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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잉오렌지 May 04. 2024

야, UX디자이너는 개나 소나 다 하냐?

멍.

자, 마음 정리도 다했으니 IT에 입문해볼까? 


UX, 디자이너, 개발자, 애자일? 린? 스타트업? 에이전시? 중소기업? 대기업? MVP?


갓 취준에 입문한 취준 준비생인 나, 이중 아는 단어는 중소기업과 대기업밖에 없다. 나는 원래 디자이너라고 하면 패션 디자이너밖에 없는 줄 알았다. MVP? 게임에서 가장 잘한 사람 말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뭘 먼저 알아야 할까? 내가 여태 걸어온 발자취를 토대로 한 번 고민해보자.



- 미적 감각에 대한 어중간한 재능.


- 이공계에 대한 어중간한 재능.


- 나름 도전하는 삶을 살았다고 지껄이지만 여전히 도전보단 순종하는 것에 좀 더 익숙한 어중간한 재능.



그래서 이 어중간한 영혼은 세상에 무엇을 이뤄낼 수 있을까?






자, 객관적으로 나의 실력을 한번 바라봐보자. 


나는 현재 맨땅에 헤딩을 하려고 하고 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차갑지만 풍요로운 온실속에서 자라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는 나는 생각을 멈춘 채 일단 덤볐다. 나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상념과 걱정을 몇 시간씩 붙잡고 있는 불안증적인 사람이지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일을 진행하고 나면 생각에 빠져있을 시간도 없이 일에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나는 객관적으로 보면 사람들에게 '아니 왠 디자인? 네가?'라는 소리를 들을 텅텅 빈 제로베이스 비전공자다. 포토샵? 잘 모른다. 내가 디자이너로서 내세울 수 있는 건 중학교 때 잠깐 끄적였던 낙서 실력이 전부다. 미쳤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시작했다. 시작해야 한다. 


남들이 '비전공자인데 UX 디자인 가능할까요?' '나이가 있는데 이제와서 UX디자인 공부해도 될까요?' 이런 게시물을 올리며 합리적인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나이도 많고 비전공자인 나는 인터넷 커뮤니티 창을 전부 닫은 대신 지갑의 문을 활짝 열었다. 


'전공자든 비전공자든 내가 지금 더 공부해서 전공 지식 쌓으면 되는 거 아니야? 다 핑계 아니야?' 


오만하고 안일한 생각.



나는 과감하게 UX 디자인 공부에 손을 댔다. 스스로 강제로 내 손을 끌어당겨 일을 저지르게 만들었다. 이렇게라도 안하면 편집증적인 나는 영원히 일을 시작하지 못할테니까. 내가 내 성격에 적응하기 위해선 이 방법뿐이다.



나는 나의 허허벌판인 지식을 채워줄 곳으로 학원과 부트캠프 중에서 고민해야 했고(유튜브는 노베이스 비전공자가 갈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원 특유의 속박이 싫어 부트캠프를 신청했다. 


부트캠프에서의 생활을 구구절절 써내려갈 생각은 없다. 나는 사실 부트캠프의 커리큘럼대로 따르지도 않았다. 


나름 열심히 하긴 했다. 하루 10시간씩 잡고 취준에 매진하긴 했지만 캠프에서 원하는 방향과는 막상 다른 방향으로 매진했다. 완전 독학은 무서워서 부트캠프를 신청한 주제에 꼴에 자존심은 있다.



그리고 10시간씩 잡고 공부하는 건 내게 있어선 노력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였다. 왜냐하면 수십명 가까운 인원 중에서 오직 나만이 진짜 쌩신입 비전공자였기 때문이다. 아, 부트캠프는 신입용이 아니라 이직용이구나. 난 이걸 들어와서야 깨닫고 말았다.


전공 없고, 경력 없고, 인맥 없고, 실력도 없고. 남들 다 하는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회피하고자 아등바등 기를 썼다. 그래서 이렇게 공부해도 동기들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팀 프로젝트를 했는데 나만 빼고 전부 8년차 이상의 고연차 디자이너였다고 하면 믿으실 텐가? 진짜 나처럼 아무 경력도 스펙도 없는 비전공자들은 대체 어디서 뭘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는 걸까?


