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리 – 《은희》
소설과 (언론)기사는 어떻게 다른가? 각각의 정의와 관점은 나열할 수 있겠지만, 빠르게 피부에 와 닿는 차이는 ‘허구성’일 것이다. 소설이 사실로 쓰일 수 없는지, 기사가 허구로 쓰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밀어두고서, 둘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진실’을 써내는 작업이라 생각된다.
박유리의 《은희》는 부산에서 있었던 ‘형제복지원’ 사건을 바탕으로 쓰였다. 그녀는 14년도 <한겨레>에서 이 사건을 기사로 써낸 바가 있다. ‘32회 관훈언론상 저널리즘 혁신부문’을 수상한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이다. 200자 원고지 120매에 달하는 박유리의 ‘형제복지원’ 첫 회 기사는 한국 일간신문 역사상 가장 긴 것이었다. 대하기사의 인트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기사는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취재와 자료 수집을 통해 쓰여졌습니다.”
내러티브, 혹은 스토리텔링이라는 기법은 픽션에서만 사용되지 않고 비평이나 언론 기사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기존의 기사 쓰기에 있어서도 언론의 중립성은 물론 사실(팩트)과 (총체적)진실을 쓰는 것의 딜레마가 오가는데, 소설 형식의 기사라니?
소설의 형식이 환기하는 ‘허구성’은 이야기가 실재하는 사건이나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한다. 덕분에 자유로이 원본이 없다고 여겨지는 ‘있을법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있을법한 이야기’는 거기서 멎지 않는다. 사실이 아님에도 현실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하며, 때론 사실이 아님에도 현실과의 유사성은 필연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야기(들)’을 외면할 때, 현실은 ‘있을법하지 않은 것’이 되어갈지도 모른다.
“두 발이 아닌 네 발로. 네 발로 땅을 딛고서 어둠 속에서 침묵을 뱉었어. 숨겨온 말들이 흙에 떨어져 언젠가 피어날 거라고, 누군가 우리들의 말을 발견할 거라고. 우린 미래로 갈 수 없었어. 모독의 시간을 허우적거리는 수밖에.”
박유리 - 《은희》 162쪽
과학적이며, 이성적이며, 증명 가능한 역사로 기록된 사실들만이 현실과 진실을 구성할까. 증명할 수 없는 증언과 혼란스러운 기억들은 현실과 진실을 구성할 수 없는 것일까. 다르게 말한다면, 사실·진실이라는 지위로써 증명 가능한 수단들은 어떻게 정의되고 구성되어 왔는가?
“저는 사실, 말을 잘 못 해요.”
박유리. <한겨레 토요판 기자들의 유혹하는 글쓰기> 6회차 강의. 2015년 03월 02일. 한겨레문화센터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는 오롯이-온전하지 못한 기억인 것처럼, 이 소설의 세계도 제각각의 기록·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억에 얽매인 이, 자신이 탄생하기 이전의 기억들과 마주한 이,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이……. 시작 시점에서 은희는 이미 고인이다. 하지만, 죽은 자의 기억은 세계를 구성할 수 없는 걸까.
《은희》의 시작은 아우슈비츠에서다. 고아로 폴란드 가정에 입양되어 살아온 준에게 편지가 왔다. 그의 출생, 잉태는 부랑자 수용시설 ‘형제의 집’에서 있었던 강간에 의한 것이었으며, 친모인 은희를 아는 여자가 곧 아우슈비츠를 방문하리라는 내용이었다. 마주하지 않아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자신의 근원과 탄생에 관한 증언과 마주한 준은 격동에 휩싸이지만, 아우슈비츠를 찾은 동양인 여자와는 구토와 스침으로만 지나간다.
아우슈비츠를 찾은 동양인 여자의 이름은 미연이다. 그녀는 어릴 적 은희와 함께 ‘형제의 집’에 수용되었었다. ‘형제의 집’은 그곳을 겪은 이들의 삶을 수없이 망가뜨리고, 죽였다. 미연 역시 그곳에서 망가지고, 망가뜨려 왔지만, 지금은 한 외국어고등학교의 교사로 재직 중이다. 미연은 자식의 죽음을 계기로 이혼(당)하였다. 사고사였다고는 하지만, ‘형제의 집’이라는 지옥에서의 기억을 지닌 그녀는 아이에게도 그곳의 지옥을 반복하여 죽음에 내몬 것이라 여긴다. 미연은 그 악무한의 기억에 얽매여 살아내고 있었다.
폴란드에서 한국까지, 비행기로 8시간 이상의 시간을 걸려 준은 낯선 고향을 찾았다. 준에게 있어서 한국은 말도 뜻대로 통하지 않는 타향이며, 미연에게 있어서 준은 이국에서 스쳐 지나간 낯선 남자일 뿐이다. 단지 그들을 마주할 수 있게 한 것은 은희의 기억이다.
기록은 노동일 수 있고, 해석은 투쟁일 수 있으며, 기억은 전쟁일 수 있다.
준을 한국으로 불러들인 편지를 쓴 병호는 과거사법 개정을 위한 싸움에 있었다. 병호의 기억 속, 가장이자 영웅이던 아버지는 ‘형제의 집’ 출신이다. 병호는 그것을 아버지에게 새겨진 상처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사법 개정을 위해 진실과 기록을 수집하던 중 충격적인 사실과 접한다. 아버지는 ‘형제의 집’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다. 기록이 모든 진실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기록을 보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앞잡이라고 말해 무리가 없는 인물이었다.
은수는 은희의 남동생이다. 그의 기억에는 형제복지원서 폭력과 부조리를 겪으며, 자신과 같은 폭력과 부조리를 겪었을 수감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은수는 자신의 기억을 이어나가는 것이 어려울 지경으로 망가졌다.
