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사람들의 대표주자다. 나는 신중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내 몸은 중요한 상황일수록 아주 생각 없이 움직이곤 한다. 나는 쓸데없는 일에 쓸데없이 예민하고, 정작 중요하게 고민해야 할 때는 고민하지 않는 괴상망측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래서 일단 대학원을 때려쳤다. 그리고 이제서야 고민을 시작해본다.. 나의 커리어 첫 단추를 꿸 수 있는 직업은 뭐가 있을까? UX로 가겠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뭐? 거기에도 직무가 여러 개가 있잖아.
이때 나는 이상적인 직업을 찾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때의 나는 그냥 하루빨리 회사에 출근을 하고 싶었다. 중소기업이라도 상관없었다. 내가 내 능력을 합리적으로 펼칠 수 있는 곳이라면. 나의 이 바람이 그렇게 큰 꿈이었는지는 취준하기 전엔 몰랐다.
그리고 눈치가 보였으니까. 누구한테?
부모님.
과거, 전공을 바꾸고 재수에 도전하려던 나에게, 부모님이 준 시간은 단 1년이었다.
그리고 그 1년의 도전을 성공해버렸기 때문에,
지금의 도전도 당연히 성공해야 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난 1년이라는 시간 안에 빡세게 새로운 직무를 배우고 취준을 완료해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야 했다.
되지 못하면.. 아무리 그래도 취업을 못한다고 방구석에서 쫓겨나지는 않겠지만은.
내 가면에 금이 가게 되겠지. 부모님에 의해서도.. 나 자신에 의해서도.
약속을, 의무를 지키지 못했으니까.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데 실패했으니까.
안 봐도 뻔하다. 내가 그런 실패한 나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게 될지.
나를 물어뜯는 가장 거대한 괴물은 나 자신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나섰고, 몇 가지 조건을 걸고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1) 내가 도전은 해볼 수 있을 만한,
2) 몇년 안에 직업 자체가 사라지지 않을,
3) 일을 배우기 위한 교육 인프라가 잘 잡혀있어 빠르게 취준 단계로 들어갈 수 있는,
4) 알바 말고 정규직
을 찾기 시작했다.
디자인, 개발자, 퍼블리셔, PM.. 이 정도가 후보선상에 들어왔고, 나는 소거법으로 하나씩 직무를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코딩? 못해. 개발자랑 퍼블리셔 아웃. 아무리 연봉이 높다고 해도 코딩은 나라는 사람과는 절대로 맞지 않다. 속박되는 느낌이니까.
사람 관리? 계획짜기? 회의와 발표 리딩? 절대 못하지. PM 아웃.
특히 나 같은 인간에게는 더더욱 아니다. 나는 인간관계를 맺는 걸 싫어하니까. 게다가 나는 계획을 짜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그 계획을 깨부수는 걸 더 좋아하는 인성파탄자다.
미적 감각? 디자인? 흠..
내심 나는 예전부터 디자인이란 것에 로망을 갖고 있었다. 내 첫 번째 꿈이 화가였고, 첫 번째 취미가 그림그리기였기 때문에 그런 걸까(그런 것치곤 그렇게 잘 그리진 않는다). 그래서 디자인, 예술, 아름다움.. 이런 글귀만 보면 자동으로 눈이 돌아가게 된다. 실제로 내 재능은 예쁘게 화려하게 꾸미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로망이란 게 그런 거잖아? 내가 못하니까 동경하는 거지.
그런데 무엇보다 UX 디자인은 그런 '예술적인' 디자인과는 조금 달라보였다.
심플. 미니멀리즘. 실용적인 디자인. 이런 말이 내 머리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나는 또 뒤도 돌아보지 않고 UX 디자인 부트캠프를 신청했다. 신청하고 나서 부모님께 얘기를 드리러 갔다. 부모님에게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를 제시하는 편이 훨씬 더 효과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예전부터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진로에 대해서 고민하는 과정은 부모님껜 일절 말씀드리지 않았다.
아.. 그전에 대학원을 포기했다는 것 먼저 말씀드려야지.
"엄마, 나 그냥 취업하려고." 어머니께 말했다. 어머니는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잘 생각했어."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결정한 직무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고, 내가 대학원을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한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를 달달 쏟아냈다. 가지 못하는 이유 말고. 가지 않는 이유.
내심 어머니도 내가 대학원에 가는 걸 걱정하고 있었나보다. 우리 어머니는 예전부터 워커홀릭이였고, 그래서 내가 대학원을 때려치고 취업을 하겠다는 것에는 전혀 반대하지 않고 나를 응원해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