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자리
김다은, 정윤영 글 / 신선영 사진 / 352쪽 22,000원 / 돌고래
동물단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가끔 농장 동물 캠페인 담당 활동가를 따라 구조한 흑염소와 돼지, 닭과 칠면조를 만나러 갑니다. 햇살과 바람이 잘 통하는 산 중턱이 그들의 보금자리입니다. 개 도살장에서 구조된 흑염소 가족은 자칫 구별하기가 쉽지 않지만, 계속 바라보면 누가 찰랑이고 누가 달이, 별이, 구름이인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털의 곱슬기와 뿔의 방향, 성격이 다르거든요.
우리는 흔히 ‘동물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면서도 이익과 취향에 따라 동물의 종과 위계를 나누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인간의 기준에서 귀엽지 않은, 경제적 가치가 없는, 어리지 않은 동물에게는 살아갈 공간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생명 그 자체로서 비인간 동물이 살아갈 자리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그들을 보살필 사람과 자원도 요원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동물의 삶과 보살핌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동물의 자리』는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에 꼭 알맞게 반갑고 필요한 책입니다.
이 책은 네 개 생추어리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생추어리는 구조된 동물이 인간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공적인 보호소인 동시에, 타고난 종의 생태적 특징에 맞는 야생과 자연에 가깝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조성된 보금자리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최근 몇 년간 소와 돼지, 말, 곰을 위한 생추어리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생추어리는 아직 대중에게 생소한 개념이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삶은 더 생경하기만 합니다.
『동물의 자리』의 첫 번째 장은 동물해방물결 활동가들이 일구는 ‘인제 꽃풀소 달뜨는 보금자리’ 이야기를 다룹니다. 번호표로만 분류되던 육우가 이름을 얻기까지의 과정, 폐교된 학교에 소들이 이사를 오게 된 경위, 죽음과 삶, 그리고 소들이 산책을 다녀온다거나 감기에 걸리는 구체적인 일상의 모습을 생생한 문장으로, 아름다운 사진으로 함께 읽을 수 있는 건 사려 깊고 다정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소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마음에 남습니다.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로, 또한 의미 있는 타인으로 존재하게 된 소들과 활동가들, 마을 사람들의 여정은 계속해서 지켜보고 응원하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화천 곰 보금자리’의 사육곰, ‘제주 곶자왈 말 보호센터 마레숲’, 돼지들이 살고 있는 ‘새벽이생추어리’의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는 동시에 제각기 달라 소중하고 귀합니다. 축산업 시스템을 견인하는 자본에 비해서는 아주 초라한 규모의 운영비용, 현실적인 여러 제약과 한계에서도 활동가들은 연대와 돌봄을 멈추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동물들이 어떻게 하면 더 잘 지낼 수 있을지, 지금 눈앞의 동물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치열한 성찰과 행동은 동물들이 나이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생추어리에 살아가는 개별 동물들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그 일상의 묘사는 분명 생경하고 아름답지만, 생추어리를 절대적인 공간으로 이상화하지는 않습니다. 각 동물에게 생추어리는 적응을 위해 애써야 하는 치열한 투쟁의 공간이기도, 인간에게 등 떠밀려 원하지 않는 도전을 하고 어쩔 수 없는 실패를 해야만 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어진 환경을 물건 아닌 생명으로서 받아들이며 어려운 발걸음을 떼고, 괜찮은 좌절을 하며, 있는 힘껏 삶을 살아가는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생추어리가 동물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자리인지를 분명한 언어로 답변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건 결국 사랑”이라는 동물해방물결 활동가의 말을 빌려, 『동물의 자리』 또한 결국 사랑으로 쓰여지고 엮인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살장에 끌려가야 했을 소와 돼지, 좁은 철장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을 사육곰, 경주마로 혹사당하다 ‘고기’가 되어야 했을 말들에게 생긴 이름과 자리는 누군가의 사랑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고 생추어리의 여정과 각종 사건·사고가 촘촘하게 관찰되고 정갈하게 정리되어 책으로 태어난 것도 결국 생추어리에 사는 동물들, 살았으면 하는 동물들, 그들을 보살피는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동물의 자리』는 동물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상호적이며 서로를 향한 호혜성 속에 새로운 관계 맺기가 가능함을 알려줍니다.
책장을 덮은 후에 다시 이따금 만나는 동물들을 생각합니다. 저와 함께 사는 두 고양이는 늙어가는 중이고, 하천에 사는 오리들도 천천히 나이 들어가는 중이겠죠. 염소 봄이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마음 한편에 걸립니다. 저는 우습게도 그냥 이들과 ‘아는 사이’가 된 것만으로도 세상이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더 열리고 충분한 방향으로의 변화입니다. 『동물의 자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편견 없이 읽히길 바라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인 메밀과 머위, 주영이와 우투리, 새벽이와 잔디, 허밍과 아다지오의 이름을 알고 그 일상을 책 건너편으로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축이 조금 옮겨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기가 되기 이전의 생명으로서 살아가는 동물의 일상, 나이 든 동물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방향으로요.
김나연_동물권행동 카라 활동가, 『동물에게 권리가 있는 이유』 공저자
-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4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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