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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Oct 11. 2024

내가 나임을 증명하라고?

옹진골 옹고집

이상교 글 / 김유대 그림 / 48쪽 / 16,000원 / 국민서관



판소리계 소설 「옹고집전」을 어린이의 시선에 맞게 풀어 쓴 그림책이다. 이 이야기에는 선한 인물이 고난을 겪고 신분적 상승을 이루는 영웅적인 서사와는 전혀 다른 주인공이 등장한다. 선함과는 거리가 멀고, 뭐든 자기 맘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심보가 고약하고 고집이 센 옹고집이다. 게다가 집안사람들이 가만히 있는 꼴은 보지 못하고, 여든 넘은 어머니까지 구박하는 망나니이다. 동냥을 얻으러 온 사람에게 밥 한 톨 내어주기도 아까워 매질해 다시는 얼씬 못하게 하니 이런 악인이 따로 없다.


어린이책에서 악인이 주인공이라니. ‘고랫등 기와집’과 ‘대단한 심술’은 서로 짝을 이루며 그림책의 전반부를 이끌어간다. 옹고집의 부유함을 펼침면 가득 보여주는데, 그 안에 꽉 들어찬 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압권이다. 제각기 자신이 맡은 바 일을 하고 있음에도 다양한 표정으로 일의 경중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에 대비하여 옹고집의 표정은 노골적이리만치 직설적이다. 옹고집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또 어떠한가. 언어를 이미지화해서 보여주는 방식은 판소리에서 고수의 역할과 같이 추임새 기능을 하며 이야기의 흥을 돋우기도 하고, 독자의 반응을 이끌어가기도 한다.


영원히 위풍당당할 것 같은 옹고집에게도 시련은 닥친다. 이는 옹고집의 만행을 듣고 찾아온 학 대사에 의한 응징인데, 학 대사의 능력을 알 길이 없는 옹고집은 말 그대로 그의 덫에 걸리고 만다. 이야기의 절정은 진짜와 가짜를 가리는 헛옹고집과 참옹고집의 자기 증명의 서사이다. 참옹고집이 상대해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과 똑같이 생긴 헛옹고집이다. 그러나 주위에 이를 증명해 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악인의 처벌은 물질의 소유를 기반으로 한 자기 인식과 사회적 시선으로 인한 자기 정체성의 해체이다. 자신을 증명해 내는 것만이 원래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정체성의 재형성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한다. 진짜 옹고집이 잘못을 깨닫기 위해서는 세상을 돌며 온갖 고생을 경험하는 것으로 가능한데, 이는 타자의 삶을 경험함으로써 성숙한 자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옹고집이 누더기에서 다시 상승 구도로 나아가며 가정과 사회의 올바른 구성원으로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은 은유적이다.


이 그림책은 고전을 어린이들이 이해할 만한 언어적인 유희와 해학적인 그림으로 유쾌하게 표현하였다. 상투적인 교훈의 논리를 내세우기보다는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며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책무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웃음거리를 만듦으로써 시원하게 웃을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시원하게 웃고 나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아야 한다. 이로써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저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하는 해학성으로 웃음을 유발함과 동시에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여백을 남긴다. 


조성순_아동문학평론가, 『한국 그림책의 역사』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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