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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버스, 냉동학생과 우주선

by RNJ
관제탑, 야자수, 관광버스


4년 전 겨울. 오피스텔에 이삿짐을 풀자마자 버스를 타고 제주도를 하염없이 돌아다녔습니다. 일주도로를 빙 둘러 달리는 201번, 202번. 그리고 급행 버스 101번 102번. 이 정도 버스만 알아도 제주 곳곳을 손쉽게 돌아볼 수 있습니다. 매일 집에서 제주 여행을 시작하는 자유를 누렸던 저는 훤한 대낮에 버스를 홀로 타는 경우가 많았죠. 승객은 다음 마을과 시장으로 넘어가는 몇몇 노인과 올레꾼 뿐이었습니다. 버스는 바다를 한편에 두고 한라산을 중심축으로 삼아 섬을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홀로 버스 여행을 떠날 땐 주로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었습니다. 바다를 풍경으로 음악을 들으며 낮잠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종점에 도착해 있곤 했죠. 취미가 일이 되면 괴롭다고 했던가요? 학생들을 인솔하는 지도사에게 안락하고 푹신한 관광버스는 노동의 현장이었습니다. 딱딱한 의자, 박력 넘치는 승차감을 자랑하던 자유로운 시내버스가 그리워졌습니다. 거기에는 최소한 하차벨이라도 있었는데! 관광버스는 하차벨은커녕 자리에 창문도 없습니다. 학생들이 흘린 음료수 냄새와 달달한 귤 향기, 학생들의 발 냄새가 몽땅 섞인 이 냄새는 어떤 조향사도 흉내 내지 못할 겁니다. 아이들이 여럿 모이면 그곳이 어디든 교실이 되는 것 같네요.


조용한 버스 안에서 창 밖을 원 없이 즐기고 싶지만, 지도사는 버스에서 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아픈 학생이 있나 확인하고, 다음 일정지에 예약이 겹치는 다른 학교가 없는지 체크하고(남학교가 겹치면 언제나 싸움이 납니다), 부장 선생님의 열정적인 인생 조언과 일대기(나한테 왜?)를 경청하고, 호텔에 도착 시간과 석식 예정 시간을 미리 알려주고, 다음 여행지에서 아이들이 꼭 알아야 하는 정보와 유의사항을 다시 한번 점검합니다. 이동시간이 짧으면 버스에 오르자마자 관광지 정보와 유의사항을 와다다 쏟아내야 합니다. 안전은 두 번 세 번 강조해도 모자랍니다. 특히 흥이 넘치는 10대 아이들에게는.


지도사는 버스에서 항상 가장 우측, 제일 앞자리에 앉습니다. 기사님은 운전을 하느라 바쁘고,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던 교무실을 벗어난 선생님은 지독하게 습하고 더운 야외 수업에 녹초가 되어있습니다. 기후에도 익숙하고 시차 적응도 필요 없는, 비교적 쌩쌩한 저는 잡무가 어느 정도 정리되면 고요한 버스 안에서 제주를 관람합니다. 초원에 삼삼오오 모여 풀을 뜯는 말과 태풍에 꺾인 삼나무. 며칠 전, 저번 주, 지난달에도 뻔질나게 다녔던 길이지만 무언가 달라 보입니다. 가을도, 올해도 끝나갑니다. 산록남로에서 만난 한라산은 노을 없이도 충분히 붉어 보입니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로 가득 찬 버스는 쉬는 시간의 교실과 정말 비슷합니다. 아이들이 전부 세미-코마 상태(=빈혼수)에 빠져있기 일쑤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수학여행 일정표는 학교 수업시간표와 아주 비슷합니다. 관광지 1곳당 50분~1시간 단위로 일정이 잡히고, 버스는 평균적으로 10~15분 정도를 달려 다음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다음 수업, 아니 관광지에 내릴 준비를 하고 뜨거운 날씨에 녹초가 되어 다시 버스에 오릅니다. 에어컨 아래에서 아이들은 다시 말없는 냉동인간이 됩니다. 멀리 떨어진 행성으로 인간을 실어 나르던 SF영화 속 우주선 같습니다. 우주선에서 홀로 깨어 이런저런 일(영화에서는 길어봐야 1~2초를 배정받는)을 장기간 수행한 수염이 덥수룩한 인간은 저와 버스 기사님이 아닐지.


에너지 드링크, 푹신한 방석, 귤, 잣밤나무 열매 한 움큼, 커피. 친절한 기사님은 잡무와 잡무로 골머리가 썩고 있는 저에게 이것저것 말없이 챙겨주십니다. 우리가 터프하고, 묵묵하다고 느끼는 제주 남자들은 제 고향 부산 사람들과 아주 비슷합니다. 스포츠 고글을 쓴 토박이 기사님이 기어봉을 화려하게 휘두릅니다. 리어 뷰 미러에 매달린 분홍색 조랑말 인형과 손주 사진이 정신없이 흔들리네요. 일주동로에서 '탑건-매버릭'을 4D로 체험하는 영광이란(깨어있는 관람객이 저 하나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불쑥 카드를 건네던 기사님이 떠오릅니다. "커피. 같이 일하는 팀원들이랑 같이 사 마셔. 내껀 됐고"


모두가 쉴 때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선생님과 학생들이 곯아떨어질 때. 기사님은 두 눈을 부릅뜨고 액셀을 밟고, 지도사는 에어컨 바람으로 쏟아지는 잠을 쫓으며 미처 끝내지 못한 잡무를 정리합니다. 여행은 즐겁습니다. 달리는 차에서 잘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여가 서귀포에서 가장 맛있는 짬뽕집인데..." 과묵한 생존자 2명은 이런저런 주제로 잡담을 나눕니다. 마지막 날 공항에서 학생들 캐리어를 힘께 내리며 기사님과 힘차게 악수를 나눕니다. "다음에도 내 버스 탈꺼?" "생각해 볼게요."


버스기사님들이 반대편 차로의 동료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듯이, 이젠 길을 걷다가 관광버스가 보이면 기사님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싶어 집니다. 기사님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 하나 없이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고 주차장에 남아 여행자들을 기다립니다. 집을 떠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삶은 참 고독합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쿠퍼와 아멜리아를 23년 동안 기다렸던 로밀리가 떠오릅니다. 기다리고 감내하는 삶이 없다면 그 누가 목적지에 다가설 수 있을까요? 어른에게 수학여행이란 외롭거나 그리운 여행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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