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U Oct 14. 2022

삶과 죽음의 합의

죽음이 사라진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해당 글은 과학적 근거가 없고 특정 상황을 가정한 픽션입니다. 재미로 보아주세요.




 2020년, 코로나19라는 감염병이 등장했다. 까마득히 어릴 때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얇은 천 조각으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조악한 형태의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활보했으며, 사회적 거리 두기라 하여 사람 간 물리적인 거리를 두고 생활하는 정부적 지침도 있었다.


 코로나19 이후 수많은 감염병이 창궐하였고 전 세계 인구수가 급감했다. 당시 세계인에게 인구 감소는 어느 정도 필요한 현상이었지만, 이렇게 급속도로 감소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 번은 ‘파인애플’이라고 불리는 질병에 감염된 적이 있다. 이름은 꽤나 귀엽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하는 피부병이었다. 양 팔의 피부가 군데군데 갈라지고 층이 벗겨지는데 그 생김새가 마치 파인애플 껍질 같았다. 다행히 약을 복용하고 일주일 간 치료를 받으니 증세는 나아졌지만 아직까지도 피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때의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2099년은 범세계적인 인구 보존을 위한 대책 마련이 시대적 화두였다. 각종 질병으로만 매년 2000만 명을 웃도는 인구가 사망하며 지난 80년 동안 17억이 넘는 인구가 지구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믿어지는가?


 새로운 바이러스가 발생하는 속도가 치료법이 개발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 이에 대한 차선책이 노화로 인해 자연사하는 인구라도 보존하자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질병을 치료하는 약은 구하기 어려워졌지만 노화를 예방하거나 중단시키는 약은 시중에 널리게 되었다. 어쩐지 세상이 반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내가 100살이 되던 해부터는 노화를 막는 약을 의무적으로 복용하기 시작했다. 30대 때 종류별로 먹었던 비타민제처럼 매일 복용했고, 챙겨 먹는 걸 깜빡한 날은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입안에 1회 복용량 이상을 털어 넣었다. 2120년,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약이 동등하게 배급되었다. 전 세계 사람들의 노화가 중단되며 공식적으로 자연사(自然死)라는 개념은 사라졌다.


 의도적으로 약을 복용하지 않는 건 불법이었다. 일정 주기로 거주지의 센터에 방문해 노화의 진행 정도를 체크함으로써 약의 복용 여부를 증명해야 했다. 자살 역시도 범법 행위였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죄와 벌이 무슨 소용이냐 싶겠지만 장례도 치러지지 못한 채 시체 형무소에 방치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살을 예방하는데 효력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 차치하고 나에겐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복용 시대 이후에 태어난 아이는 20살부터 약을 복용해 평생 20살의 신체로 살아가지만, 나는 100살에 준하는 노화가 진행된 상태에서 복용을 시작했기에 평생 100살의 몸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굉장히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3세기를 살아온 지금, 이제는 삶의 막을 내리고 싶다. 약을 복용하지 않으려  번이고 몰래 흙에다 묻었지만 그럴 때마다  신체 상태가 복용 여부를 증명해 주었고 결국 강제로 약을 투여받는 요양원에 입원되었다. 또한 철저히 훈련된 요양사들은 환자들의 자살 시도를 재빠르게 알아채고는 짜인 매뉴얼대로 침대 위에 다시 눕혀 놓았다. 100  굽을 대로 굽은 허리,  신경을 집중해도  들리지 않는 , 상한 잇몸과 절반 이상 빠져버린 휑한 , 온갖 검버섯이 피어난 적갈색의 피부차라리 100살이 되던 해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세상은 노화에 집착했고, 이러한 풍조는 너무나 당연시되어 버렸다. 노화는 개인의 범법 행위와 다를  없었다. 마치 진공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노화가 멈추자 더이상 자잘한 병치레도 하지 않게 되었다. 괴롭더라도 차라리 병에 걸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로운 죽음이 허용되던 세상에서 언제나 죽음은 두려운 존재였다. 죽지 않기 위해 살았고, 명예롭게 죽기 위해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했다. 노화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처음으로 늙는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 운동을 시작하고, 피부에 좋다는 화장품을 이중 삼중으로 바르고, 매년 건강검진을 받았다. 반면 죽음이 금지 시 되는 세상에서의 나는 이제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다. 육체는 살아있지만 영혼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 이미 떠나간 영혼은 육체의 죽음만을 기다리고, 죽음을 기다리며 오늘도 육체는 가동된다. 100살이 아니라 20살에서 노화가 멈추었다면 지금의 삶이 조금은 나았을까? 저번 달 요양원에 새로 온 25살에 노화가 멈춘 친구는 매일 밤 이불속에서 울기만 한다. 삶에서 더 이상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 없다고 한다. 자신이 10살 때 하늘에 가신 엄마를 향한 몇 세기 동안의 그리움 외에는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단다.


「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일까?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어. 죽음이 없는 세상에선 삶의 값어치가 떨어지지. 물론 이런 생각을 일반화할 수는 없긴 해. 영생 속에서도 행복하게 삶을 꾸려 나가는 사람이 분명 있을 테니까. 하지만 유한함이 주는 가치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어. 삶은 완벽하지 못해서 더 아름다운 거지. 자유로운 죽음이 존재하던 때로 돌아간다면 바다가 잘 보이는 산 중턱에 내 수목장이 되어줄 나무를 고르고 싶어. 나는 바다와 산을 둘 다 좋아하니까. 나무뿌리에서 나는 산뜻한 흙냄새를 좋아하니까. 나의 죽음도 삶의 축복처럼 소중히 대할 거야.」


 축복받는 죽음을 상상하며, 쓰고 있던 일기장에 마침표를 찍었다. 열 수 없는 창문 바깥으로 흰 눈이 펑펑 내린다. 조용히 눈꺼풀을 내리고 죽음을 음미하듯 깊은 잠을 청해 본다.








상황

위 글은 '죽음이 사라진 세상이라면?' 이라는 가상의 상황 설정으로부터 출발한 픽션입니다.


글 연재 패턴

1주차 - 신문 기사나 사설 등을 기반으로 다양한 사회 현안에 대해 글을 씁니다.

2주차 - 하나의 키워드를 설정하여 자유롭게 에세이 형식의 논픽션 글을 씁니다.

3주차 - 하나의 상황을 설정하여 자유롭게 소설 형식의 픽션 글을 씁니다. (본문 글은 여기에 해당)

4주차 - 콘텐츠 (영화, 드라마, 도서, 영상 콘텐츠 등) 를 보고 느낀 감상을 글로 씁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억으로 이루어진 영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