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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Jun 24. 2021

준비하는 삶

어릴 적에 나는 꽤 모범생이었다. 적어도 초등학생 때까지는 그랬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숙제를 하고, 준비물을 챙겨놓아야만 뭔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마음이 놓였다. 그래 봤자 기껏해야 놀거나, 책을 읽거나, 자는 것뿐이었지만 그래도 그래야지만  안심이 됐다. 아마, 초저녁부터 잠이 들어버리기가 일쑤여서 더 미리미리 해둔 건지도 모르겠다. 준비물을 챙기는 그 과정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연필을 깎을 때였다. 샤파, 은색 기차 모양 연필깎이에 연필을 돌려서 그 뾰족한 심들을 나란히 필통에 넣어둘  때가 가장 좋았다. 

중고등학교 때, 나는 모범생의 범주를 벗어났고, 그런 ‘경건한’ 순간은 내 일상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회사를 다니면서 다시 그런 순간이, 아니 그와 비슷한 순간이 찾아온 것 같다. 요즘은 저녁마다 커피를 간다. 수동 커피 그라인더에 커피 알갱이를 넣고 커피가 분쇄될 때까지 손잡이를 돌린다. 마치 어릴 적 연필깎이 손잡이를 돌릴 때와 비슷하다. 봄이나 가을, 겨울에는 아침에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뽑아서 텀블러에 담아서 갖고 나가는데, 여름에는 아무래도 뜨거운 커피를 찾지 않게 된다. 그래서 선택한 게 전날 밤에 미리 커피를 내려놓고는, 아침에는 텀블러에 얼음과 커피만 넣어서 출근하는 것이다. 때로는 이 과정이  무척 귀찮아서 그냥 자버리기도 한다. 그런 다음 날은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투 샷이나 내려서 얼음을 넣고 커피를 넣고 이래저래 바쁘게 움직여야만 한다. 

엊저녁도 커피 알갱이를 분쇄기에 넣고 열심히 손잡이를 돌렸다. 부엌의 작은 창으로  바깥을 보면서 무심히 커피를 갈다가, 문득 연필깎이 손잡이를 돌리던 때가 떠올랐다. 어릴 때는 연필 몇 자루로 내일을 준비했는데, 이제는 커피를 갈면서 내일을 준비하는구나. 열 살 이전부터 지금까지- 사람은 늘 이렇게 뭔가를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어쩐지 한숨을 폭 내쉬다가 문득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다. 아니야, 준비할 게 있는 삶이 얼마나 좋아? 더는 연필을 깎지 않고, 더는 커피콩을 갈지 않아도 되는 삶, 그런 삶이 온다면 또 어쩐지 슬퍼질 것 같았다. 손잡이를 더 열심히 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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