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다 생각했던 것을 잃었을 때, 그 상실감은 너무나 크게 다가온다. 나에게는 ‘걷기’가 그랬다.
왼쪽 발목 인대가 찢어졌다. 이번으로 세 번째다. 조금이라도 키가 커 보이려 신었던 높은 깔창의 운동화가 원인이었다. 사람이 가득한 강남대로변에서 발을 접질려 고꾸라졌다. 아픔보다는 창피함이 더 커 벌떡 일어나 멀쩡한 척 걸어왔지만, 다음 날 아침 바로 알았다. 한동안 제대로 걷지 못하겠구나. 한 달 전 집 현관에서 넘어져 발등뼈가 부러졌던 룸메이트는, 우리 집에 ‘발병’이라는 전염병이 도는 게 분명하다며 자조했다.
깁스를 푼 지 얼마 안 된 룸메이트가 목발 짚는 법에 대해 조언해주었다. 목발을 20cm 정도 앞으로 옮기고, 딱 그만큼만 전진하라고 했다. 욕심을 내서 성큼성큼 걸으려고 했다가는 또 넘어져서 다른 곳도 부러질 수 있다며 겁을 주었다. 걷는 일이 이토록 힘겨운 일이었던가? 평소 걸음이 빠른 나는, 원래 내 속도라면 이보다 10배는 빨랐을 거라며 답답해했다. 그리고 평소엔 생각치도 못했던 이 도시의 문제를 발견했다. “그런데, 횡단보도 신호 너무 짧지 않아?”
총성에 빠르게 튀어 나가는 100m 달리기 선수들처럼, 신호가 바뀌고 바로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해도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걸음걸이가 느린 노인, 보폭이 좁은 어린이나,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에게는 이 신호가 매우 짧았겠구나.’ 생각했다.
지하철에는 계단이 너무 많았다. 에스컬레이터가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내려갈 때에는 없는 경우가 많았다.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처음으로 이용해보았다. 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 사람들이 전부 계단을 이용하는 게 불편한 사람들인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다 그들도 어딘가 불편할 수도 있는데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자고 생각을 고쳤다. 반깁스를 통 넓은 바지로 덮고 있는 나도, 누군가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출퇴근길 열차에는 혹시 발을 밟힐까봐 타기 겁날 정도로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팔다리를 최대한 웅크린 뒤 열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을 보며, 열차 몇 대를 그냥 보냈다. 저 속에는 내가 낄 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스에서 보았던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 장면이 떠올랐다.
‘무빙워크에서는 절대로 걷거나 뛰지 마십시오.’라니. 이토록 의미 없는 경고가 다 있나. 모두가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무빙워크 위에 서서 생각했다. 가만히 멈춰있어도 발아래 발판이 끊임없이 나를 앞으로 밀어대는 와중에, 사람들은 부스터를 단 듯 성큼성큼 내 옆으로 지나갔다. 이 무빙워크에 가만히 멈춰있는 사람은 없다. 좁은 에스컬레이터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가는, 뒤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욕먹기 십상이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숏츠 영상들은 15초에서 30초를 넘지 않는다. 사람들은 피드를 아래로 내리면서 자기 취향이 아닌 콘텐츠를 가차 없이 넘겨댄다. 콘텐츠뿐만 아니라 애인을 사귈 때도 그렇다. 마음에 들면 오른쪽, 내 취향 아니면 왼쪽. 소개팅 앱에서는 사진 몇 장으로 내 타입인 사람과 아닌 사람을 빠르게 평가한다. 노래 길이도 점점 짧아진다. 3분이 채 되지 않는 노래를 들으며, 전자레인지에 2분만 돌리면 완성되는 편의점 음식을, 5분 만에 먹어 치운다.
누구보다도 시간을 아까워하면서 분 단위로, 초 단위로 산다. 그러면서 그 시간을 밀도 있게 쓰지는 못한다. 뒤처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을 불안해한다. 무언가에 진득하게 몰입할 시간도, 다른 사람들을 둘러볼 여유도 없다. 걸음이 빨라질수록 마음의 병은 깊어져 간다. 어두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가득한 월요일 지하철 안에서, ‘불안’이라는 전염병을 옮기는 회색 쥐가 된 기분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