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졌다.
여섯 번째 면접, 스타트업 면접의 결과가 다섯 번째 면접의 결과보다 빠르게 나왔다. 그게 내가 여섯 번째 면접 얘기를 먼저 쓴 이유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와 변함없는 안정적인 불합격 결과를 받았다. 여전히 내 삶엔 아무 변화도 없다. 아무런 조짐도 없다. 그냥 가끔씩 그럴듯한 희망고문을 하면서 날 오랜 잠에서 깨워줄 뿐.
그러나,
내 삶엔 변화가 없었으나, 내 마음 속엔 점점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내가 취준을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1년이 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반년동안 공부를 해서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반년동안 서류를 넣고, 그렇게 1년.
약속 시간이 점점 끝을 바라며 내게 다가와, 나의 목을 서서히 조르기 시작한다.
"너 이제 좀 있으면 1년이야. 1년이나 시간 낭빌 했어."
알았어.
"안 그래도 넌 다른 애들에 비해서 대학교때 몇년을 시간 낭빌 했는데. 신경을 써야지."
알았다니까.
"너 조금 있으면 서른이야. 나이도 생각해야지."
그 '시간 낭비'란 누구의 생각일까.
그건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의견이 아니다. 나의 세상.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이 나를 바라보는 의견들이다.
세상은 계속해서 빠르게 변한다. 내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기술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인식이 바뀌고 지금 내가 숨을 쉬는 이 짧은 찰나에도 무수히 많은 것들이 변한다.
하지만 나의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나를 둘러싼 가까운 세상의 생각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나는 어머니의 조언에 은연중에 섞여 드러나는 '나를 바라보는 방식'을 발견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역겨움에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어머니는 그런 식으로 본인의 생각을 세상의 생각이라며 예쁘게 투영해, 객관적인 조언으로 보이게끔, 나를 자극시키려고 한다.
취업을 포기한 사람들이 최고 수치를 찍었다. 휴학은 대부분 평균이 2년에서 3년. 서른 살에 취업은 고사하고 서른 살에 대학교 1학년으로 입학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멀리서 예시를 찾을 필요도 없이 내 후배들이 그랬다. 전부 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원하는 것, 바뀌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 고민하기 위해 잠시 멈춰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들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포함해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망설이고 생각한 시간들을 단 한번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 '시간 낭비'가 있었기에 나는 지금 달릴 수 있다. 남들보다 더 빨리.
그리고 수많은 익명의 온라인 작가들 또한 그렇게 말한다. 도전, 꿈, 고민, 성장, 주체성. 듣기만 해도 달콤한 단어들. 단순히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달콤한 위로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우물 안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객관적인 데이터가 될 수도 있다. 그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달콤한 위로가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성과가 필요하다.
내가 얼마나 성장하고 노력하고 견뎌냈던 간에,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건 '약속을 깬 게으른 아이'. '아무것도 안하고 집에서 노는 백수'. '철없이 시간 낭비나 하는 아이'. '대기업도 못 가는 백수'.
그럼 내가 말하는 성장이야말로 전부 거짓말이 된다.
그렇게 나는 내가 지금까지 나를 살리기 위해 해왔던 성장이라는 이름의 필사적인 합리화와, 바깥 세상이 내게 속삭여주는 달콤한 합리화, 나의 작은 세상이 나를 힐난하는 '객관적인' 합리화 이 세 가지 의견 속에서 헤매고 있다. 이 세 가지 합리화가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다. 왼쪽으로 가라, 오른쪽으로 가라, 중앙으로 직진해라라는 명령이 동시에 내 머리를 자극한다.
누구의 말이 맞아?
누구의 합리화가 맞아?
지금은 어머니의 말이 맞다. 아직 내 세상은 이 넓은 세계가 아니라 작은 우리집 우물속 뿐이니까.
하지만 나는 우물 밖으로 나가고 싶어.
면접을 보고 일주일 정도 지나서 불합격 메일을 받았다. 나는 면접을 보면서 그 회사의 전문성에 감탄하고 내심 매우 가고싶었지만, 합격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직감하긴 했다. 실제로 그 회사는 경쟁률 또한 매우 높았다. 대기업 계열사라 아무리 신생 기업이라고 한들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연봉도 셌으니까.
나는 불합격 결과를 예상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나에게 있어 '합격'이라는 단어의 느낌은.. 잔잔하다. 평온하다.
내 기억에 남는 합격 경험은 내가 자퇴를 하고 두번째 대학에 합격했을 때가 유일했으며, 그마저도 그리 간절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맞다. 나는 그때도 간절하지 않았다. 기쁨은 잠시였다. 나는 내가 자퇴를 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과정에 기쁨을 느낀 대신 그 결과물, 합격이란 결과에는 큰 기쁨을 느끼지 않았다.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왜 당연한 거라 생각했을까. 왜 기쁨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을까. 그렇게 도전하고 나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과정을 즐기고 사랑했는데, 막상 그 도전의 결과물에는 난 전혀 관심이 없었다.
불합격도 마찬가지다. 밤을 새우고 목이 나갈 정도로 연습하고 포트폴리오 자료도 세개, 네개까지 준비했다. 그 아무리 작은 회사라도 나는 진심으로 사랑했다. 내가 들어갈지도 모르는 회사, 내가 정성을 다해 고르고 정성을 다해 준비하는 회사이니까. 나는 면접을 보는 회사마다 진심으로 각 회사의 비전, 프로젝트들에 몰입하고 공감하고 애착을 가졌다.
하지만 그런 몰입의 가면은 불합격 결과를 받자마자 언제 있었냐는 듯 빠르게 휘발되어 사라진다. 내가 바라는 대로. 원래부터 내 세상에 전혀 있지 않았던 것처럼 존재가 빠르게 잊혀져 간다.
결과는 나에게 있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몰입하는 그 과정, 고민하는 과정, 갖다버리는 그 과정 자체를 즐겼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성과를 중요시하는 내 세상에 대한 반발심일지도 모른다. 내가 일부러 결과물은 등한시하고 과정에만 집중하는 건.
아니면 나 자신을 다시 잿빛으로 돌리지 않기 위한 발악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깊게 타인의 평가를 흡수하는 내가, 불합격이라는 명백하게 좌절적인 결과를 받고도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스린 결과가 이 '무뎌짐'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내가 게으른 답 없는 인간이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 합격해서 직장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보다, 지금 당장의 평온이 깨져 일상이 바빠지는 것이 더욱 부담스러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셋 다일 수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