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로 통일 좀 하라고
나는 이전에 내가 회의를 리딩하고 있을 때 어머니께 받은 '평가'를 떠올렸다. 정작 중요한 디자인은 하지 않고 내용 검수와 피드백, 리서치만 붙잡고 있었던 나의 프로젝트 경험 또한 떠올렸다. 그리고 부트캠프를 수강할 당시의 멘토님의 평가도 떠올렸다.
"혹시 디자이너 말고 기획자가 되실 생각이신가요?"
아, 역시 솔루션은 나 자신이 아니라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 우물 바깥으로 빠져나가면 해답이 보인다.
'지금까지 해온 게 아까워서'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면, 그 말은 그 즉시 해온 걸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튼 직무를 바꾸었으니 그에 맞게 자기소개서를 고쳐보자. 기획이랑 디자인은 웬만하면 같은 틀에 묶여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직무를 바꾸는 것도 용이하다. 강조하는 역량을 기획에 맞게 바꿔서 이력서랑 포트폴리오를 고치면 되겠지?
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자, 시작해보자.
일단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부터 난관이다. 난관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기획자가 뭐하는 직업인지 잘 모르겠다. (직무의 모호성)
2. 그 알아낸 직무에 필요한 스킬과 역량이 뭔지 잘 모르겠다. (직무에 대한 이해)
3. 그래서 알아낸 그 스킬과 역량을 내가 보유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메타인지)
4. 기획자라는 직무가 정말 실존하는 걸까? (??????)
모호함과 모호함의 연속. 4번이 농담 같지? 기획자에 대해 조사하다보면 진짜 그런 생각이 문득 들곤 한다.
일단 해당 브런치북에서는 1번만 다룰 예정이다. 나머진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매거진에 시간 나면 써볼 예정이다.
그래서 기획자가 뭔가요?
내가 느낀 차이는 이거다. 일단 난 대기업 공채는 넣어본적이 없으니 그쪽은 잘 모른다. UX 관련해선 대기업에서 쌩신입을 잘 뽑지 않을 것이며 그중에서도 기획자는 특히 안 뽑을 것이다. 사실 기획자는 원래 공고 자체가 별로 없다. 그래서 그냥 평범한 중소 정도 선에서 기획자 이름별 특징들을 소개하겠다.
내 체감상 UX기획이라고 이름 붙인 경우 비교적 트렌디한 명칭으로 완전 기획 전문가보다는 디자인 쪽에도 비중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중요한 역량은 UX 역량이다.
디자인 일을 병행한다는 소리는 아니고(병행하는 곳도 드물게 있다), 디자인 싱킹처럼 원론적인 디자인적 사고를 중시하거나, UX 이론 및 리서치, 통계분석 등등을 중시하는 경우다. 내가 지금까지 가장 서류합격률이 높았던 게 이 기획자였다.
그리고 또, UX 기획 공고는 서비스 기획이란 명칭도 함께 쓰고는 한다. UX 기획/서비스 기획, 이렇게.
하지만 난 UX 기획은 다른 기획자들과 확연하게 직무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서비스기획 공고는 못 붙고 UX 기획 공고는 붙는 것이다. 그 차이는 다음과 같다.
1. 'UX'라는 명칭은 대기업에서는 별로 안 쓴다. => 에이전시에서 많이 쓴다. 에이전시는 뭐다? 각자 특정 직무의 전문가들의 집합소다. 즉 UX 전문가, UXer가 되고 싶다면 대기업/스타트업이 아니라 에이전시를 가야 한다.
2. UX 역량은 서비스 기획 직무에서는 '의외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물론 중요하긴 하지만, 서비스 기획 및 PM은 UX 말고도 신경 써야 할 게 너무나도 많다. 오히려 데이터 분석 역량을 더 키우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UX 기획은 UX 전문가이며, 서비스기획 및 PM은 제네럴리스트다.
3. 그렇다고 UXer가 목표인데 서비스기획자 공고를 거들떠도 안 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직무 명칭은 회사마다 제각각이다. 중요한 건 JD이니 그거 잘 보자.
앱/웹 기획인 경우는 가장 올드한 경우다. 이쪽은 잘 모르겠다.
오래된 소규모 에이전시에서 이 이름을 많이 사용한다. 퍼블리싱을 겸하는 경우나 아니면 개발 지식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혹은 아예 개발과 병행하거나). 그래서 나는 이쪽은 거의 지원하지 않았다.
서비스기획자라고 이름 붙인 경우 PM과 보통 큰 차이는 없다. 이쪽이 원래 정석적인 명칭일 것이다.
다만 가끔 확연한 구분선이 생길 때가 있다. JD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1. 좀 올드한 분위기의 에이전시인 경우엔 우대사항에 Microsoft, 컴활 같은 자격증이 생긴다. UX 기획과 통틀어서 직무를 묶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니 JD를 유심히 잘 봐야 한다. 하는 일은 주로 문서 작성, 정책 파악, 그리고 회의와 회의와 PT.
