 차이를 넘어 성격까지 다르다. 개인차가 있다고 해도 경향성이란 게 있지 않나.
주구장창 글 쓰는 법만 배워온 나와 주구장창 디자인을 배워온 사람은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 나에겐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미대 출신에게는 당연한 일이 된다.
채용 담당자가 비전공자를 떨어뜨리는 것은, 단순한 실력과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난 이제서야 깨달았다. 바라보는 시야와 쌓아온 경험은 그냥 강의에서 주어지는 지식을 익히는 것으로 깨우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들은 습관이며 취향이며 일상이다. 실력은 그것들이 전부 뒷받쳐진 이후에 따지는 것이다.
나는 포트폴리오라는 게 뭔지도 모르고 공부를 시작했고, 남들이 포트폴리오에 뭔 내용으로 채울까 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포트폴리오는 무슨 형식, 무슨 툴로, 무슨 사이즈로 만들어야되지? 1920픽셀로 만들어야 하나? 근데 픽셀이 뭐지?'라는 기초 상식부터 고민을 하고 있었다.
피그마를 다룰 줄 안다고 UX 디자이너는 아니다. UX 디자인 위에 있는 더 넓은 범주, 디자인 분야에서 요구되는 스킬이 나에겐 없었다. 마치 전공 자체는 별로 보진 않지만 4년제 대학을 나온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채용공고와 같다. 전공에서 뭘 공부했냐가 아니라, '대학생활을 통해 사회생활을 해봤냐'를 보는 거니까.
웃기게도 나는 UX 디자인 일을 정말 재밌게 배웠다. 하나하나 몰입해서 배웠다. 다른 교육 플랫폼에 구매할 인강만 수두룩하게 채워놓고 할인할 때마다 쟁겨놔서 배우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꼈다. 내 인스타그램 피드엔 디자인 관련 아티클과 피그마 팁, UX 팁이 가득했다. 블로그에도 매일 같이 학습일지를 올렸다. 공부하는 것,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 또한 힘들었지만 재밌었다.
아무리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 쏟아부은 재밌는 일이라고 해도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아무리 내 작품이 내 새끼마냥 예쁘다고 해도 칼 같이 싹둑 잘라낼 줄 알아야 한다. 갈아엎는 걸로는 모자라서 나는 전부 버리고 새로 만들었다. 내가 몇날 며칠 정성스럽게 써낸 장문의 포트폴리오는 그냥 자기만족용으로 창고에 쳐박아두었다. 그 대신 보여주는 용도에 걸맞도록 새롭게 다시 짜냈다.
나는 그렇게 버리고 갈아엎고 잘라내는 걸 반복했고, 그럼으로 인해서 간신히 깊은 우물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