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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독이 Jan 30. 2024

[지극히개인적인서평]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벌써 마흔이 된 당신에게 해 주고 싶은 말들


글. 지독이(브런치스토리 글쟁이)


"나는 더이상 버킷리스트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22년간 파킨슨병을 앓으면서도 유쾌하게 살아가고 있는 김혜남 작가의 코멘트 중 하나이다.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에는 이러한 작가의 개인적인 견해들이 솔직담백하게 풀어져 쓰여 있다. 책을 읽으면서 마치 한적하고 고요한 카페에서 커피가 식어가는 줄도 모른 채, 인생을 반걸음 앞선 작가에게서 지혜 가득한 인생담을 듣는 기분이 들었다. 그 정도로 쉽게 읽혔으나 그 주제는 꽤나 무거웠다. 


작가는 '벌써 마흔이 된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는 부제를 달았지만 꼭 40이라는 나이가 중요하다기 보단, 인생의 애매한 시점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 모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들이 많이 담았다. 내가 가려는 먼 곳을 쳐다보며 걷는 사람들에게, 지금 있는 자리에서 발을 쳐다보며 일단 한 발짝을 떼 보는 것을 강조한다. 생각이 많은 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이들에게, 자기계발에 너무 혈안이 되어 있는 이들에게 작가는 말한다. "스스로를 너무 닦달하지 말고, 매사에 너무 심각하지 말고, 너무 고민하지 말고, 그냥 재미있게 살았으면 좋겠다."


파킨슨병이라는 걸 알고 난 후, 작가는 버킷리스트를 적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병마가 자신을 흔들수록, 버킷리스트에 연연하지 않기로 결심해간다. 어른이 되어 살다 보면 알게 된다. 수많은 한계 속에서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일상(인생)의 소중함을. 내 삶이 허락하는 대로 흘러가듯 사는 삶의 간절함을. 어린 시절의 전지전능함을 포기하며 성장통을 겪어 내고 각자의 삶을 살다 보면 어느새 노을이 보이는 생의 한 지점에 모이게 된다. 마치 황혼처럼. 그 곳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고생했다, 우리 모두."





(179p) 그러다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는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뭔가 모를 두려움이 안개처럼 깔리고, 이제 더 이상 안전하거나 보장된 그 무엇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중심이 흔들리고 주위의 많은 것들이 흩어져 사라지는 느낌에 문득 소스라치게 된다.


우리는 스마트폰 하나면 나 하나쯤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지식을 모두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당장 챗GPT에게 양자역학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도 있고, 오늘 저녁 메뉴도 추천받을 수 있다. 심지어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메뉴들을 스스럼없이 항목별로 나열해주기도 한다. "안녕, Siri." 한마디면 굳이 행동하지 않아도 음성으로만 모든 명령이 가능하다. 이렇게 편리하고 손쉬운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데도 우리는 왜 흔들리고, 왜 부족함을 느끼고, 왜 심리적으로 의지할 무언가를 찾게 되는 걸까? 왜 여전히 인생은 혼란의 연속인 걸까? 그 부족한 곳에 필요한 것이 바로 김혜남 작가의 글처럼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와 조언이 아닐까. 우리가 익히 아는 인생 이야기일지라도 누가, 어떻게 말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녀의 이야기는 마치 조언보다는 이야기에 가깝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이런 시행착오들을 겪었으나, 이젠 이러고 싶어. 너는 어때? 모든 챕터마다 되묻는 듯하다. 만일 인생을 다시 산다면, 어떻게 살고 싶으니?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책에서 이반 일리치는 이런 말을 했다. "다들 내가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확히 그만큼 삶은 내 밑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은 끝났고, 죽음의 시간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인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다가올수록 자신이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아간다. 지극히 세속적이었던 그는 출세와 허영심의 만족을 추구하며 살았지만, 막상 죽음 앞에서는 이제껏 자신이 추구해 온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에게 있어 좋은 시절이란,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었을 때가 아닌 어린 시절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뿐이었다.


작가는 묻는다. 우리는 죽음이 다가옴을 느낀다면,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통해 우리 삶을 성숙시키고 완성시킬 수 있을까? 22년 전 파킨슨병을 진단받고 처음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현실을 직면했을 때 작가도 이반일리치와 다르지 않았다.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해진다. 방황한다. 

하지만 이내 순응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결국 죽음은 모두가 어느 순간에는 도달해야만 하는 곳이고, 그곳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저 흘러가면 되는 게 아닐까. 일단 나는 오늘 오랜만에 아끼던 귀걸이를 하고 출근해 보려 한다. 혹여나 회사 동료가 알아보고 칭찬해준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을 것 같다.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에는 이런 파트가 나온다.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나를 지키는 법".

사실 이 책은 약간의 자기개발서 같은 느낌이 있어 다른 에세이 서적이나 수필집에서도 볼 법한 내용들이 많지만, 이 파트에 나왔던 내용 중 가슴을 쿵- 하고 울리는 한 문장이 있었다.


"그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자 해도 당신이 받지 않으면 그만이다. (p152)"


기분 나쁜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처음으로 받는 것은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그 '느낌'을 상처로 남길지 그냥 상대방에게 돌려주고 머릿속에서 지워버릴지는 오롯이 내 선택인 것이다. 너무 맞는 말이고 당얀한 이치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글로 읽음으로써 좀 더 선명하게 와 닿는 것들이 있다. 이 문장이 나에게 그랬다. 쉽게 상처받지 말자. 내가 상처받도록 두지 말자.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평생 생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헤맸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우리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하나 하나 소중히 여기자. 순간들이 모여 인생이 되고, 인생이 모여 '내'가 될테니. 살아가는 동안, 죽음이라는 노을지는 황혼에 이르기까지, 그 순간 또한 '내'가 될 그 어떤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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