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코스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학교도 있습니다. 자전거 타고 해안도로 달리기, 역사 문화 탐방, 서핑체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늦게 변화하는 곳 중에 하나가 학교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는 사회로 변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옵션 속에서 '한라산 등산'을 선택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에 종종 놀라움을 느낍니다. "도대체 왜?" 제가 묻습니다. "언제 다시 오겠어요. 제주도 왔을 때 가봐야죠." 학생이 답합니다. 자발적으로 고행을 선택하는 이들의 표정과 말투는 무언가 다릅니다. 요즘 아이 답지 않은 열정 반, 그리고 광기 반.
한때 눈이 내린 한라산의 매력에 푹 빠져, 매주 산에 올랐던 때가 있습니다. 이른 새벽에 첫 차를 타고 산을 오르다 보면 지난주와 비슷한 시간, 비슷한 장소에서 느꼈던 감정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내가 왜 또 이 고생을 하고 있지?' 하나의 숨결, 하나의 걸음마다 후회가 밀려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힘듦이 중요하지 않은, 제가 다시 느끼고자 했던 환희(산소교환이 부족해서 뇌가 기분이 좋다 착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의 장소에 도착할 때마다 불평등해 보이는 교환의 미학이 무엇인지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힘들 줄 알고 찾아온 길이며, 후회를 씹어 삼키며 걸을 때 느껴지는 그 씁쓸함이 어느 순간 달콤함으로 느껴질 때, 비로소 완숙함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헤어밴드를 한 장발의 남자. 다소 독특할 저의 몰골 덕분에 산을 오르며 사람을 사귀는 경험을 종종 할 수 있었습니다. 벌초를 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아저씨, 전 대통령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 싶었다는 아주머니, 꽁꽁 얼은 길을 앞에 두고 아이젠이 없어 쩔쩔매던 학생들까지. 함께 정상을 오르고,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우리는 정상에서 헤어집니다. 내려가는 길이 즐겁습니다. 함께 짊어진 고행의 시간은 잠시 바닥에 던져놓고, 이제는 여유를 즐길 시간입니다. 지평 너머에 푹신하게 깔린 구름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스쳐가는 등산객의 표정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발견합니다.
내 의지로 선택하고 걷고 오를 수 있는 세상. 어떤 전통이 대물림되지 못할 때 빛을 발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효율성을 평가하는 주체가 분산되는 시대 속에서는 누구나 즐겁게 한라산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어린 시절의 그 답답했던 풍경은 시간을 만나 새로운 계절로 변했습니다. 소소한 변화를 바라보는 20대 후반의 낙관주의자. 새로운 풍경을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을 저는 산에서 배웠습니다. 한라산을 선택한 10대 후반의 아이들은 자연 속에 새겨진 이전의 발자국을 따라 오릅니다. '자발적' 회귀는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이자 본능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