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과 나 - 이예숙
꼭두새벽에 일어난다. 어둑어둑한 시간에 집을 나서 지방의 작은 학교로 향한다. 수도권을 조금만 벗어나도 아름다운 산과 강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림책작가가 되고 난 후 전국으로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특히 섬이나 작은 분교에서 초청하면 두말하지 않고 달려간다. 왠지 어릴 때 내 모습이 그곳에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어린 시절 이야기는 다소 진부할 수 있지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예술가로 살겠다는 꿈을 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부모나 친척의 영향을 받아 작가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뭔가 특혜를 입은 사람들 같아 부러웠다. 내 주변엔 사촌에 팔촌을 다 뒤져도 그 흔한 예술가가 한 명도 없었다. 내 가족과 친척들은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만이었다. 그 작은 욕망조차 쉽게 주어지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예술이란 TV 속 드라마에 나오는 부자들의 ‘그들이 사는 세상’ 쯤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예술을 하려면 돈과 인맥이 있어야 돼.” “쓸데없는 그림 그려봐야 굶어 죽기 딱 좋아.” 이런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런데 나는 예술이 좋았다. 그냥 좋았다. 아마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인 것 같다. 전문가용 물감 살 돈이 없어서 미술부엔 들어가지도 못하고 연필 한 자루만 있으면 되는 문예부를 차선으로 선택했어도 나는 그냥 예술이 좋았다. 그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 문학소녀로 자랐다.
고2 겨울, 입시 미술을 시작하려고 상담을 받으러 간다는 친구를 따라 미술학원에 처음 갔다. 주변인으로만 살 것 같았는데 미술을 전공으로 하는 삶을 가까이에서 보니 숙명이라 여겨졌다. 형편이 나아진 건 아니었지만 처음 꺼낸 딸의 부탁을 엄마는 거절하지 못했다. 입시 미술을 딱 1년 준비하고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입학했다. 입시 미술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는 게 곧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예술가의 삶을 꿈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열아홉 살!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사인을 만들었다. ‘아티스트 예’ 그리고 여기저기에 사인을 했다. 그것은 예술가로 살겠다는 나의 다짐이었다.
미술대학을 다니는 4년 내내 불편한 무언가가 가슴을 콕콕 찔렀다. 이곳에 내가 있어도 되는 걸까? 당장 이번 달 생활비를 고민하면서 100호 화판에 아교와 호분을 바르는 나를 바라봤다. 예술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공간을 임대해 교습소를 운영하면서 그림을 그리려고 했지만 일과 작업을 병행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출판 미술을 접하게 되었다. 책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면 돈을 준다는 것이다.
그림책을 보고 자란 세대가 아니었기에 책에 그림이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출판 미술을 처음 만난 날 나에게 꼭 맞는 맞춤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책 작업이라면 누구보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의 정신적 소산물을 글과 그림으로 담아내는 책을 만드는 일. 네모난 책은 나에게 화판처럼 느껴졌다. 이 작은 네모 안에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구나. 인맥이나 돈이 없어도 예술을 할 수 있겠구나. 게다가 책이라는 구조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접고 펼치고 오리고 붙이는 등 책의 구조로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건 큰 매력이었다.
2009년에 시작한 그림책 공부는 2019년이 되어서야 첫 책 『이상한 동물원』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후로 네 권의 창작 그림책을 출간했다. 생각보다 창작 작업을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평생 할 일이라면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다. 그사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 충분히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상한 구십구』는 2023년 아트앤팝업 출판사에서 나온 첫 책이다. 인간의 욕심으로 사라져가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책의 물성과 구조에 담아 표현했다. 이 책을 들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열아홉 살 때 만들었던 ‘아티스트 예’라는 사인을 지금도 한다. 아이들을 만나면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날 때가 있다. 나처럼 미술학원을 다니지는 못 하지만 미술 자체를 즐기고 좋아하는 미생의 예술가들을 만난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모든 이가 예술을 만나고, 모든 이가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책 작업은 나를 성장 시킨다. 책이 한 권씩 출간될 때마다 나도 한 뼘씩 자라는 것을 느낀다. 그림책에는 다정한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따뜻한 세계가 있다. 누구나 어린 시절이 있듯 누구나 품고 있는 따뜻함을 그림책에서 만날 수 있다. 미숙하지만 계속 성장하는 아이처럼 내 그림책 세계도 계속 성장 중이다. 그리고 예술가가 되겠다는 나의 꿈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예숙_그림책작가, 『이상한 구십구』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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