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만 떠나는 게 아니었다. 우리 윗집에 살았던 애숙이 엄마를 우리보다 항렬이 높아서 아짐이라고 불렀다. 겨울철이 되면 바느질감을 가져와 본인이 직접 아이들 옷을 지어 입혔다.
아이들도 엄마 따라와서 친해지자 친동생처럼 귀여워했다.
바쁜 농사철이 닥치면 열일 제치고 우리 집 일손을 도와주었다.
건너편에 살았던 권택이 오빠네도 큰 대사 치를 때나 바쁜 일이 있으면 친형제처럼 달려와 도와주었다.
그런데 그분들이 이사를 갔다. 엄마는 그때마다 자식들이 떠나는 것만큼이나 아쉬워했다.
내 기억으로는 월남치마가 유행하던 시기부터 점점 농촌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겨울에도 고무장갑이 없어 뜨거운 물 한 바가지 들고 나와 빨래하던 아낙들이 위아래 냇가에 즐비했다.
새마을 노래가 울러 퍼질 때마다 빨래터도 청소하고 마을길도 넓혔다.
그러나 젊은 청년들은 계속 도시로 떠났다.
처음에는 아저씨만 떠나더니 나중에는 가족들을 데려갔다.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자 냇가로 내려가는 계단도 만들고 빨랫줄도 만들어서 .
무거운 이불 빨래는 걸쳐서 물기도 뺐다.
응달쪽으로 가려면 동네를 가로지르는 냇가를 건너야 했다.
다리까지 올라가기 귀찮으면 중간에 놓인 징검다리 겅중겅중 뛰어서 갔다.
지금은 집집마다 세탁기가 빨래 빨고 고무장갑도 용도가 다양해서 구색대로 갖추고 산다.
징검다리도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냇가에 흐르는 물은 누구도 건드리는 사람 없이 자기들끼리 흐른다.
얼마 전 윗다리 아랫 다리을 다시 놓았다. 높다란 다리가 동네 가운데 위엄을 갖추고 서 있다.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때는 흙다리였다.
비만 오면 떠내려 갔다.
그래도 겨울이 되면 어른들은 산에서 솔갱이 쳐서 형태를 이어 만들고 그 위에 흙으로 덮어 다시 다리를 만들었다. 여름이 되면 또다시 흙다리는 떠내려가겠지만
1970년 초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시멘트로 된 다리가 동네 중간에 하나 놓았다,
그리고 편리하게 섬진강 쪽으로 나가기 좋은 동네 어귀에 하나 놓았다.
여름이 되면 초저녁에 가운데 다리는 할머니들이 비료 포대로 자리를 깔았다.
아랫다리는 동네 아저씨들이 차지했다.
군대 다녀온 이야기 도깨비, 귀신 이야기 듣다가 귀신이 다리 붙잡을까 무서워 숨이 헐덕거리도록 뛰어서 집으로 왔다.
돌계단 몇 개만 내려가면 내려갈 수 있는 냇가였다. 이제는 그 다리도 동네 길보다 훨씬 높아져서사다리를 타고 겨우 내려갈 수 있다. 해가지면 내려가서 돌 몇 개만 들춰내도 대사리를 잡던 때가 엊그제 같다. 이제는 내려갈 수 없는 성역이 되었고 그저 흘러가는 냇물만 고개 숙이고 바라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