2. 대기업은 서비스기획이라고 부르는 경우를 많이 봤다. 이 경우는 디자인적 색채가 줄어들고 이공계/사업/경영 쪽 색채가 늘어난다. 데이터와 비즈니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난 하기 싫다.
서비스 기획자는 정통파 기획자다. 후반에 전략경영 쪽으로 발전할 수 있으나, 이것저것 알아야 하는 게 많으므로 부트캠프에서 최신 유행에 맞게만 딱딱 배운 사람들과는 잘 맞지 않는다. 또한 올드한 회사의 경우 UX의 비중이 거의 없는 곳도 많다. 나는 심리학과 출신이다보니 아무래도 유저 리서치하는 걸 좋아해서 어필해보았지만, 유저 리서치를 하지 않는 곳도 있고 리서치를 통째로 외주 주거나 비중을 안 두는 곳도 많아서 통하지 않았다.
PM이라고 이름 붙인 경우는 스타트업에서 많이 쓰는 이름인데 가장 트렌디한 명칭이다. 업무 범위가 좀 더 넓고 개발 지식이 있는 지원자(이공계를 우대하는 경우가 많다)를 선호하며 신입보다는 경력을 선호한다. 기획 그 자체보다는 커뮤니케이션, 스케쥴링, 데이터 분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는 PM이라고 적힌 공고는 대기업 계열사 AI 스타트업에서 인턴 서류합격 딱 한번 해보고 나머진 나가리였다. 뇌피셜 한번 써보자면 스타트업/PM의 경우는 순수 UX 전문성보단 다양한 경험을 해본 것 자체를 더 중요시하는 것 같다(해외, 공모전, 대외활동.. 꼭 기획과 상관없어도 그냥 다양한 경험). 난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PM 포함해서 대부분의 트렌디한 기획 직무가 가져야 할 필수 역량은 능동성과 넓은 시야다. 주입식 교육과 암기 공부에 익숙한 분이라면 기획 직무는 못하실 것이다. 특히 스타트업의 경우 면접에서 정말 사전에 준비한 게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씽크빅한 꼬리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직무에 대한 이해 이전에 본인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다 비슷비슷해보이지만 직업명을 괜히 다르게 쓰지는 않는 것 같다. 뭔가 미묘하게 다르다. 같다고 볼수는 없지만 취준생 입장에선 차이를 잘 모르긴 하겠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요약하자면 내 느낌상 이거였다. 취준생 입장에서 쓴 거니 믿지는 마시길.
서비스기획: 에이전시 or 대기업, 정통파, 체계적인 글과 말솜씨 필요함, 비즈니스적 이슈 파악 중요함
PM: 스타트업, 트렌디, 수평적 커뮤니케이션 중요, 슈퍼 제네럴리스트, 데이터드리븐, 유저 중심적
서비스기획도 커뮤니케이션 당연히 중요하긴 한데(대부분의 직무에서 커뮤니케이션 중요하지만 기획자는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직무다. 나 어쩌다 대체 이런 직무를 선택해버린 걸까), 에이전시에서 서비스기획이란 말을 많이 쓰다보니 클라이언트와의 커뮤니케이션과 PT를 중요시하는 경우가 많고.. PM은 스타트업에서 많이 쓰다 보니 같은 팀원, 그리고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과의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중요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다 보니 PM은 포트폴리오 발표를 중시하진 않지만 에이전시는 발표 시키는 경우가 많다. 정확히 말하면 스타트업은 내 이력서/포폴을 꼼꼼하게 읽고 그거 바탕으로 심층적인 질문을 던진다. 에이전시는 안 읽는 경우가 많긴 한데 꼼꼼히 읽고 들어오는 분들도 있다(당연한 거지만 이력서 안 읽고 들어오는 게 잘하는 짓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냥 평균이 그럴 뿐). 다만 읽는 것과 별개로 발표를 시킨다. 자기 포폴 내용 숙지 및 후속질문 고민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또 PM은 흔히 부트캠프 같은 데서 배우는 최신 기술을 한다. 예를 들면 GA, SQL, 스프린트, 유저 리서치 등. 그외에도 협업으로 뭔가 툴을 잔뜩 쓴다. 그걸 여기 굳이 다 적진 않겠다. 회사마다 다 다르거든. MD, 마케팅을 PM이라고 부르는 회사도 많다. PM이라는 이름 자체가 흔하다. 매니징 하는 거면 싹 다 PM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같은 PM이라도 프로젝트 매니저와 프로덕트 매니저는 다르다. 여기까지 하겠다.
채용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의 실력이 아니다.
나의 경쟁자들. 채용 담당자 컨디션. '회사 내부 사정'.
이런 것들을 조합해서 우리는 운이라는 한 단어로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