‘형제의 집’의 폭력과 부조리, 통제와 억압에 앞장서서 관리계급에 오른 무열은 ‘가해자’인 와중에도 ‘피해자’들을 ‘우리’로 기억한다.
‘형제의 집’에서 나오는 ‘사망자’를 사고사, 병사로 둔갑시킨 의사 병국은 새로운 삶을 둔갑하여 살아가고 있다. 병국이 그 시절 기록·기억과 마주하면 지금의 삶을 잃는다. 그는 그것들을 말소한다.
‘형제의 집’ 사건을 맡은 검사 태수는 한때 옷 벗을 각오로 임했지만, 그가 홀로 해낼 수 없는 일임에 좌절을 기억한다. 그는 도리어 ‘형제의 집’ 사건을 덮어버렸다.
‘형제의 집’ 원장 방인곤의 기억은, 없다고 주장한다.
미연은 은희의 죽음 곁에 있었던 기억을 지니고 있다. 미연은 은희의 죽음을 앞두고 무력하게 바라만 본 것이 아니었다. 미연이 얽매인 기억은, 인간의 삶과 존엄이 회생 불가능할 만큼 무참히 짓밟혀 힘겹게 자살을 택하려던 은희의 선택을 자기 손으로 막았던 것이다. 미연은 줄곧 사과하기를 바라왔다. ‘누구에게?’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사과와 받을 수 없는 용서. 그나마 은희의 아이, 준이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달라며 자신을 찾아왔다. 그는 미연더러 ‘죽어가는 어머니에게 안티푸라민을 발라줘서 고맙’단다.
폴란드에 입양되어 살아온 준에게는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의 기록은 익숙할지 몰라도, 한국의 기억도, 어머니 은희의 기억도 없다. 손에 쥔 편지로부터, 마주할 기억이 삶에 균열을 내리라는 짐작도 능히 할 수 있다. 하지만, 준이 온다. 은희의 기억을 마주하러.
이미 죽어버린 은희의 기억은 그들의 기억과, 《은희》의 세계를 구성할 자격이 없는 걸까.
독자(들) 역시 준과 비슷한 입장에 있다. 자신에게는 없는, 은희의 기억을 《은희》를 통해 마주하여 세계에 동참하는 과정이기에. (어쩌면 그 시절의 기억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지도, 혹은 《은희》의 독자 중 형제복지원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이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은희’의 기억을 마주하러 오고 있지 않은가?)
그 기억의 얼개는 먼저 원장 ‘방인곤’에게 묻는다. ‘그럼에도 기억할 수 있느냐’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못한)’이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느껴야 할 것을 기억하게, 혹은 느꼈어야 했던 것을 기억에 새겨’도 되는 걸까. 가령,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는 진정성이 동반된 사죄를 할 수 있는가?
누구에게?
‘은희’는 이미 고인이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데,
인류의 인간성을 회복 불가능하도록 짓밟은 반인륜적 범죄,
용서-불가능한 일에 대한 속죄는 가능한가?
나는 생각한다. 설령 은희(들)로부터, 사과를 요구받고, 그가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그 사과가 받아들여져서 용서가 이루어진다 해도, 그가 저지른 죄가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죄로부터 기억해야 할 것은 (타자의) 죽음이 아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아픔이며, 그것은 기록으로서의 아픔이 아닌, 느낄 수 있는 아픔이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마주할 아픔에 대한 책임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기억의 얼개는 종장에 이르러 미연과 독자에게 ‘신문’해온다. ‘기억(들)’과 마주할 수 있는가?
《은희》는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부산이라는 지역의 사건을 배경으로 다루며 왜 아우슈비츠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걸까. 식민지배와 민족전쟁을 거쳐 국가의 침몰과 촛불혁명이라는 서사는 한 국가와 민족의 기억으로만 사유 되는 것일까? 증명 가능한 기록과 역사, 핍진성으로 구성되어온 세상을 ‘말 못 해진’, ‘논리적이지 않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계량·계측되어 드러나지 않은’, ‘기억(들)’으로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와 마주해오고 있는 것은 익숙하고도 낯선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마주함’이 ‘변화’를 내포한다면, 과거의 역사나 기억을 마주하는 작업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은희》에 실린 박혜진 평론가의 추천사처럼, 우리가 동참하지 못했던 ‘기억(들)’과 마주하며 치열하게 고민해본다는 것. 그것은 ‘은희’가 살던 30년 전 우리가 하지 못했던 작업이기에, 그 자체로 이미 변화를 함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은희》를 다 읽은 독자라면 서적의 목차 다음 페이지를 다시금 펼쳐보리라 짐작해본다. ‘준’이 오고 있다. 지금 청년인 그가. 그의 기억은 어떻게 구성될까.
나는 당신을 기억한다.
※ 참고 문헌
박유리. 《은희》. (2020). 한겨레출판
박유리.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 제1회 인트로:12년간 513명 사망…“그곳은 지옥이었다” (2014.08.29.).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53443.html#csidx1db958da5195823a22f32a8b43bf2f7
박유리. [유혈의 시리아, 자유와 평화를 꿈꾸다] 명절 ‘임시 휴전’에도 피의 살육 계속됐다. (2012.10.30.). 국민일보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6576670
고나무. ‘한겨레’ 박유리 기자 ‘관훈언론상’…‘형제복지원 사건’ 발굴 보도. (2014.12.02.). 한겨레http://www.hani.co.kr/arti/society/media/667228.html#csidx1c37c88fc235ccea098bc65ec4576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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