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인이 사랑하는 책방 - ‘미스터리 유니온’
문을 열고 들어가 몇 걸음 채 걷지 않았는데 이 공간은 부감 숏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길고 좁은 복도의 좌우 벽에 맞춤 책장들이 높게 자리잡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느릿느릿 움직이며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나를 누군가 천장에서 느긋하게 바라보는 느낌이다. 아티스트들의 작업실 방문기를 건축 투시도처럼 세밀한 그림으로 표현해 낸 세노 갓파의 에세이 『작업실 탐닉』의 한 장면처럼. ‘미스터리 유니온’은 서점과 개인 작업실 중간처럼 아담하고 아늑하다. 책방에 들어갔을 때 책방지기는 세노 갓파의 투시도 속 장인들처럼 서점 가장 깊숙한 곳에서도 가장 구석 공간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추리소설 전문 책방인 미스터리 유니온은 서울의 신촌 기차역 근처에 있다. 기차역과 추리소설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맞춘 것처럼 잘 어울린다. 왠지 『셜록 홈즈』 전권 10권을 너끈히 드실 단단한 체격의 주인이 있을 것 같지만 가녀린 체구의 조용한 여자 대표가 운영한다는 게 이 공간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책방 곳곳에는 “추천 도서를 물어보시면 말씀해드려요” 문구가 적힌 테이프가 붙어있다. 손님이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진 말을 걸지 않는,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책방이다. 책들은 ‘비밀, 살인, 괴기, 미스터리’ 같은 말들로 가득하지만 책방을 채운 불빛은 따뜻하고 여느 서점처럼 정답다. 나는 책방 주인을 괜히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 속의 미스 마플로 생각한다. 어떻게 안 그럴 수 있을까.
보통의 동네책방들처럼 이곳 역시 사방에 둘러볼 것들이 많다. 책도 봐야 하고 책방에서 만든 노트 굿즈도 봐야 하고 추리소설가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들도 봐야 한다. 그중에 내가 아는 작가는 누구인지, 나는 모르지만 이 책방은 누구를 알아야 된다고 말하는 것 같은지도 살펴야 한다. 책방에서 모르는 작가의 이름을 알아가는 건 큰 기쁨이다. 소설들은 크게 나라별, 작가별로 정리되어 있다. 이 분류법 덕분에 나는 이제껏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몰랐던 작가들의 국적을 조금 알게 되어 신이 났었다.
미스터리 유니온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책은 프랑스와 영국의 책들이었던가. 프랑스 사람들은 추리소설을 몹시 좋아한다. 자국 추리소설이 심심치 않게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추리소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고 최근에는 한국 장르소설에 대한 관심도도 많이 올랐다고 한다. 몇 년 전에 서미애 작가의 책들을 따로 모은 매대가 프랑스 서점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작가 초청 북토크도 진행된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 서브컬처처럼 느껴지는 추리소설도 유럽이나 미국, 일본에서는 이보다 더 대중적일 수 없다.
미스터리 유니온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책은 일본의 것이다. 한국 추리소설 독자들의 일본 추리소설 사랑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일본 소설은 본격 미스터리, 사회파 미스터리, 일상 미스터리 등 세부 장르도 다양하고 작가군도 넓다. 일본 추리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유명 랭킹들도 책들을 알리는 데 큰 몫을 한다. 반면 한국 추리소설은 미스터리 유니온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독자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는 책장 중 하나다. 책방지기는 한국 추리소설이나 『계간 미스터리』 같은 한국 추리소설 전문 계간지는 아무래도 외국 추리소설들에 비해 인기가 덜 하다고 했다. 나는 만화책 『20세기 소년』에서 할아버지가 “볼링의 시대는 돌아온다”고 소리쳤듯 마음속으로 ‘한국 추리소설의 시대는 온다’라고 소리친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다른 나라 소설들로 책을 더 많이 팔아 미스터리 유니온도 오래오래 가길 바란다.
유명한 추리소설가이고 한국에서도 출간만 됐다 하면 늘 추리소설 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작가이지만 나는 한 번도 작품을 접해보지 않은 작가 중에 요네자와 호노부가 있다. 애니메이션 「빙과」를 계기로 한국에 널리 알려진 ‘고전부 시리즈’와 역사 미스터리 『흑뢰성』은 나 빼고 모든 추리소설 한국 독자들이 읽은 느낌이랄까. 미스터리 유니온에서 하고 싶은 경험 한 가지를 고르라면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작가의 작품을 추천받아 구매하는 것이었다. 체감상 10분 넘게 혼자 서점을 둘러보고 책을 고르다가 책방지기에게 요네자와 호노부 책 중에 어떤 책을 가장 먼저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여쭸더니 용수철처럼 내게 오셨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모든 책들을 다 읽고 싶은데 이것들을 다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첫 번째 책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다. 책방지기는 진지하고 묵직한 책,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나눠 설명해 주셨다. 가장 최근에 나온 『가연물』까지 설명을 다 듣고 『왕과 서커스』를 최종 선택했다. 진지한 추리소설이면서 네팔 왕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기자의 이야기라는 점이 매혹적이었다. 네팔 배경이라니, 그런 추리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다. 안 읽을 수 없다.
미스터리 유니온이 셜록 홈즈, 명탐정 코난 시리즈처럼 오래 사랑받고 회자되는 공간이 된다면 좋겠지만 실제로 한국에서 이런 공간이 100년 유지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스터리일 것 같다. 그러나 꿈꿔볼 수는 있는 일. 우선 요네자와 호노부의 다른 책들도 모두 이곳에서 구매해 보기로 한다. 용수철처럼 내게 와 추천해 줄 대표님의 안녕을 바라며.
위치 : 서울시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88-11
운영 시간 : 화~토요일 13시~20시
인스타그램 : @mysteryunionbook
김소망_나비클럽 마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