배움이 늘어날수록 내가 배우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과의 괴리감은 심해진다. 묘하게 서로 관점이 어긋나는 듯한 그 느낌을 아는가? 나는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내 팀원들은 글을 줄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디자이너라면 자고로 글을 줄이는 게 터무니없이 맞다. 아마 디자이너가 아니더라도 웬만하면 글은 줄이는 게 미덕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소설가가 될 수는 없잖아. 줄이라면 줄여야지.. 그렇게 나는 디자이너에 맞춰서 내 능력을 다듬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때는 몰랐다. 



나는 나름 같은 팀원들에게 인정을 받아왔다. 비전공자인 나는 목표를 '정석적으로 디자인은 잘 못하지만 다른 전공 경험으로 남들이 흔히 가지지 못하는 특수한 재능으로 차별점을 두는 디자이너'로 잡았고, 이 목표를 통해 내 형편없는 디자인 실력을 아주 손쉽게 합리화했다. 역시 나는 나 자신마저 훌륭하게 기만해내는 능력자인게 분명하다. 특수한 재능이 뭐냐고? 


심리학에서의 연구 경험이 내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논리, 분석, 요약,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은 미대 출신이 (상대적으로) 가지기 어려운 소프트 스킬이고, 확실히 내가 전공에서 배운 건 있다. 그 배운 게 명시적으로 티가 나지 않아서 막상 취준엔 전혀 도움이 안될 뿐..


그리고 그 '특수한 재능' 덕분에 나는 8년차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도 나 나름 존재감을 뽐낼 수 있었다. 나는 리서치한 것들을 통합해서 정리했고, 내용 작성하는 걸 거의 다 도맡아했다. 


신입인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냐고, 저번 팀 프로젝트에서도 oo님 없었으면 진행 못했을 거라고, 나는 팀원 두 명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다.



행복했다. 하루 10시간 공부? 별로 힘들지 않다. 내 노력을, 내 실력을 인정만 해준다면야.


아, 공부할 때가 가장 행복할 때라는 걸, 나는 충분히 깨닫고 있다. 딱 그랬다.


왜냐하면 공부하고 있을 땐, '이 공부를 함으로써 나는 미래에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라는 확고한 믿음이 생긴다. 나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같은 처지의 동기들끼리 서로에게 영양가없는 위로와 격려를 반복하다보면, 정말로 내가 성공할 것이라는 착각이 확고하게 내 마음에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특수한 재능은 결국 특수일 뿐이다. 특수한 상황에서나 도움이 되는 사람 말이다.


세상은 보편적인 사람을 원한다. 보편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 말이지.



특수한 재능이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건 맞다.


하지만 그건 보편적인 실력이 뒷받쳐준 후에 따지는 이야기다.


특수한 재능'만' 있다면 그건 그냥 등신이다.


그게 바로 나다.






그렇게 우리 팀은 프로젝트 내내 밤 늦게까지 같이 회의를 진행했고, 약간의 의견 차이는 있었지만 화기애애하게 보냈다. 결과물도 나쁘지 않았다. 평일에 늦게까지 하는 대신 주말은 주말대로 챙기고, 프로젝트가 끝난 후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에게 축복을 보내며 마무리했다.



어느날, 어머니가 나를 부르셨다. 



"너 회의하는 거 완전 팀장 같더라."



나는 이 말을 듣자마자 내가 방에서 회의하는 모습을 어머니가 몰래 엿듣고 관찰하고 있었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신입인데 너무 나댔나? 아니면 밤인데 너무 시끄럽게 굴었나?



"뭐 어떤 거 말하는 거야?"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억누르고 어머니에게 되물었다.


"아니, 너 말하는 거. 말투." 하지만 어머니는 기분 좋게 웃으셨다. 말투? "말투가 완전 리더 같다고. 너가 리드하는 줄 알았어." 어머니는 내가 했던 '대사'들을 그대로 읊어내려가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라고. 밖에서 말고 집에서도 그렇게 하라고 좀.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긴장으로 쿵쾅대는 심장은 흥분으로 변모해간다.


말투에 대한 칭찬. 한때는 말없는 아이였던 나에겐 그게 그 무엇보다도 큰 칭찬이자 인정이다. 나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감추고 속이고 기만하는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잘 연기하고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가장 인정받고 싶었던 사람에게 인정받는다. 그것과 동시에,



마음속에서 이상야릇한 불쾌감이 솟아오른다.


감시. 평가. 가면. 내가 가장 사랑하면서도 가장 증오하는 단어들.


평가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내가 꾸며낸 모습을 세상에 평가받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는 나.


그럼에도 아직도 말없는 아이를 사랑하는 나.


세상에서 유일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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